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손님은 손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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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손님은 손님으로
2023.01.02.
“스승님? 오늘은 수업이 없지 않은지요?”
제자는 잡초에 물을 주다가 나를 보자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나는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으로 다가가 부탁했다.
“전하.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이요?”
“공주님께 수업에 방해되니까 다음부터 나오지 말라고 해주세요.”
제자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공주 이야기를 꺼내자 영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수업에 좀 방해가 됩니다.”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제자도 보문 공주가 내 수업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옆에서 보았으니 알 것이다.
“글쎄요.”
그러나 제자는 내 말에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수업을 듣는 입장에선 별 차이가 없던데요. 스승님께는 많이 방해가 되던가요?”
그는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놓고 날 방해하는데 차이가 없을 수가 없었다. 보문 공주는 내가 이 각 이상 수업을 이어가지 못하게 내내 막아댔는데!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황당해서 묻자 제자가 물뿌리개를 내려놓고서 말했다.
“예. 하지만 스승님께는 불편할 수도 있지요.”
“네! 불편합니다.”
“그렇다면 직접 말씀하시면 되겠군요.”
“예?”
“제자는 다양한 관점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보문 공주는 아는 게 많더군요. 외국인이라 사상도 우리나라와 관점이 다르지요. 수업에 도움이 됩니다.”
그의 말을 듣는데 말문이 막히고 잠시 어이가 없어졌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는 제자의 태연자약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실망하고 있다는 게 점차 인지되었다.
“그렇군요.”
실망할 게 없다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넸지만 그래도 역시 실망스러웠다.
’역시 13황자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야.‘
이전에도 확신은 했지만, 지금은 더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저 빌어먹을 제자는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은근히 즐기는 게 분명했다.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니 어쩔 수 없지요.”
내가 수긍하자 제자는 다시 잡초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그 우아하지만 얄미운 모습을 흘겨보다가 나는 곧장 돌아섰다.
“차라도 한 잔 안 마시고 가십니까?”
마시고 싶겠냐?
“예!”
얄미운 제자에게 단호하게 외치고 돌아서서 나는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다음 수업 날.
나는 어제 제자에게 부탁하지 않은 사람처럼 수업에 들어갔다.
"요 이국사, 좋은 아침이네.“
보문 공주는 제자 옆에 붙어 있다가 나를 보자 웃으면서 인사했다. 표정만 보아서는 보문 공주는 아주 결백해 보였다.
"공주 전하와 13황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하고서 내 자리로 걸어갔다. 그러고서 책상에 앉아 서책을 펼치는데, 문밖에서 태감이 외쳤다.
"9황녀 전하 납시오!"
"9황녀?"
보문 공주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는 미소를 숨기기 위해 서책을 펼쳐서 입가를 가렸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곧 9황녀가 선안을 데리고 들어왔다.
보문 공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자를 쳐다보았다. 왜 9황녀가 나타났는지 13황자에게 묻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13황자가 알 리가 없었다.
"누이께서 무슨 일이신지요?"
제자는 차분하게 물었다.
"요 이국사 수업을 아무나 들을 수 있다고 해서. 나도 수업을 들어보러 왔네. 보문 공주가 적적해한다니 말벗이 되어주어도 좋고."
9황녀가 말하는 사이. 그녀가 데려온 태감이 동그란 의자 두 개를 나와 제자의 책상 사이에 놓아주었다.
선안이 내 쪽으로 눈치를 보면서 공주와 나란히 앉았다.
나는 책으로 얼굴을 여전히 반 가리고서 표정을 숨겼다.
“…….”
하지만 그새 무언가를 눈치챈 듯 제자가 대번에 내 쪽을 쳐다보았다.
"6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제자가 날 추궁하기 전에 6황자까지 나타났다.
"이국사, 나 왔네!“
그리고 6황자의 등장으로 이들을 내가 불렀다는 게 대번에 들통났다. 어차피 길게 숨길 생각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보문 공주도 나를 쳐다보았다.
"오셨습니까, 전하.“
나는 모른 척 일어서서 6황자에게 인사했다.
어제 제자가 내 부탁을 거절한 뒤. 나는 9황녀와 6황자를 찾아가서 보문 공주가 수업을 방해하고 있으니, 찾아와서 공주의 말벗이 되어 달라고 청했다.
원래는 9황녀에게만 부탁하려 했으나, 그녀가 대답을 확실하게 하지 않아서 6황자도 찾아갔다.
6황자는 재밌는 사건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데는 빠지지 않으려 할 거라 여겼지.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내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덕택에 월무궁 안의 좁은 서재에 황족만 총 네 명이 모이게 되었다.
그리 넓지 않은 서재에 다 큰 어른 여섯 명이 함께 머물려고 드니, 순식간에 방 안에 공기가 부족할 지경이 되었다.
“다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오늘은 더 열심히 수업할게요.”
분위기도 별로였지만 나는 눈치를 가져다 팔아버린 사람처럼 말했다.
제자가 내 이마를 뚫어버릴 기세로 쳐다보았으나 나는 모른 척 서책을 펼치며 외쳤다.
“오늘은 230쪽을 할까요?”
“잠시만.”
보문 공주는 바로 끼어들더니 태감에게 지시했다.
“내 의자도 저기에 놓게.”
공주가 일어서자 태감이 그녀가 앉던 의자를 9황녀 의자 옆에 놓아주었다. 보문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6황자와 선안, 9황녀는 나와 제자 사이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서 거기에 주르륵 앉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자기만 혼자서 제자 옆자리에 앉기 민망한 듯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제자를 탐내는 게 드러나니까.
“그럼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웃음을 감추지 않고서 말했다.
그러고서 삼각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웬일로 공주가 날 방해하지 않기에 ‘사람들 눈치를 보나?’ 생각하고 있는 도중.
“요 이국사. 이 글귀가 이해가 가지 않는데. 이 구절을 부모와 자식으로 해석하는 건 너무 말을 그대로 해석한 게 아닌가? 좀 더 함축적인 의미가 있어 보이네.”
공주가 버릇을 못 버리고 결국 끼어들고 말았다.
“그러면 공주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선안이 그 말을 받았다. 이번엔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공주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면서 대답했다.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군주와 신하인데, 그걸 돌려서 표현한 듯하군.”
“그렇군요. 공주 전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선안은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다가 바로 반박했다.
“하지만 그 해석은 너무 태월식입니다.”
“태월식이라니. 우리나라 방식에 문제가 있단 건가?”
보문 공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문제는 없지만 이 서책을 쓴 사람은 태월 사람이 아니지요. 이 서책을 쓴 사람은 경하국 사람입니다. 경하국은 군주제가 아니지요.”
“…….”
9황녀가 부채를 펼쳐서 자신의 미소를 반만 가렸다.
그런 식으로 수업 내내 보문 공주가 내게 시비를 걸 듯하면 선안이나 9황녀가 대번에 끼어들었다.
나는 이국사이기에 보문 공주가 뭐라고 우기면 바로 받아치기가 어려운 입장이었다. 하지만 9황녀는 9황녀였고, 선안은 지금 9황녀의 정혼자로서 온 것이었다.
그렇다보니 지식 문제로 굳이 보문 공주의 체면을 살펴줄 필요가 없어 거침없었다.
그러다가도 언쟁이 생길 기미만 보이면 구경하던 6황자가 끼어들었다.
“다들 뭘 그리 흥분하나?”
보문 공주는 일이 그렇게 흘러가도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참을성 있게 9황녀와 6황자를 상대했다. 그러면서도 되도록 선안과는 말을 섞지 않았다.
선안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9황녀가 나서면 선안이 바로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표정에 변화가 나타난 건 공주가 아니라 13황자 쪽이었다.
보문 공주가 혼자서 날 괴롭힐 때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으면서. 보문 공주가 혼자 궁지에 몰리는가 싶어 보이자 제자는 미묘한 표정을 하고서 계속 나를 힐긋거렸다.
‘뭐, 어쩌라고. 수업에 손님 초대하는 건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다, 제자야!’
* * *
그렇게 수업을 두 번 하고 나자 보문 공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은 공주 전하께서 안 오셨네요?”
그녀가 수업에 끼는 걸 포기했단 걸 알았지만, 나는 모른 척 물으면서 내 자리로 걸어갔다.
“이렇게 단체로 수업하는 건 부담스럽다고 하더군요.”
제자는 보문 공주가 왔을 때나 안 왔을 때나 차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책을 펼치면서 그를 보니, 제자는 보문 공주가 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고작 몇 번 오려고 수업에 끼어달라 한 건가?”
오히려 9황녀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누이께서 놀려대니 오기 민망해진 게 아닐까요?”
내내 눈치 없는 척하던 13황자가 웃으면서 물었다.
“남의 나라에 와서 멋대로 구는 꼴을 볼 순 없지!”
9황녀는 부정하지 않고 턱을 치켜들었다.
애초에 9황녀와 6황자는 보문 공주를 견제하기 위해서 초대한 이들이었다. 보문 공주가 오지 않게 되자 이들 역시 다음 수업부터는 오지 않게 되었다.
시끌벅적해졌던 제자와 나의 수업은 그렇게 거의 열흘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서야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일이 잘 해결되었는데도 통쾌한 마음보다는 실망감이 더욱 컸다. 이 상황이 실망스러웠다.
제자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 거야 원래도 알았지만…… 이걸로 확실해졌구나. 요즘은 좀 사이가 좋아지는 것 같았는데.
그래도 아직 제자는 나를 적대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회귀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제자는 권력을 얻게 되면 다시 또 나를 정점에서 밀어버리려 하겠지. 아직 적의가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야 적의를 누를 수 있지?
그간 열심히 노력을 한다고 했는데 소용이 없었잖아.
* * *
“어머니. 전에 린화가 두고 간 옷들을 다 보관하고 있다고 했죠?”
고민 끝에 나는 퇴궐하자마자 어머니를 찾아가 물었다.
“그렇지. 마음에 드는 게 있나 보고 가져갈래?”
어머니는 대번에 반색했다.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나를 예전에 린화가 머물던 규방으로 직접 안내해주기까지 했다.
규방 문을 열자 방 안을 가득 채운 옷들이 나타났다.
“앞에 나와 있는 옷들은 수선을 모두 끝낸 거란다.”
어머니는 가지런하게 늘어선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다 네 거니까 마음에 드는 게 있거든 아무거나 골라 입거라. 너 혼자 와서 골라 가도 돼.”
어머니는 들뜬 목소리였다. 내가 나서서 여인 복색을 하겠다고 하자 조금 기쁜 눈치였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새 옷들도 원하면 맞추고. 지금 하나 입어볼래?”
“챙겨 갈게요.”
“챙겨 가다니?”
어머니가 곱게 걸린 옷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넘겨 보다가 물었다.
“어디에?”
“월무궁에요. 수업이 끝나고 전하께 보여드리려고요.”
어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니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였다. 대체 내가 왜 수업하러 가서 13황자에게 여인 복식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려나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한참 망설인 끝에 어머니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요화야. 네가 전하와 정혼 했다지만 아직 혼인한 건 아니니…….”
“그냥 옷 입은 모습만 보여드리려는 거예요. 외국에서 온 공주 하나가 자꾸 전하께 찾아가서요.”
내가 여인 의복을 가지고 제자를 찾아가려는 건 보문 공주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내가 여인 의복을 입으려는 건 제자가 내가 여인 의복을 입었을 때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만났을 때 그는 처음에는 호기심을 보였고, 내가 일부러 모른 척하는데도 부러 따라다녔다.
여인 의복을 입는다고 그의 적대심이 쑥 사라지진 않겠지만, 변화는 원래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는 법 아닌가.
하지만 어머니에게 이런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럼 이걸 가져가거라.”
어머니는 13황자를 싫어하지만 별개로 다른 사람이 내 정혼자 옆에 얼쩡거리는 것도 싫은 듯했다.
“이걸 입으면 네 분위기가 더욱 좋아 보여.”
어머니는 집중해서 의복을 살피더니, 막 솟아난 새잎 같은 색상의 옷을 들며 말했다.
옷을 받아다 턱 밑에 대고 거울 앞에 서보니, 어머니 말처럼 학자다운 티가 났다.
“그럴게요.”
* * *
그다음 날. 나는 어머니가 어제 골라 준 옷을 나무 상자에 잘 보관한 다음 그걸 들고 월무궁으로 갔다.
평소보다 좀 더 이른 시간에 갔기에, 우리의 공부방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자주 사용하는 공부방 곁방에 들어가서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서 서재로 나가 책을 펼쳐 놓고 기다리자, 수업 시간에 맞추어서 제자가 나타났다.
“일찍 오셨군요.”
문을 닫고 걸어오던 제자는 날 보자마자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