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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보문 공주의 흑심 (87/159)


87화. 보문 공주의 흑심
2022.12.29.



 
아니 얘가 미쳤나?


“내가 무슨 수로?”

얼결에 린화의 이마에 손을 얹어볼 뻔했다.


“열나니?”

주저하다가 실제로 얹어보고 말았다.

린화는 내 손을 찰싹 두드려 치우게 했다.


“아 좀!”

“네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잖아.”

나는 얼얼한 손등을 문질렀다. 가볍게 친 거 같은데 손이 맵기도 하지.


“폐하는 널 좋아하잖아!”

린화는 목소리를 낮추어서 항의했다.

나는 문가로 바쁘게 걸어갔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모르겠네. 도망가는 게 수겠어.


“폐하는 날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냥 호기심을 좀 보이는 정도이지.”

린화는 반박하고 싶은지 곧장 입을 열었으나 나는 린화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 시늉을 했다.


“하지 마!”

린화는 짜증을 내느라 내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어쨌든 난 폐하랑 그 정도 친분은 없어. 폐하 얼굴을 뵌 적도 손꼽을 정도로 적어.”

“그럼 폐하는 너한테 호기심만 살짝 있는데도 날 후궁으로 맞이했단 거야?”

“폐하가 너 콕 집어서 오라 한 거 아니잖아. 폐하가 진짜로 나한테 마음이 있어서 너를 꼭꼭 대용품으로 쓰려 했다면 콕 집어서 오라고 했겠지.”

말을 뱉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이제 와 비난한들 무슨 소용일까.

린화는 목덜미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연스럽게 말 꺼낼 기회가 생기면 말해볼게. 어색하지 않게 농담처럼 네 이야기를 할 상황이 된다면 말이야. 그렇지만 대놓고 그런 요구는 할 수 없어.”

“하지만…….”

“내가 폐하께 널 자주 찾아가 달라고 하는 건 황제의 집안일에 내가 참견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어느 황제든 외척 세력을 경계한다. 나는 경계할 만큼 권세가 높진 않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알았어.”

결국, 린화도 뚱하게 수긍했다.

* * *

3월이 되었지만 날씨는 여전히 겨울이었다. 입궐하기 위해 거리를 걷고 있자니, 심지어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궁궐 측문 부근까지 이미 도착한 후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눈을 맞으면서 월무궁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공부하는 서재 앞에서 나는 옷과 머리에 묻은 눈을 대충 턴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축축해진 내 옷차림을 보고 보나 마나 제자가 한소리를 하겠지, 생각하면서.


“오셨습니까 스승님.”

그런데 제자는 홀로 있지 않았다. 제자 곁에 보문 공주가 함께 있었다. 태월에서 온 그 공주가.

그 공주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제 시작이구나!’였다.

회귀 전. 보문 공주는 13황자와 혼인하고 싶어서 이리저리 많이 들쑤시고 다녔다. 그 들쑤신 상대 중에는 13황자의 스승인 나도 포함이었고.

사실 회귀 전을 기준으로 따지면 보문 공주가 늦게 나타나긴 했다.


“공주 전하께서도 계셨군요. 두 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나는 속마음을 감추고서 제자와 보문 공주에게 동시에 인사했다. 보문 공주가 왜 여기 왔는지는 뻔하지. 저 공주는-.


“요 이국사. 실은 13황자께 수업을 함께 듣고 싶다고 말하던 참이었다네.”

회귀 전이나 후나 뚝심 있구나. 그때도 딱 저 핑계를 대고 나타났지.

원래 알던 일이라 그런가. 보문 공주가 난데없이 나타났지만 그리 놀랍진 않다.


“오, 그러시군요.”

하지만 너무 태연히 응답하면 제자가 날 수상하게 볼 터라 나는 눈을 일부러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좀 당황스럽네요!”

“하하, 그렇겠지.”

보문 공주가 소리 높여 웃자 머리카락에 신기하게 꼬아둔 금색 보석 실이 같이 흔들렸다.


“공주 전하, 13황자 전하의 스승이 저인 걸 알고 계시지요?”

나는 일부러 농담조로 말하며 책상으로 걸어갔다.


“당연하지. 그게 문제가 되나?”

“저는 아직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어서요. 폐하와 황후마마의 은덕으로 13황자 전하를 가르치게 되었지만, 외국의 공주님까지 가르칠 능력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곤란한 척 말하자 보문 공주가 입가를 가리고 눈매를 초승달처럼 휘게 했다.


“이국사는 겸손하군.”

“사실인걸요.”

“이국사가 공개적으로 다른 관리들과 경합까지 벌였단 걸 알고 있네. 빼어난 실력으로 이국사를 반대하던 대신들 입을 함구시킨 것도 알지.”

보문 공주는 어떻게 해서든 내 수업을 듣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나는 힐긋 제자를 보았다.

제자는 혼자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괜찮으세요?”

나는 자리에 앉아 책을 늘어놓으며 제자에게 물었다. 나는 제자의 대답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제자는-.


“상관없습니다.”

반대해야 하는데?

회귀 전에 제자는 보문 공주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했다. 그러자 보문 공주는 황후를 끌어들이려 애쓰지. 하지만 황후도 보문 공주를 돕지 않았다.

이에 보문 공주는 다시 나한테 부탁하려 하고…… 하여튼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갔는데.

나는 제자를 ‘미쳤냐’는 눈으로 쳐다보지 않으려 일부러 고개를 내리깔았다.


“13황자께선 괜찮다는군!”

보문 공주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군요. 그러면 저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중얼거리고서 서책을 계속 뒤적거렸다. 회귀하고 나니 무엇 하나 마음대로 흘러가질 않는구나.


“서책은 가지고 계십니까, 공주 전하?”

“없다네. 수업을 같이 들을 수 있을지 아닐지 모르는데 어찌 챙겨 오겠나. 하지만 오늘은 13황자의 서책을 같이 보면 되지. 괜찮지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나는 서책을 계속 넘기다가, 너무 부자연스럽단 걸 깨닫고서 벼루를 끌어왔다.

그러면서 슬쩍 앞을 보니 제자가 자기 서책을 보문 공주 앞으로 밀어주고 있었다.

보문 공주는 책이 잘 안 보이는 척 제자에게로 붙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살피다가, 제자가 내 쪽을 쳐다보는 바람에 나는 얼른 시선을 내렸다.

뭐야. 저 제자놈. 또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야?

* * *



“요 이국사. 수업을 너무 열심히 들었더니 목이 좀 마른데. 물 좀 떠다 주겠나?”

수업을 한 지 일각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보문 공주가 자기 목을 매만지며 부탁했다.


“저요?”

내가 되묻자 보문 공주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13황자께 부탁드릴 순 없잖나.”

자기가 직접 가는 건 선택지에도 아예 없단 건가. 게다가 열심히 말한 건 나인데 왜 듣기만 한 자기가 목이 마르단 건지……?


“그럼요 그럼요.”

하지만 불만을 이야기하는 대신 나는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월무궁 안에 딸린 작은 부엌에 들어가자 부서진 창문 사이로 찬바람과 함께 눈이 몰아쳐 들어왔다.

나는 물을 바로 뜨는 대신 아궁이 옆에 세워둔 땔감을 뒤적여 납작한 나무판자를 찾아냈다. 그걸 창문에 덧대자 찬바람이 조금 덜 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아주 느리게 물을 떠서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을 열기도 전에 보문 공주의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공주 앞에 물잔을 내려놓자 그녀가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고맙네. 요 이국사는 좋은 스승이야.”

나는 제자 쪽은 쳐다보지 않고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그러고서 일각 정도가 지났을 무렵. 보문 공주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설명을 멈추고 쳐다보자 공주가 자기 이마를 손으로 짚어 보더니 내게 작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여기가 좀 추워서 계속 기침이 나는군. 이국사, 내게 따뜻한 차 한잔 타다 주겠나?”

“…….”

“아. 내가 혹시 무리한 부탁을 했나? 그렇게 노려보지 말게.”

멍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공주가 민망한 듯 일어서려는 시늉을 했다.


“아아, 됐습니다. 제가 가져다드리지요.”

나는 공주를 말리고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으로 가자 마침 13황자의 궁녀인 기양이 안으로 들어오다가 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대인, 대인께서 여기엔 왜 오셨습니까?”

“보문 공주가 시켰네.”

“예?”

“목이 자주 마른 분인가 봐.”

“계속 대인을 부려먹는 겁니까?”

기양은 펄쩍 뛰더니 씩씩거리면서 밖을 노려보았다.


“아니, 다른 나라 공주가 왜 여기 와서 대인께 심부름을 시킨답니까? 황녀님들이나 황후마마께 가면 되잖아요?”

“수업을 같이 듣고 싶대.”

내가 고자질하고 있단 걸 알면서도 나는 기양에게 시무룩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기양에게 고자질을 하고 나니, 내가 제자의 반응에 섭섭해하고 있단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제자가 보문 공주의 제안을 거절해주기를 바랐나 보다. 혹은 공주가 나한테 물 떠오라고 시킬 때 제자가 나서서 거절해주기를 바랐거나.

나는 정말 멍청이 중의 멍청이였다. 내가 이국사에서 쫓겨날 위험에 처했을 때도 제자는 날 도와주지 않았다.

그때 나는 제자가 내 목숨이 위태로울 때는 도움의 손길을 줄 마음이 있지만, 그 외에는 내가 힘들건 말건 아무 관심이 없단 걸 깨달았다.

하지만 또다시 제자에게 기대하는 마음을 품어버린 것이다.

멍청이!

제자가 장 보는 걸 좀 도와주고 나한테 집요하게 아는 척 좀 해주었다고 그새 제자를 믿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수업을 왜 전하랑 듣는데요? 염치도 없지!”

기양이 눈살을 찌푸리고서 툴툴거렸다.


“고마워. 네가 화내 주니까 좀 마음이 풀린다.”

그 분노에 감격해서 내가 중얼거리자, 기양은 눈썹 끝을 축 내렸다.


“대인…….”

기양이 날 대신해서 이렇게 화내주자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녀는 세작인 게 들통나 죽게 되니까.

기양이 지금이라도 줄을 바꿔서 세작을 그만두면 얼마나 좋을까?

* * *

차를 가져다주고 다시 수업을 시작했으나, 보문 공주는 반 각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간식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차만 먹으니 입이 좀 텁텁하군. 미안하네, 이국사.”

하지만 내가 나서기 전 문 앞에서 대기하던 기양이 먼저 나서서 간식을 가져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기양이 나가자 보문 공주는 미소를 짓긴 했으나 관자놀이와 뺨 사이에 미묘하게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럼 수업을 계속해도 되겠네요.”

나는 웃음을 가리기 위해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날. 보문 공주는 또 수업에 나와서 내게 잡심부름을 시켰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그러나 다음에도 기양이 차를 가져다주자, 보문 공주는 방향을 바로 바꾸었다.


“요 이국사. 내가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이 부분은요-.”

내게 질문을 해 놓고서 자기는 13황자에게 말을 걸고서 들으라는 듯 까르르 웃는 식이었다.


 
설명을 멈추고 쳐다보면 보문 공주는 듣고 있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계속 설명하게. 다 듣고 있어.”

다시 설명하고 있으면 또다시 그녀가 소곤거리는 소리와 웃는 소리가 났다.


“공주 전하는 13황자 전하와 진도가 전혀 맞지 않군요. 아무래도 함께 수업을 듣기는 힘들겠습니다.”

견디다 못해서 결국 이렇게 말하자, 보문 공주는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일각 정도 후. 그녀는 또 방법을 바꾸었다.


“이국사, 이국사의 해석이 내가 모국에서 스승님께 들은 내용과 좀 다르군.”

보문 공주는 지식을 과시라도 하듯 내가 어느 구절을 해석하면 자기 스승은 다르게 설명했다면서 반대 해석을 내놓았다.

그런 식으로 수업 진도를 아예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제자는 내가 보문 공주에게 시달리는 게 즐겁기라도 한가. 그녀를 돕지도 않았지만 말리지도 않았다.

그래도 버티기를 닷새. 나는 결국 수업이 없는 날. 참지 못하고 제자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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