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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행복한 게 아니란다 (84/159)


84화. 행복한 게 아니란다
2022.12.19.



 
9황녀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뒤에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 표정도 험악하겠지. 초조함이 밀려오면서 손바닥이 간지러워졌다.


-이제 스승님은 여인이고 아홉째 누이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아홉째 누이는 스승님과 선안이 가까이 지내는 걸 싫어할 겁니다.

제자가 내게 한 말이 머릿속을 미친 말처럼 뛰어다녔다. 젠장. 제자가 저 말을 해버리고 나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자꾸 저 말이 생각나잖아?

제자는 이 자리에 없을 때도 존재감이 또렷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제자의 불성실한 태도와 말투가 떠오르면서 ‘이거다!’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제자. 제자의 특기인 ‘무조건 네 탓’을 써보자.


“할 말이 없나 보군, 이국사.”

뒤에서 9황녀가 마지막 통첩을 날리자마자 나는 공손하게 대꾸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9황녀 전하. 전하께서 너무 성급하셨습니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순하고 부드럽게 내려 목에 힘을 뺐다.


“무슨 소리지?”

그렇게 했는데도 9황녀가 차갑게 되물었다.


“결과적으로 린화가 한 행동과 9황녀 전하께서 한 행동엔 차이가 없으시거든요.”

“뭐야?”

“물론 의도는 전혀 다르십니다. 소문대로라면 린화는 고의로 전하께 제 얘기를 한 거고, 전하는 어떤 고의 없이 들은 이야기를 확인하셨을 뿐이니까요.”

나무 바닥을 탕 구르는 소리가 나더니 9황녀가 가까워지는 소리가 났다.


“돌아서!”

천천히 돌아서자 9황녀가 내게서 두 걸음 떨어진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왜 딴소리를 하는 거지?”

9황녀는 도끼눈을 뜨고서 호통쳤다.


“난 내가 선안을 이해해야 할지, 화를 내도 좋을지 자네에게 물어보았네, 이국사!”

“아무렴요. 제대로 들었습니다, 전하. 하지만 전하. 선안은 제가 여인이란 걸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전하가 보낸 서신을 읽고 절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

도끼눈은 여전히 내려오지 않았으나 9황녀의 눈동자는 조금 흔들렸다.


“자넬 의심하다니?”

“선안은 제가 여인인 줄 조금도 몰랐으니까요. 그러다가 전하가 쓴 서신을 보고 절 의심했습니다. 전하는 그저 확인하고 싶으셨겠지만, 전하가 쓴 서신으로 인해 저는 궐 밖에서도 한 차례 고초를 겪었습니다.”

물론 아니다. 선안은 그냥 혼자 와서 물었지 사람들 앞에서 날 세워놓고 여인이냐고 추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걸 숨기고서 지친 표정으로 바라보자 9황녀가 시선을 피하더니 바닥을 이리저리 내려다보았다. 난처해 보였다.


“선안은 그런 이야기가 없었는데.”

9황녀가 중얼거렸다. 답장하진 않았지만 선안이 9황녀에게 보낸 서신을 전부 다 읽고는 있는 모양이다.


“선안은 다 자기 잘못이라고 미안하다고만 했네.”

“선안은 저와 달리 뺀질거리지도 않고 융통성도 없지요. 좀 고지식한 구석이 있습니다.”

너무 흉보는 티가 나지 않도록 슬그머니 말하자, 9황녀가 팔짱을 끼고서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9황녀의 표정 변화를 샅샅이 살폈다. 문득 9황녀가 날 부른 건 화를 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선안을 용서하고 싶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황녀 전하. 황녀 전하께서도 전하의 커다란 비밀을 알게 된 친구가, 자기 남편에게 전하의 비밀을 밝히길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9황녀의 반응을 샅샅이 살피면서 나는 슬그머니 그녀의 질문에 돌려서 대답했다.


“그래서. 선안이 잘했단 게냐?”

“제 목숨이 달린 일이니 선안은 입을 열 수가 없었을 겁니다, 전하. 게다가 이건 9황녀 전하와 관련이 없는 일이니까요. 비밀을 지키는 게 9황녀 전하에게 피해가 될 일이라면 전하께 필시 이야기했을 거예요.”

9황녀의 양 눈썹이 삐죽 위로 올라갔다.


“왜 내가 관련이 없단 거지? 난 바보처럼 널 두둔했는데!”

“선안은 아직 황녀 전하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으니, 황녀 전하가 얼마나 의리 있는 분인지 알 기회를 못 겪었지요. 저는 7황자 전하께 불려 갔다가 알게 되었고요. 전하가 절 위해 나서주실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

“전하께서 나타나서 절 구해주시려고 했지요.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전 그날 전하께 인간적으로 완전히 반할 뻔했어요.”

9황녀가 귀가 불그스름해지더니 화난 표정으로 창문을 쳐다보았다.


“아부만 잘하는군!”

“아니요, 정말 멋졌습니다. 7황자 전하와 14황녀 전하께선 절 공격하는데, 9황녀 전하만 절 보호해주셨으니까요.”

나는 최대한 진실하게 들리도록 목소리를 냈다.


“제가 사내가 아닌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제가 사내라면 전하와 혼인하고 싶었을 겁니다. 전하가 얼마나 멋진 분인지 아니까 제 절친한 친구가 전하와 백년가약을 맺어서 오해가 없길 바라는 거고요.”

9황녀는 나비처럼 팔랑팔랑 의자로 가더니 털썩 앉으면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는 그녀가 혹시 나와 선안 사이를 오해하지 않도록 얼른 덧붙였다.


“나중에 전하와 선안이 혼인하고 제가 13황자 전하와 혼인한다면 넷이서 같이 놀 수도 있겠네요.”

13황자가 9황녀나 선안과 놀 거라 여겨지지도 않고 9황녀가 13황자랑 놀고 싶어할 리도 없지만 말이야 뭐든 못 할까.

9황녀는 팔을 의자 손잡이에 두고 몸을 기대어 앉아 혼자 손을 꼼지락거렸다. 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리기를 어느 정도.


“좋다.”

9황녀가 상체를 바로 세우더니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나는 생각을 좀 해보아야겠으니 이국사는 그만 돌아가게.”

 

 
흘겨보기는 해도 아까보다는 화가 많이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9황녀는 호탕하고 뒤끝이 없는 성품이니 여기까지 풀리면 나머지는 알아서 풀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안도했지만 나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허리를 약간 숙여 인사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휴. 사는 거 쉽지 않구먼.’

 

* * *

다음날. 수업이 없는 날을 즐기고 싶었지만, 또 어머니가 무언가 ‘집안 꾸리는 훈련’을 시킬까 봐 나는 시비 월섬의 방에 숨었다.


“소가주님…… 그렇게 싫으세요?”

월섬은 말린 과일을 조금씩 뜯어 먹으면서 내게 물었다.


“당연하지.”

내가 손을 내밀자 월섬이 내게 말린 과일 하나를 얹어주었다.


“하지만 어차피 배우긴 하셔야 하잖아요. 황자비가 되셔도 아기님이 태어나면 궐 밖으로 나오셔야 하니까요.”

아기님이 태어나기 전에 나는 도망갈 거거든. 어쩌면 혼인하기 전에 달아날 수도 있지. 아니, 어쩌면…….

젠장. 모르겠다. 달아나는 건 확실한데 사실 지금은 달아날 시기가 애매해지긴 했다.

전에는 제자의 마음이 풀리면 달아날 계획이었는데. 여인인 게 밝혀지고 정혼녀가 되면 어떻게 달아나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일단 혼인을 한 다음 제자에게 막 집착하는 모습을 보일까? 그러면 제자가 질색해서 나와 혼인을 파하려 들까?


“도련님.”

생각을 끝맺기도 전에 밖에서 사내종인 월강이 불렀다.


“아 됐어. 내가 나가볼게.”

일어나려는 월섬에게 손짓하고서 나는 슬그머니 문을 반만 열었다.


“거기 계셨습니까?”

월강이 얼른 달려와 말했다.


“선안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선안이?”

어제 9황녀를 만나서 선안 이야기를 했지. 그 결과가 나온 걸까? 나는 얼른 문밖으로 나갔다.

앞뜰로 가자 선안이 서성거리며 서 있었다. 옷 색도 밝고 표정도 밝고 평소보다 분위기도 산뜻한 걸 보니 나쁜 소식으로 온 건 아닌 듯했다.


“요화!”

그러다가 내가 나타나자 선안은 두 팔을 벌리고 환한 목소리로 외쳤다. 역시. 목소리를 들어보니 확신이 왔다. 일이 잘 풀린 모양이다.


“이 이쁜 자식!”

선안은 신이 나서 달려와 내 목을 팔로 조이려다가 시비들이 눈을 왕밤만 하게 뜨고 쳐다보자 엉거주춤 팔을 내렸다.


“아니, 왜 갑자기 다들 자네가 연약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구는 거야?”

선안은 움츠러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리로 오게.”

나는 선안을 데리고 반쯤 벽이 트인 방으로 데려갔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추운 공간이지만 그래도 마당에서 얘기하는 것보단 낫겠지.

평소라면 그냥 내 방에 데려갔을 터이지만, 제자가 ‘선안과 내가 가깝게 지내면 9황녀가 싫어할 것’이라고 경고해서인가.

선안을 내 방에 들이기가 조금 꺼려졌다.


“무슨 일인데?”

내가 묻자마자 선안은 환하게 웃더니 발랄하게 설명했다.


“9황녀 전하가 보낸 사람이 다녀갔네. 전하가 내 상황을 이해해준단 서신을 보내셨지. 자네와 어제 이야기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나도 많이 난처했을 거라고 생각하신대!”

역시 9황녀는 대범하구나. 바로 하루 만에 결정 내리고 서신을 보내네.


“고맙네. 자네 덕이야.”

선안이 평소보다 촉촉해진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난 정말 좋은 친구를 두었어.”

그 모습이 심히 부담스러워 나는 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됐으니 그 눈알 좀 치워.”

“황녀 전하는 내 눈이 국보라고-.”

“아니니 치우게!”

“너무하는군.”

“고마우면 자네 조부님한테 내 칭찬 좀 많이 해줘.”

그래야 은신처를 빨리빨리 챙겨주시지.

* * *



“9황녀 전하의 심기가 좀 편안해지신 모양입니다. 며칠 내내 황후마마께 문안갈 때를 제외하면 방에 틀어박혀 지내시더니, 오늘 오전에는 대화원도 산책하시고 황제 폐하께도 찾아가시고 했다더군요.”

운귀의 보고를 들으며 13황자가 책장을 한 장 넘겼다.


“아까는 15황녀 전하를 데리고 말을 보러 가셨다 합니다. 말 타는 법을 가르칠 거라고요.”

13황자는 다시 책장을 한 장 넘겼다.

은귀는 더 보고할 게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아쉽구나.”

기다려도 더 이어지는 말이 없자 13황자는 책을 덮고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아쉽다니요?”

운귀는 의아해서 13황자를 쳐다보았다.


“9황녀께서 요 이국사께 화가 풀리셨으니 다행한 일이 아닌지요? 적은 적을수록 좋으니까요.”

“나는 이번 일로 스승님이 친구를 잃기를 바랐다. 한데 스승님은 친구를 잃기는커녕 아홉째 누이의 우정까지 얻었구나.”

13황자는 태연자약하게 말하고서 수업 시간에 사용하는 서책을 꺼냈다.

운귀는 뒤늦게 퍼뜩 놀랐다.


“예?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스승이 친구를 잃기를 바라다니. 너무 고약한 심보가 아닌가.


“난 스승님을 독점하고 싶다.”

제자는 치졸한 말을 청량하게 내뱉었다.

그는 요요화가 집요하게 하루 종일 읽으라 요구한 190쪽 군사부일체 항목을 펼쳤다. 지겹긴 하지만 그는 이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운귀는 주군의 치졸한 말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자신이 무얼 잘못 들었나 싶어서 조심스레 되물었다.


“독점이요……?”

“그래.”

“하지만 전하. 그러면 요 이국사가 행복하지 않을 텐데요.”

화려는 서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고서 운귀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원하는 건 스승님을 독차지하는 거지. 스승님이 행복한 게 아니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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