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받아라 예쁜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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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받아라 예쁜 미소!
2023.01.12.
“전하가 제 생명의 은인이네요!”
나는 제자를 끌어안고서 서글픈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고서 고개를 들어 보니, 제자의 표정이 꼭 처음 뭍에 올라와 새를 본 거북이 같았다.
“제자가 스승님을 구했던가요?”
제자는 떨떠름한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네. 어떤 몹쓸 강도들이 제게 달려들어서 아주 위험한 참이었거든요.”
나는 얼른 대답했다. 하지만 너무 전후 사정을 바꿔버렸나. 뒤에서 유동백이 따갑게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하긴. 완전히 유동백 공을 배제할 순 없겠지.’
어쩔 수 없이 나는 유동백 이야기까지 넣어서 다시 말을 바꾸었다.
“유 대인이 나타나서 그자들이 움츠러들었는데, 전하까지 나타나시니 완전히 달아나지 뭐예요?”
“제가 왔을 땐 전하와 유동백뿐이었는데요.”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거짓말하는데도 제자는 내 말에 조금도 속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반박하기만 했다.
민망한 마음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버텼다.
“유 대인이랑 저는 친하지 않잖아요. 전하가 와서 안도했으니 전하도 제 은인이시지요. 그렇지요, 유 대인?”
* * *
유동백은 13황자의 스승이 새끼 여우 같다고 생각했다.
13황자의 스승은 터무니없는 말을 세상에서 가장 결백하고 순진한 얼굴로 내뱉고 있었다.
“전하, 전하. 어떻게 딱 이 시간에 여기 오셨어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댄 요요화는 이제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13황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유동백은 그의 주군이 빳빳하게 굳어지는 걸 떨어져 서서도 느꼈다.
“아차. 밖이니 전하라 부르면 안 되겠지요? 제자님이라 부를까요?”
요요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슬그머니 자기 얼굴을 13황자 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그 동작으로 인해 긴 목선이 드러나자 13황자는 잡힌 팔을 홱 뿌리쳤다.
요요화는 섭섭한지 잠시 입꼬리를 내리고 어깨를 떨구었다.
그러나 유동백이 보기에 13황자는 요요화가 흔든 꼬리에 맞지 않게 다급히 몸을 피한 거나 다름없었다.
유동백은 13황자의 스승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에 만났을 때도 저랬던가?
어쨌든 골목길에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유동백은 나서서 말했다.
“그러지.”
13황자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더니 제 스승을 흘겨보고서 앞서 걸어갔다.
그 반응에 민망할 만도 하건만.
“제자님, 같이 가요.”
요요화는 샐샐 웃으면서 또 13황자를 따라갔다.
다루 안에 들어간 13황자는 자연스럽게 계단 위쪽으로 올라갔다.
이 다루의 가장 꼭대기 층은 유동백이 일 년 내내 값을 치르고 비워두고 있었다. 언제든 13황자와 자신의 동료들이 이곳에서 모일 수 있도록 조처한 것이었다.
“늘 마시던 차로 드릴까요?”
지나가던 점소이가 바로 다가와 물었다. 자연스럽게 이 다루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유동백과 13황자 일행의 얼굴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
“저분은…….”
점소이가 처음 보는 요요화를 눈으로 슬그머니 가리켰다.
그 질문에 유동백이 요요화에게 ‘뭘 마실 거냐’고 물으려는 찰나.
“나는 이 미남분과 같은 차로 주게.”
요요화가 13황자의 팔을 잡으며 점소이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유동백은 요요화가 여인이라는 걸 이제 알았으나 점소이는 알지 못했다. 점소이는 입을 쩍 벌렸다.
“그만하고 오시지요.”
보다 못한 13황자가 차가운 얼굴로 요요화를 잡아당겼다.
13황자 스승의 기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꼭대기 층에 올라가 방 안에 들어가자 요요화는 자연스럽게 13황자의 옆자리에 찰싹 붙어 앉기까지 했다.
그 태도를 보던 유동백은 마침내 확신했다.
‘일부러 저러는군.’
유동백은 13황자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렸다.
공식적으로 정혼했기 때문인가? 전에 왔을 때도 둘 사이의 분위기가 미묘하긴 했지만, 요요화가 13황자에게 저 정도로 찰싹 달라붙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 요요화는 텃세 부리는 오리처럼 13황자 옆에 붙어 있었다.
유동백은 차가 들어오길 기다리며 13황자를 쳐다보았다.
13황자는 자기 스승이 갑자기 친밀하게 구는 걸 어떻게 생각할까?
* * *
30번째 삶 때 화려는 요요화가 저러는 걸 보았다.
요요화는 작정하고 그를 자신의 손안에 넣으려는 것처럼 그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물론 그 끝은 배신이었고 화려는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스승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화려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내려치는 스승이 어떤 의미로는 참으로 놀라운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스승은 99가지의 전술은 없을지 모르겠지만, 99가지의 배신법은 아는 사람이 틀림없었다.
그런 스승이 이번에도 30번째 삶처럼 만들어낸, 하지만 분명히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면서 탐스러운 꼬리를 살살 흔들어 보이기 시작했다.
13황자는 30번째 삶의 최후를, 배신당했던 충격을 떠올리면서 스승의 미소에 대항했다.
스승이 저렇게 나올 때는 노리는 게 있을 때였다. 절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난하게 지냈으면서. 난데없이 저렇게 어여쁜 태도를 보일 때는 간악한 흉계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13황자는 스승이 최근에 누구를 만났던가 떠올려보았다.
* * *
민망한 마음을 꾹꾹 누르면서 얼굴 근육이 다 아프도록 웃어댔는데.
점소이가 차를 타 오고, 간식으로 구운 뭔가를 가져오고, 이후에 차를 한 잔 더 가져오도록 제자는 조금도 내게 감동받지 않은 듯했다.
나는 제자에게 끊임없이 그가 날 구해주었고, 그로 인해 내가 감동을 받았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제자는 심드렁했다.
역시 유동백이 문제였다. 유동백이 한발 앞서서 이미 강도들을 처리한 후였기에 제자가 내 말을 빈말로만 듣는 게 틀림없었다.
‘사람이 아주 강철 같구먼.’
나는 점소이가 가져다준 녹차를 마시면서 속으로 제자에게 소리쳤다.
‘잘생겨서 좋다고 해도 믿지 않고. 구해줘서 좋다고 해도 믿지 않고. 이 치사한 제자놈아, 넌 날 믿을 생각이 아예 없는 거지?’
물론 그럴 거다. 제자는 내가 그를 죽인 횟수 이상으로 나에게 독살당했다고 하니까.
“…….”
그래. 한두 번 잘 보인다고 그가 경계를 풀면 오히려 그게 더 무서운 거지. 분명 꿍꿍이가 있단 뜻일 테니.
아직 제자가 날 죽이려 마음먹기까지는 몇 해가 남았다. 그러니 시간을 두고 차분하고 꾸준하게 제자에게 애정을 표현하자. 그가 날 죽이는 것보다는 버리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여기도록.
“스승님.”
그런데 차를 거의 다 마시고서 지금이 몇 시인가,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내내 나를 반쯤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던 제자가 먼저 나를 불렀다.
“네, 제자님. 왜 그러세요?”
나는 얼른 싹싹한 미소를 짓고서 되물었다.
제자는 불러 놓고서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찻잔을 잡고서 입꼬리를 불길하게 올리고 있기만 했다.
“이 근처에는 왜 계셨는지요?”
좀 지루하다 싶을 즈음에야 제자가 입을 열었다. 게다가 사람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했다.
심장이 뜨끔했지만 나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세요?”
“궁금해서요. 스승님을 여기서 뵌 적이 없는 듯하지 뭡니까.”
“전 그냥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저는 원래 잘 돌아다니면서 놀아요, 전하. 전엔 선안이랑 여기저기 다니면서 놀았지만요. 하지만 지금은 선안이 바빠서요. 선안이 누군진 아시지요?”
나는 빈 찻잔을 손에 들고서 안에 든 차를 마시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제자를 힐긋 보니, 그는 정반대로 찻잔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하지만 입에 걸린 불길한 미소는 그대로였다.
“그렇군요.”
제자는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다시 찻잔을 마시는 척 얼굴을 가져다댔다.
하지만 제자가 저런 태도로 나오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내가 뭐 말실수를 했나? 혹시 내가 이 근방에 있어서 제자가 날 의심하기 시작했나?
내가 자기들 모임 장소 근처에 있단 이유만으로 제자가 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속이 턱 막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즈음.
“잠시.”
제자가 중얼거리더니 혼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변소를 간 건지 아니면 잠깐 다른 볼일로 나간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목표물이 나가버리고 난데없이 유동백과 단둘이서 남게 되자 빠르게 민망해졌다.
아까 유동백은 날 도와주었다. 그런데 나는 제자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앞서서 그를 살짝 무시했다. 그런 유동백과 둘이 남았는데 민망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어색한 시간을 견디다가 나는 그냥 빠르게 사죄해 버렸다. 사과할 게 있으면 후딱 사과해 버리는 게 낫다.
“미안하다니요?”
유동백은 창밖을 쳐다보고 있다가 물었다.
“전하랑 둘이서 차 마시려던 것 같은데. 제가 끼어들었잖아요.”
“괜찮습니다.”
“유 대인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제대로 감사하지도 못했고요.”
유동백은 다시 창밖을 쳐다보려다가, 내 두 번째 사과를 듣자 시선을 돌렸다.
“내가 도와준 걸 기억은 하는군요.”
눈이 마주치자 그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내내 전하께만 고맙다고 하시기에 저에 대해선 잊어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미안합니다.”
노골적으로 놀리는 말투에 나는 얼른 재차 사과했다.
“전하랑 요즘 사이 나쁜 일이 있어서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까 내가 보인 행동이 부자연스럽게 보일 듯해서, 일부러 최근 사건을 끌어들여 변명했다.
“사이 나쁜 일이요?”
“네. 보문 공주를 사이에 두고서요. 그래서 전하를 뵙자마자 잘됐다 싶어서 감사하다고 한 거예요. 전하랑 사이가 틀어져 봐야 저만 손해니까요.”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가 13황자에게 접근할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한 건 보문 공주 사건 때문이니까.
아무리 제자에게 다가가려고 해도 제자가 내게 가진 적의를 누르기가 어렵다는 걸 알아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거니까.
어쨌든 이렇게 말해두면 나중에 유동백이 제자에게 내 이야기를 전할 수도 있겠지?
“그렇군요.”
그러나 유동백은 그리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니라는 투로 중얼거렸다.
“…….”
“…….”
심지어 그 이후로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가 입을 다물자 그는 한 마디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제자가 없는 방 안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제자는 잠깐 나간다더니 돌아오질 않았다.
슬슬 집에 슬슬 돌아가고 싶은데.
‘젠장. 제자가 와야지 인사라도 하고 갈 텐데.’
그렇게 있기를 체감상 이각 정도.
더는 견디기 힘들어져서 ‘무슨 말을 꺼내 볼까’ 혼자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제자는 내가 아무리 싹싹하게 굴어도 내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나는 그 원인을 제자가 여러 번 반복했다는 회귀에서 찾았다. 하지만 이건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유동백에게 싹싹하게 굴어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유동백이 내 싹싹함에 반응해준다면 나는 잘 행동하는데 제자가 경계하는 게 맞고. 유동백도 나를 무시한다면 내가 적절히 싹싹하게 굴지 못한단 뜻이겠지.
그 생각을 하자마자 나는 얼른 입가에 미소를 짓고서 유동백을 바라보았다.
“유 대인.”
유동백이 어째서인지 흠칫하더니 나를 좀 수상쩍게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요, 생각해보니 저랑 유 대인 사이에도 깊은 인연이 있구나 싶어서요.”
나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만들면서 일부러 몸을 두어 번 꼬았다.
“깊은 인연이요?”
유동백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유 대인은 제 가장 절친한 친구의 형님이잖아요. 게다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제자님의 친구이기도 하고요.”
나는 그와 나 사이의 인연을 강조하고서 제자가 제일 약해지는 내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받아라 예쁜 미소!
“…….”
유동백의 눈썹이 허공으로 휭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