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77/159)
77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77/159)
77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2022.11.24.
똑같이 시험을 쳤는데 응시 자격이 안 된다고 편법이라니!
물론 편법이 맞긴 해서 반박도 못 하고 나는 괜히 황제 핑계를 댔다.
“폐하께선 허락해 주셨는데. 왜 자기들이 난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관직에 머물고 싶다면 황녀의 이국사는 어떠니?”
아버지가 눈살을 찡그리고서 물었다.
“안 돼요.”
이미 황녀들에게는 자기만의 스승이 있었고 그들과 신뢰 관계가 쌓여 있을 터였다. 거기에 내가 어깨를 밀고 들어가 보아야 뭘 가르치겠는가.
이국사가 없는 14황녀와 15황녀도 있지만, 14황녀는 7황자와 한 패라서 싫었고, 15황녀는 황후의 막내 따님이라 부담스럽다.
입맛이 사라져서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안 먹니?”
“더 안 들어가네요.”
“전하의 이국사 자리에 그렇게 머물고 싶으냐?”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고 있으려니 아버지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넌 원래 이국사 자리에 들어가기 싫어했잖니.”
“그랬지요.”
“그렇게 전하가 좋으냐?”
제자는 내 수업을 듣지도 않는다. 나도 가르침에 열정을 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국사 자리를 떠난다고 해서 더 좋은 위치로 옮길 수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궁전 안에, 제자의 곁에 있어야 도망갈 적당한 시기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이국사 일을 관두고 그의 앞에서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서 나에 대한 제자의 미움이 갑자기 사라지지도 않겠지.
적의를 충분히 누그러뜨리지 않고 달아난다면 제자가 쫓아와서 복수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제자 옆에서 열심히 아부하고 기분을 맞추어주다가 달아날 기회를 잡아야 했다.
그러려면 이국사란 신분으로 제자의 곁에 있는 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으니 마음의 준비는 해두거라.”
* * *
요즘 궁인들 사이에서 최고로 관심을 끄는 건 평생 남장하고 살아왔다는 요씨 가문의 적녀 이야기였다.
황제의 사주 이야기를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다들 요요화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요요화가 이국사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아프단 핑계로 방에 틀어박힌 린화의 귀에도 자연스레 들어왔다.
“참으로 너무하지요. 우리 소가주님이 뭐 변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이국사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니요. 남녀가 유별하다지만 이국사께선 어차피 13황자 전하와 정혼이 오가고 있으니 상관 없잖아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사가 궁녀인 월채는 내내 소가주로 모시던 요요화가 관직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하자 좀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툴툴거리면서 보니, 친동생인 린화는 화내는 게 아니라 웃고 있었다.
“소주? 지금 웃을 때가 아니에요.”
월채의 지적에 린화는 옆의 탁자에 팔을 괴고 비스듬하게 누우며 말했다.
“알아. 하지만 좀 고소하잖아.”
“고소하다고요?”
“요요화는 여인이지만 남장했단 이유로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았지. 난 요요화보다 욕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남장하지 않아서 할 수 없는 게 많았어.”
린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솔직히 좀 고소하구나. 이제 요요화도 내 기분을 좀 알겠지.”
* * *
소문이 돈 다음 날은 입궐하는 날이 아니었다.
나는 하루 동안 소문의 중심에서 떠나서 지내다가, 입궐하는 날이 되자마자 제자를 찾아가 은근슬쩍 떠보았다.
“전하. 전하. 전하는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국사로 오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괜히 책을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제자의 눈치를 살폈다.
“서운하겠지요.”
웬일로 제자는 내가 원하는 대답을 얼추 비슷하게 해주었다.
“그렇지요?”
나는 신이 나 되묻고서 제자에게 부탁했다.
“그러면 전하. 전하도 제가 전하의 이국사 자리에 계속 머물 수 있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아주 좋은 스승이라고 한 말씀만 해주세요. 예?”
제자는 먹을 갈다 말고서 나를 힐긋 쳐다보았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서 최대한 처량한 표정을 지어냈다.
“글쎄요.”
하지만 제자는 내 가엾은 표정에 흔들리지 않았다.
“안 도와주실 건가요?”
그래도 한 번 더 물어보자, 제자는 막을 내려놓고 손을 닦으며 대답했다.
“예.”
대답 한번 짧기도 하구나.
“이유가…….”
“필요한가요?”
“들으면 좋지요…….”
제자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유가 있긴 한 듯한데 말해주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럼 조금만 단서라도요.”
그래도 계속 간절하게 부탁하자 제자는 서책으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190쪽을 할 차례이던가요?”
* * *
“거 그냥 도와주겠다고 말이라도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13황자와 요화와 수업하는 동안 곁방에서 차를 마셨던 청양은 요요화가 떠나자 서재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화려는 대답 없이 오늘 하루 내내 설명을 들은 서책을 접어 다른 서책들 위에 올려놓았다.
“스승님은 탈출구를 찾는 거다.”
“예?”
대답하지 않을 듯하다가 화려가 툭 던진 말에, 청양은 시간을 확인하다 말고서 돌아보았다.
“탈출구라니요? 무슨 탈출구요?”
화려는 더 설명하는 대신 다른 서책을 꺼내 펼쳤다.
* * *
이런 와중에 요요화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로 결심한 건 전혀 뜻밖의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나서서 요요화를 그냥 이국사에 두자는 의견을 만들어 주세요.”
황후가 청하자 그녀의 아버지인 격일사가 맞은편에서 차를 마시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네.”
“글쎄. 난 그 아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격일사는 일전에 족자 사건 때 황제에게서 풋내기인 요요화와 비교당한 일을 떠올렸다.
황제는 대놓고 ‘갓 관직에 오른 이국사만 못하다’면서 그를 비난했다. 그 일로 죽이고 말 거란 원한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이런 일에 나설 생각은 없었다.
“자기 아비가 나서겠지.”
격일사는 시큰둥하게 말하고서 황후의 상궁에게 자신의 빈 찻잔을 가리켰다.
상궁이 새로 끓인 차를 가져와 그의 찻잔에 따라주었다.
“요 가주는 나서지 못할 겁니다. 아시잖아요. 폐하께서 사주 핑계를 대주셨다지만 요씨 가문을 향한 의혹의 시선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그러니 아버지께 나서 달라고 청하는 겁니다.”
그래도 황후가 재차 권하자 격일사는 호기심을 보였다.
“내가 그 아이를 도와야 할 이유가 있을까?”
황후는 아버지가 잡은 찻잔 위로 모락모락 올라오는 연기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도와주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 하지만 제 딸, 아버지 손녀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비슷한 선례를 만들어 두는 게 좋아요.”
“비슷한 선례?”
“예. 이국사가 여인이지만 머리가 좋고 능력이 좋아서 이국사 자리에 남는 예외가 생긴다면, 그걸 훗날 우리 황녀들에게 적용할 수도 있겠지요.”
“!”
“어차피 이국사는 힘을 가진 관직도 아니고 크게 성장할 수도 없는 관직이지요. 몇 해 그 자리에 머물고 나면 황자비가 될 테니 자연스럽게 관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몇 해뿐이라면 그깟 이국사 자리, 미래를 위해 그냥 내어줄 수도 있지요.”
“네 말은 이해하겠다.”
격일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딸의 말을 다 믿어도 될지 헷갈렸다.
“생각을 좀 해보마.”
* * *
난 어째서 제자가 내가 이국사 자리에 있길 바란다고 생각했을까?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다음에 수업할 서책을 미리 살피며 정리하다가 붓을 내려놓았다.
‘뭐 제자랑 나랑 오사바사한 사이는 아니긴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분이 좀 떨떠름했다. 정혼을 한다 해도 혼인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제자도 날 옆에 붙들어 두고 싶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혹시 나에 대한 제자의 적의는 이미 쑥 내려가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기나?
“요화야.”
멍하게 있자니 문 너머에서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또 무슨 일이시지? 요즘 자주 말 거시네. 설마 이 와중에 린화 이야기를 하러 오신 건 아니겠지.
방 안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맞은편에 앉더니 내 표정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격일사가 네가 이국사 자리에 계속 머물 수 있게 해달라 폐하께 청하였다. 황후마마께서 널 염려하고 계시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린화가 후궁을 그만두기로 했단 이야기를 꺼내더라도 지금처럼 놀랍진 않을 것이다.
“예?”
나는 당황해서 소리를 크게 냈다.
“황후랑 황후 아버지가 왜 제 편을 들어요?”
황후가 절대로 좋은 뜻으로 나설 리가 없는데?
“황후마마가 널 아끼신다던대.”
“그럴 리가요.”
자기 성질난다고 내 비밀을 먼저 폭로하려던 건 린화보다 황후가 먼저인데.
“황후마마는 절 전혀 아끼지 않아요, 아버지.”
내가 단호하게 거부했으나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아니요. 황후마마가 제 편을 들었단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이국사를 그만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는데요.”
아버지는 몇 마디 이야기를 더하다가 나갔지만,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업무를 계속할 수 없었다.
‘무슨 꿍꿍이인 거지? 내가 계속 이국사로 있어야지 나중에 13황자랑 혼인했을 때 그걸로 꼬투리를 잡을 수 있어서 그러나? 아니야. 자기가 나서서 날 두둔했는데 나중에 그걸로 어떻게 꼬투리를 잡겠어? 그러면? 그러면 이유가 대체 뭐지?’
* * *
황후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황후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밤새 고민한 다음 날. 나는 찝찝한 마음으로 월무궁으로 찾아갔다. 제자와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땡땡이를 칠 수도 없었다.
“요 대인!”
그런데 이 와중에 황제의 송 태감이 늘 기다리던 그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서 있었다.
“송 공공? 무슨 일이시오?”
왜 황제까지 이 와중에! 떨떠름한 마음을 숨기고 다가가자 송 태감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요 대인을 찾으십니다. 얼른 가시지요.”
월무궁에 가는 길을 좀 바꿔야 하나……. 하지만 다른 길은 완전히 돌아 돌아가는 길인데.
“요즘 여러 가지로 사건이 많아서 속이 복잡하시지요?”
하도 여러 번 본 탓인지 송 태감은 걸어가는 도중 이젠 내게 말도 걸었다.
“그래도 견뎌야지. 견디다 보면 좋아지겠지.”
나는 복잡한 속내를 누르고 세상에서 제일 긍정적인 사람인 척 대답했다.
“일이 잘 풀릴 겁니다.”
송 태감은 내게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덕담을 해주었다.
마침내 황제의 서재에 도착했다.
‘무슨 일로 부른 건진 모르겠지만 머리 장신구나 벼루를 주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심호흡을 하고서 표정을 산뜻하게 만든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서재에 불려온 관리가 나만이 아니었다. 관복 차림의 관리들이 다섯 명 정도 있었다.
‘뭐지?’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의아하지만 그들을 못 본 척하고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자 황제가 엄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상 옆에 선 사람에게 눈짓했다.
‘이관서?’
책상 옆에 선 사람은 관인청의 이관서였다. 고위 관직 인사에 대한 추천권과 하위 관직 인사에 대한 발령권을 가진 사람.
이관서는 황제에게 눈짓을 받자 공손하게 한 번 허리를 숙이더니 나와 관리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모두 설명을 듣지 못하고 불려 와서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를 거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공평한 환경에 모두를 두길 바라셨다.”
무슨 말이야? 공평한 환경?
이관서가 손짓하자 황제의 태감 여섯 명이 각기 서책 열 권씩을 들고 와 나와 관리들의 앞에 놓아두고 물러났다.
“이것들은 황자님들이 기본적으로 수업 받는 서책들이다. 그리고 저쪽의 요요화는 기존 13황자 전하의 이국사이고, 이쪽의 다섯 명은 원래 내가 전하의 이국사로 추천했던 인사들이지.”
나와 관리 다섯 명은 무의식중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폐하께서는 이번 이국사 자리를 두고 이런저런 말이 나오고 있으니, 가장 공정한 방식으로 결정을 내리기로 하셨다. 바로 황자 전하를 수업할 서책으로 시험을 치르는 것이지.”
이관서가 느릿하게 거기까지 말했을 즈음, 못 참겠는지 황제가 끼어들었다.
“경들이 익명으로 낸 답안지는 요요화가 이국사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들에게 줄 터이고, 그 대신들이 직접 13황자의 이국사를 정하게 할 거다. 시험은 지금 짐의 눈앞에서 치르라.”
‘뭐라고? 갑자기 지금 시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