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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질투와 화해 (86/159)


86화. 질투와 화해
2022.12.26.



“이쪽입니다, 요 공자!”

멀지 않은 곳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리번거리다가 소리가 난 쪽을 보니, 난균이 꼭 자기 같은 소나무 앞에 서 있었다.


“좀 늦었지요? 미안합니다. 수업이 덜 끝나서요.”

나는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제가 일찍 온 걸요. 도중에 길을 잃어서 오히려 약속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제때 만나 다행입니다.”

난균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착해 착해. 다시 생각해도 아깝단 말이지. 난균이 린화와 혼인했으면 내가 여인인 게 밝혀질 리도 없고 린화도 울고불고 할 일 없었을 텐데.


“저…… 그런데 요 공자.”

그런데 난균이 갑자기 난처한 기색으로 나를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난데없이 돈을 빌려달란 건 아닐 테고?


“오늘 돌려주기로 한 패 말입니다.”

“예.”

“제게 없습니다.”

저절로 눈이 커다래졌다.


“예?”

오늘 내가 난균을 궁궐에서 만나기로 한 건 마침 나는 오늘 수업이 있었고, 난균은 자기 부친 심부름으로 여기 올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약속을 잡을 때만 해도 난균은 잘됐다며 패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패가 없다니?


“어디 갔는데요?”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길을 잠시 잃었을 때 대화원에서 요 귀인을 만났습니다.”

“린화를요?”

“예. 제가 패를 떨어뜨린 걸 귀인께서 주워 주셨지요. 패는 귀인께서 가져가셨습니다.”

원래 만나야 할 인연이라서 그런가. 어째 이 넓고 넓은 황궁에서 그렇게 만났지? 난균의 이야기를 듣는데 괜히 등골이 스산해졌다.

그들의 인연에 놀라서는 아니었다. 난균이 우리 가문을 패를 아무 데나 막 떨어뜨리고 다녔다는 데 놀라서였다.


“그러면 제가 린화에게 가야겠군요.”

“예. 패를 돌려달라고 청하려니 혼담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을 듯해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난균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나는 대놓고 한숨을 쉬지 않으려 호흡을 골랐다.

아이고. 제자한테 ‘린화를 보러 갈 거다’고 말은 했지만 아직 마음을 확실하게 다잡은 건 아닌데. 결국 린화한테 갈 일이 생기고야 마는구나.


“혹시 내가 패를 가져왔어야 하는 걸까요?”

난균이 난처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그의 말에 당황한 게 눈에 보이나 보다.


“에이, 아닙니다. 괜찮아요.”

차마 자매간에 크게 싸운 뒤라 걔 얼굴 보기가 편하지 않다고 말은 못 하고 나는 호탕한 척 손을 내저었다.

그때 난균이 “어?” 하고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내 손을 뒤에서 누군가 가볍게 붙들었다.


“!”

놀라 휙 돌아보자마자 제자가 코앞에 있었다.


 


“전하!”

당황해서 부르자 제자가 내 손을 놓아주며 물었다.


“여기서 뭘 하십니까 스승님?”

제자의 눈동자가 난균에게 닿는가 싶더니 그가 덧붙였다.


“다른 사내와요.”

내가 여인이란 걸 모르는 난균은 혼자 맑은 얼굴로 물었다.


“황자님이십니까?”

제자가 대답하지 않는데도 난균은 공손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난가 균이라 합니다, 전하. 요 공자의 새로운 친구입니다.”

그리 좋지 못한 방식으로.


“난균?”

제자가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이번엔 나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친구?”

그가 뒤에 ‘매부가 아니라?’ 하고 덧붙일 것만 같다.


“물건을 전달받을 게 있어서요.”

나는 얼른 해명하고서 그를 향해 온 힘을 다해 활짝 웃었다. 이거 봐라. 예쁜 미소. 예쁜 미소.


“요 공자는 웃는 얼굴이 정말로 아름답네요.”

하지만 제자가 반응하기 전. 눈치 없는 난균이 먼저 말하는 바람에 내 의도가 틀어졌다.

제자의 한쪽 눈썹이 불량하게 위로 올라갔다.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그의 기세가 험악해졌다.


“요 공자는 정말 어여쁜 분 같습니다.”

난균은 다른 의미로 무적이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눈치가 없었다.


“내 정혼자가 너무 인기가 좋군.”

그리고 반대로 내 제자는 눈치가 좋다 못해 칼날 같았다.

제자가 대놓고 하는 말에 난균이 “예?” 하고 되물었다. 그가 미소를 유지한 채 눈만 깜빡이며 나와 제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기에 황자의 정혼자가 어디에 있나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요 공자가 아니라 요 낭자라고 해야지.”

제자가 성격을 포장할 때 쓰는 금박 포장지처럼 웃으면서 알려주었다.


“낭자요?”

난균은 멍하게 되묻다가 뒤늦게 눈이 커다래져서 나를 쳐다보았다.


“낭자라고요?! 남자가 아니고요?!”

머쓱하게 웃고 있자니 제자가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기고서 온화한 척 말했다.


“난 공자. 스승님은 내 정혼자시다.”

난균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떨렸다.


“하지만? 복장이? 사내인데요?”

제자는 말없이 웃는 얼굴로 난균을 쳐다보기만 했다.


“……실례했습니다.”

얼마나 미소를 무기처럼 사용하던지, 결국 눈치 없는 난균도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가 멀어지자마자 나는 다시 예쁜 미소를 띠고서 제자를 최대한 초롱초롱하게 올려다보았다.


“스승님.”

제자는 그에 화답하듯 꽃보다도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른 사내와 손을 잡으려 하셨는지요?”

“아니요!”

말도 안 되는 누명에 나는 펄쩍 뛰었다.


“손을 뻗고 계시던데요?”

“손을 저은 겁니다!”

“스승님은 손이 고우시지요. 굳이 손을 그렇게 흔들면서 잘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요?”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거나! 나는 또 펄쩍 뛰었다.


“그러는 전하는 왜 얼굴을 들고 다니시는데요? 전하의 얼굴이야말로 곱디고운데요!”

일부러 비꼬느라 한 말이었으나 제자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제자 얼굴이 고운 걸 알면 소중하게 여기고 귀하게 대해 주셔야지요.”

아무래도 이놈은 내게 시비를 걸기 위해 굶주린 호랑이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분명하다.


“궁궐에 스승님이 여인이란 걸 아는 이들이 수두룩해졌습니다.”

“난균은 몰랐어요, 전하.”

“그래 보이더군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지요. 그 사람들은 스승님이 다른 사내와 친밀하게 둘이서만 이야기하면 오해를 할지도 모릅니다.”

그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기는 했다.

나는 사내로 살아와서 다른 사내들을 대할 때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여인인 걸 떠올릴 테니, 내가 사내들과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쳐다볼지도 몰랐다.


“아무렴요. 하지만 전하가 제 곁에 있으니 다들 이상한 오해는 안 했을 겁니다.”

억울한 속내를 감추고서 나는 웃으면서 제자에게 아부했다.


“전하는 언제나 제 곁에 바로바로 오시네요. 우리가 연이 있긴 한가 봅니다. 사주 보던 사람도 전하와 제 사주가…….”

아. 좀 꺼림칙했던가.


“아주 좋다고 했지요!”

그래도 모른 척 무작정 우겼다.

제자는 턱을 조금 들어올렸으나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세상 모든 미인들을 다 합쳐 두어도 이 제자만하지 않습니다.”

“뭐라구요?”

“…….”

“그럼요. 전하는 별이고 달이시지요.”

제자는 나를 별 옆에 달라붙으려는 말벌 보듯 하며 차갑게 말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니 이 제자와 혼인하게 된 데 만족하시고, 다른 사내들까지 노리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제가 언제 노렸다고…….”

“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그쪽엔 관심도 없는데요?”

“역시 사내들에겐 관심이 있는 거군요.”

이놈이 회귀하는 동안에 말싸움만 하고 지냈나? 사람 말을 어찌 이렇게 꼬아서 이상하게 몰아가지?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제자가 조그만 물건을 꺼내더니 종이 껍질을 벗겨 내 입에 넣어주었다. 단맛이 강하게 올라왔다.


“에이 퉤!”

뭔진 모르겠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뱉었다.

저놈은 날 독살한 경력이 있었다. 제자가 주는 건 쉽게 받아먹어선 안 됐다.

뱉고 나서야 그게 당과 조각이란 걸 알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뒤였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한기를 감지하다가 나는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설마 주워 먹으라 하진 않겠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젠장,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고 제자가 먹을 걸 주니까 진짜로 무서웠다고!

하지만 제자는 내가 회귀한 걸 몰랐다. 제자의 입장에서는 감히 말단 이국사가 자기가 준 당과를 눈앞에서 퉤 뱉어버린 상황이었다. 얼마나 괘씸할까.


“제가, 제가 이가 썩었습니다 전하.”

“…….”

“단 걸 많이 먹어서 이가 상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단 걸 먹으면 안 됩니다. 정말이에요.”

그래도 일단 마구 우겨대고 있자니 옅게 한숨 내쉬는 소리가 났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제자가 차갑게 말했다.


“일어나세요. 그리고 앞으론 제 앞에서 그렇게 수시로 무릎 꿇지 마십시오. 스승님은 제 스승님이시고 훗날엔 저와 혼인할 분입니다.”

아니지. 넌 황제가 되어서 날 독살할 사람이야.

* * *

제자와 헤어진 뒤. 나는 집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린화에게 갈지 망설이다가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처럼 린화의 선한궁으로 갔다.

내가 운화원으로 들어서자 린화의 궁인들은 동시에 동작을 뚝 멈추었다.


“소가주님!”

린화가 사가에서 데려간 궁녀 월채만이 얼른 내게로 다가왔다.


“소주를 보러 오신 건가요?”

월채는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월채는 얼른 들어오라고 안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발랄하게 말했다.


“소주께서 소가주님을 보시면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그…… 일 이후로 내내 시무룩해 하셨거든요.”

침소 안으로 들어가자 장막을 쳐둔 침상 옆 의자에 린화가 앉아서 수를 두고 있었다.


“요요화.”

린화는 날 보자마자 수틀을 놓고 벌떡 일어났다. 린화의 표정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린화는 그다음 말을 먼저 잇지 못했다.


“오늘 난균한테 패를 돌려 받기로 했어.”

결국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서 탁자 앞에 놓인 의자로 걸어갔다.


“패?”

“우리 가문 패. 심부름꾼을 통해서 보냈었거든.”

“아. 그거.”

란화가 눈짓하자 월채가 어디선가 패를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난균이랑 만났다며?”

나는 린화에게 ‘난균 실물을 보니 어떠냐. 후회되지?’라고 외치고 싶은 걸 꾹 누르고서 의젓한 척 물었다.


“어.”

린화는 내 맞은편으로 와서 앉았다.

나는 힐긋 린화의 표정을 살폈다. 린화의 얼굴에 후회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이러면 안 되겠지만 ‘거 봐라!’ 하는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

내가 패를 챙기는 걸 보다가 린화가 중얼거렸다.

월채가 내 앞에 차를 놓고 나갔다.

린화는 주저하다가 털어놓았다.


“9황녀가 소문을 다 낼 줄은 몰랐어.”

미안한 마음이 있긴 있었나 보네.


“9황녀가 낸 소문은 아니야.”

하지만 내가 반박하자 린화는 바로 발끈해서 외쳤다.


“하지만 정말로 난 9황녀한테만 얘기했어! 진짜야!”

그 억울한 표정을 보는데, 문득 9황녀의 처소 궁녀가 떠올랐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지.

난 린화가 소문을 죄다 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린화의 반응이나 9황녀 처소의 그 궁녀를 떠올려보니, 어쩌면 9황녀 처소에서 소문이 퍼졌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들 그렇게 소문을 내는 거지. 너만 알라면서 한 사람한테 말하면, 그 사람도 다른 사람한테 너만 알라면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

린화는 입술을 깨물고서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월채가 가져다 준 차는 청정차였다. 집에서 늘 마시던 차를 여기에서 마시니 기분이 이상했다.


“미안하면 앞으로는 성질 좀 그만 부려.”

무뚝뚝하게 말하자 린화는 입술 양 끝을 내렸지만 한 짓이 있어서인지 고개는 끄덕였다.


“알았어.”

“네가 날 싫어서 한 짓이지만 부모님한테도 같이 피해가 왔어. 넌 머리가 좋은 애니까 알겠지. 네가 날 공격하면 부모님도 피해를 입어. 내가 널 괄시하면 결국 내게도 좋지 않지. 그래서 널 찾아온 거야. 아직 나 화 안 풀렸어.”

린화는 시무룩한 얼굴로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언니한테 화가 났어. 폐하가 언니를 연모한단 것 때문에.”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하지만 내게 말해줄 수 있었잖아.”

“나도 의심한 지 얼마 안 됐어. 그리고 연모하는 정도는 아니야.”

황제가 내게 보이는 감정은 호감 섞인 호기심에 가까워 보였지. 그게 연모로 바뀌지 않도록 나는 최대한 황제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린화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찻잔을 움켜잡고서 한참 침묵했다.


“난 그만 가볼게.”

아직 시간이 필요한 듯해서 나는 먼저 일어났다. 그러자 린화가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화는 나지만 내가 후궁에서 나갈 순 없어. 그러니까 여기서 잘해서 치고 올라갈 거야.”

“그래. 잘해봐.”

나는 손을 흔들고서 문가로 걸어갔다.


“언니.”

하지만 린화가 붙잡는 바람에 도중에 멈춰서야 했다. 왜 그러나 싶어 돌아보자 린화가 소매를 붙잡고 부탁했다.


“언니가 도와줘.”

“내가 무슨 수로?”

“폐하가 언니를 좋아하잖아.”

“아니라니까?”

“폐하한테…… 나한테 자주 찾아오라고 말해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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