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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적을 가까이하라 (76/159)


76화. 적을 가까이하라
2022.11.21.


나는 제자가 바로 혼담을 엎자고 나설 줄 알았다. 제자 역시 이 혼담을 탐탁지 않게 여기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는 혼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수시로 내게 정숙하라느니 어쩌니 하면서 잔소리까지 퍼붓지 않았던가.


“저와 혼인하기 싫으신지요?”

그러나 제자는 의외로 불길하리만큼 차분하게 되물었다.

입꼬리에는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입과 눈이 따로 놀았다. 눈동자는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기분이 나빠 보여.


“그냥 여쭈어보는 거지요. 그럴 리가요.”

얼른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제자의 표정이 풀리지 않아서 나는 다급히 덧붙였다.


“전 전하와 혼인하는 게 좋습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전하를 연모한다고요.”

“못 믿겠습니다.”

그럼 믿지 마라 자식아!


“제가 여쭈어본 건 황후마마께서 태감을 보내셔서 같은 질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하. 황후마마께서 혼담을 무르고 싶으면 무를 수 있게 해주시겠다 하셨거든요.”

전부 다 황후 탓이라고 하고 나자 제자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어휴 속이 옹졸하기는!


“안 된다고 하세요.”

제자는 단호하게 선을 긋고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빛은 덜 흉흉했으나 어쩐지 마주하기 꺼림칙했다.

시선을 내리깔고서 나는 얼른 대답했다.


“그럴게요. 저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 * *

혼인에 관한 난처한 질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송 태감이 날 찾더니, 이번에는 황제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요 이국사. 경의 혼사 상대는 사람들이 남장한 일을 두고서 감히 신소리를 입에 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예?”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과 혼인해야지 혼인한 후에라도 귀찮게 그 일을 떠드는 사람이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황제의 질문은 두루뭉술했다. 황제는 벼루를 던질 때만큼 확실하게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

날 그 정도로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가?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있을 거다.”

13황자랑 흡사한 황제의 미소를 보는데 월무궁에서와는 다른 의미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혹시 저 황제…… 그 사람이 자기라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 나라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은 현재로서는 황제였다.

황제가 그런 의미에서 질문하는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이전 행보가 행보이다 보니 좀 의심스럽다.


“으음…… 신은 잘 생각나는 이가 없습니다.”

나는 눈치 없는 척 눈살을 찌푸리고서 중얼거렸다.

황제의 눈썹이 위로 슬쩍 올라갔지만 계속해서 눈치 없는 사람인 척 굴었다.

제자랑 혼인하는 것도 별로였지만, 그와 혼인한다고 해서 내 목숨이 더 위험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냥 하기 싫을 뿐이지, 어쩌면 그와의 혼사는 내 목숨을 지켜주는 방도가 될지 모른다.

반면 황제와 혼인하는 건 무덤을 판 다음 그 안으로 직진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황자비가 되면 나중에는 궁궐에서 나와 살지만 후궁이 되면 평생 궁궐에서 산다. 외박도 자유롭지 못하니 도망가기도 더 힘들어질 거다.

심지어 후궁이 되면 린화의 성질머리에 평생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절대로 안 되지!’

황제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평소라면 눈치를 보느라 말을 바꾸었겠지만, 오늘은 그러는 대신 나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13황자 전하를 연모합니다, 폐하. 저는 다른 사람과의 혼사에는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싫어하는 13황자 좋다고 동네방네 소문내며 다니는 스스로가 한심했으나 장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연모라.”

황제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가 분노해서 또 벼루 아니면 문진을 던질 거라 생각하고 바짝 긴장했다. 던지면 피해야지.

송 태감도 슬쩍 황제를 곁눈질하는 걸 보니 그도 황제가 뭔가를 던지리라 여기는 눈치였다.


“하하하하!”

하지만 황제는 뜻밖에도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지? 왜 저렇게 웃는 거지? 난 농담한 적도 없는데?’

의아해서 쳐다보자 황제가 뜻밖에도 의자 손잡이를 탕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는 역시 의리가 좋아.”

“예?”

나한테 그런 게 있었던가!


“그렇지. 그 정도 의리는 있어야지. 그래야 짐의 총신이지.”

총신이라니…… 우리가 무슨 그런 사이라고요.

속으로 올라오려는 말을 나를 꾹꾹 눌렀다. 간신이라 외치면서 벼루를 던지는 것보단 낫겠지.


‘애초에 린화가 화난 것도 폐하 때문이지만. 이런 이야기까지 했다가 진짜로 린화가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겠지.’

 

* * *

그날 저녁.

황제는 13황자를 불러 사주 때문에 잠시간 멈추었던 두 사람의 혼사를 계속 진행할 거란 이야기를 해주었다.


“조금 꺼림칙한 구석이 있지만 사주 전문가가 말하길, 모든 게 장점뿐인 궁합은 존재하지 않는다더라. 너희는 서로를 높여주는 사주라니 서로 양보하고 다독이며 지내면 될 거다.”

“아바마마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13황자는 공손해 보이는 모습으로 황제의 이야기를 들었다.


“요요화는 참으로 의리 있고 강직한 사람이지.”

하지만 황제가 배신의 화신과도 같은 스승을 강직하다고 말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멈추었던 정혼을 다시 진행하자!”

황제가 자기 다리를 한 번 크게 두드리며 외쳤다.

* * *

정혼이 슬금슬금 다시 진행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다른 절차는 거의 다 끝냈고, 사주단자를 교환하고 해석하는 건 이미 이전에 했기에 이제 혼인 때 주고받을 여러 가지 물건들만 정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신랑신부 본인이 할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어졌다.

그 덕택에 좀 여유롭게 지내기를 며칠간. 나는 월무궁에서 수업을 끝낸 뒤 내 의지로는 처음으로 황제의 서재를 찾아갔다.


“요 대인!”

송 태감은 마침 찻잔을 운반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 과할 정도로 반갑게 아는 척했다. 수시로 날 데리러 오다 보니 마주치면 반가운 지경에 이른 모양이다.


“무슨 일이신지요? 폐하께서 그새 요 대인을 불렀습니까?”

송 태감이 들고 있던 쟁반을 곁에 있는 젊은 태감에게 건네며 물었다.


“아니네. 폐하를 뵈러 왔네.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원래라면 말단 이국사가 황제를 이렇게 쉽게 배알하진 못한다. 나도 오긴 왔으나 거절당할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

그래도 몇 번 온 적이 있으니 들여보내 줄 수도 있다고 기대도 하긴 했지만.


“폐하께서 요 대인이 찾아오신 걸 알면 기뻐하실 겁니다.”

그러나 송 태감은 의미심장하게 웃고서 말하더니 다시 쟁반을 받아 들고서 문 앞으로 걸어가 외쳤다.


“폐하! 요 대인이 찾아왔습니다!”

‘무슨 의미로 한 말이지? 폐하가 내가 온 걸 알면 기뻐할 거라니?’

내 꺼림칙한 마음이 풀리기 전에 안쪽에서 먼저 “들어오라 해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시지요.”

송 태감은 나와 함께 들어가 황제의 책상에 가져온 찻잔을 내려놓았다.

황제는 송 태감이 앞에서 뭘 하든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네가 먼저 날 찾아오는 건 처음이구나.”

송 태감이 한쪽으로 물러나 서자 황제가 찻잔을 손안에서 굴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느냐?”

“실은…… 폐하. 청이 있어 왔습니다.”

“말해보거라.”

“황자 전하와 혼인하기 전까지 계속 이국사 자리에 머물게 허하여주시옵소서.”

송 태감이 짧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황제 역시 찻잔에서 손을 떼고서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째서지?”

황제가 웃으면서 물었다. 웃고는 있지만 목소리가 아까보다 살짝 낮아져 있었다.

아이고 괜히 왔나? 두려운 마음에 괜히 목이 말라왔다.

하지만 그냥 간단하게 결정하고서 온 건 아니었다. 황제에게 13황자와 혼인하겠다고 한 날부터 지금까지 닷새 동안 내내 고민하고 고민한 일이었다.


“신은…… 아시겠지만 폐하. 평생 과거 시험을 준비하며 살아왔습니다. 손에 힘이 들어가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손에 붓을 쥐었고, 글을 읽게 된 후부터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는 그냥 터놓고 표현했다.


“너무 아깝습니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제부터는 언제 벼루가 날아올지 모르니 긴장하고 잘 반응해야 한다. 황제는 필시 호통을 칠 것이다.


“그런가. 그러면 그래라.”

그러나 황제의 입에서 나온 건 말도 안 될 정도로 가벼운 허락이었다.


“예?”

황제는 평온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리하거라. 어차피 열셋째까지 혼사 순서가 돌아오려면 몇 해는 걸릴 테니.”

……왜 저렇게 쉽게 허락하는 거지?


“그리고 한 번씩 들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거라. 네가 오니 좋구나.”

“!”

 

* * *

집으로 돌아가 씻고 나니 내 시비인 월섬이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려 가져왔다.


“드세요, 도련님.”

그런데 젓가락을 쥐면서 보니, 상 위에 수길 어멈이 잘 만드는 찬거리가 몇 가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거 먹어도 돼?”

부모님은 내가 린화에게 가길 거부하고 13황자와는 계속 혼인하겠다고 한 뒤부터 날 좀 데면데면하게 대하신다. 피로하다고 문안 인사도 받지 않으시고.

그런데 어머니의 측근인 수길 어멈이 한 찬거리가 반찬으로 올라오다니?


“어멈이 소가주님 잘 먹이시라고 슬쩍 가져다주셨어요. 마님께서 화는 나셨지만, 소가주님이 밥은 잘 먹는지, 어디 아프진 않은지 계속 걱정하고 확인하신대요.”

“그래…… 고맙다고 전해줘.”

그런데 뭐 오늘 부모님끼리 나와 다시 말을 섞자고 타협이라도 보셨나? 식사를 하고 있는데 일각쯤 후에는 아버지가 찾아왔다.


“식사 중이냐.”

아버지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아직 관복 차림이신 걸 보니 어머니와 말을 맞추고서 내게 온 건 아닌 듯했다.


“두 분이서 요요화 무시하기 중인 거 아니었어요?”

장아찌를 먹으면서 슬쩍 비꼬자 아버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가 린화한테 가기 싫다고 해서 더 강요하지도 못하고. 네가 13황자와 혼인하겠다고 우겨서 황후마마가 보낸 태감도 거절했다. 다 네 뜻대로 되었는데 뭘 투정이냐.”

“제 속이 아버지만큼 콩알만 한가 봅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되었다. 그보다 너, 오늘 폐하께 이국사 자리에 계속 있고 싶다고 청하였느냐?”

나는 아버지가 분명 린화 일 아니면 13황자 일로 잔소리하러 온 줄 알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몇 시진 만에 이야기가 다 퍼졌나? 하지만 궁인들과 대신들은 한 공간에 있어도 서로 주고받는 소문이 다른데?


“늦은 오후에 이관서*가 폐하를 찾아가서 새로운 이국사는 자기들이 관례대로 추천해야 할지, 아니면 황후가 추천한 인사였으니 다시 지시를 기다려야 할지 물었다. 이에 폐하께서는 네가 다녀간 일을 말씀하시면서, 영리하고 일에 욕심도 있으니 이국사에 계속 두시리라 하셨지.”

“그런데요?”

여기까지는 별문제 없어 보이는데?


“그걸 안 몇몇 대신들이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하고 나선단다.”

“아니, 벌써요?”

오늘 황제한테 허락받은 일인데 몇 시진 만에?


“내일이면 수가 더 늘어나겠지.”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왜요?”

“그자들 말로는 법으로 여인이 들어갈 수 있는 관직과 없는 관직이 있는데, 네가 이국사 자리로 간 건 편법이란다.”

“아니, 저도 똑같이 시험 쳤는데요?!”

“양보해서 황녀의 이국사로 옮기는 거라면 모를까, 황자의 스승에 네가 머무는 건 법도에도 맞지 않는다는구나.”

 
==============
*이관서 : 관직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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