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스승과 제자는 줄다리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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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스승과 제자는 줄다리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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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스승과 제자는 줄다리기 중
2023.01.23.
저 제자가 왜 저기 있는 거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고는 오롯이 그것뿐이었다.
제자는 삿갓을 쓰고 있었지만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원래 원수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눈에 잘 띄는 법이니까.
제자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 역시도 아주 잘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춤이라도 좀 잘 추고 있다면 그나마 나을 텐데. 박자는 놓친 지 오래였고 몇 시진 동안 욱여넣은 동작도 이미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흩어졌다.
대충 분위기에 맞추어 팔을 흔들고 있을 뿐 내가 엉터리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제자의 눈에 내가 얼마나 엉터리일지 훤히 짐작이 갔다.
“낭자 그쪽 방향 아니요!”
아래쪽의 누군가 외치자 주위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웃어댄다.
날 바라보는 제자의 표정은 싸늘하다 못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두 팔을 올리고서 오리 엉덩이춤을 추자 제자는 눈에 모래라도 들어간 표정으로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럴 땐 민망한 티를 내면 더 민망한 법이었다. 나는 제자에게 내가 전혀 민망하지 않다는 걸 보이기 위해 정색하고서 더 열심히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제자는 자기 이마를 손으로 가렸지만, 그래도 영 보기 나쁜 건 아닌지 제자리를 지키고서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생각보다 춤을 좀 잘 추는지도 모르겠다.
“낭자! 또 혼자 반대 방향이오!”
방향이 좀 바뀌었긴 하지만 사실 춤에 있어서 중요한 건 방향이 아니니까. 그나저나 이 춤은 언제까지 춰야 하지?
‘어?’
그런데 멍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제자와 뚝 떨어진 뒤쪽에 또 하나 아는 얼굴이 보였다.
‘사부?’
우리 가문에 숨어 지내는 대신 내게 무공을 좀 가르쳐준 사부 같은데…… 아닌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돌아서서 사라지는 걸 보니 아닌 모양이다.
그러는 사이 드디어 음악이 멎었다.
“이쪽! 이쪽으로!”
음악이 멎자 무대 뒤쪽에서 ‘조장’이라 불리는 여자가 벽에 선 무희들을 향해 입 모양으로만 소리쳤다.
음악이 끝나면 들어오라고 말이 되어 있었기에 나는 얼른 줄을 서서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조장은 내게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네가 무대를 망쳤다!”
“조장님은 대기실 안에만 있어서 무대를 못 보셨잖아요?”
동의하면서도 슬쩍 반발했으나 조장은 가차 없었다.
“배경으로 춤을 추라고 불러 놓았더니 사람들 이목을 끌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하더구나! 알고 그랬다면 너는 정말 영악한 인간이고 모르고 그랬다면 춤에 재능이 단 한 푼도 없으니 당장 극단을 떠나도록 해라!”
반발하려고 보니, 중앙에서 춤을 춘 무희들이 나를 힐긋거리면서 째려보고 있었다.
내가 혼자 엉터리로 추는 바람에 사람들이 날 비웃느라 진짜 춤을 제대로 못 본 모양이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구먼.
“이봐. 내 말 제대로 듣는 건가!”
“조장님, 하지만 조장님은 제 상사가 아니시잖아요. 제가 제 극단에서 떠나게 할 수 없어요.”
“뭐야!”
조장이 목을 붙드는 걸 보다가 나는 슬그머니 의자 한쪽에 놓인 내 피풍의와 삿갓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당장 꺼져!”
하지만 조장이 목에서 손을 떼고 목에 핏대가 서도록 외치는 바람에 삿갓을 집을 수도 없었다.
피풍의를 챙기기도 전에 웬 덩치 큰 이들이 다가오더니 나를 방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아 버렸다.
“저기요!”
문을 두드려도 그들은 열어주지 않았다. 내 춤이 그 정도로 엉망이었던 걸까? 하지만 난 고작 몇 시진 밖에 춤을 못 배웠다고! 그전에는 춤을 춰본 적도 없었어!
“저기, 내 옷은 줘야지요!”
소리를 높여도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만 나를 힐긋거릴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돌아서서 옆에 놓인 열쇠만 챙겼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문을 두드려본 다음 순순히 돌아서서 복도를 걸어갔다.
이대로 쭉 가다가 창문이 나오면 열쇠를 던지고서 이 건물을 나갈 생각이었다.
옷이…… 좀 화려하긴 하지만 뭐. 그래도 일상에서 못 입을 모양은 아니니 괜찮겠지.
그런데 모퉁이를 돌자마자 누군가 내 어깨 위에 묵직한 옷을 얹었다. 바로 앞에는 누군가의 커다란 몸이 나타났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제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 제자님?”
놀라 부르고서 내 어깨를 보니 어깨에 걸쳐진 옷은 제자의 겉옷이었다.
“제자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당황해서 묻자 그의 입꼬리 한쪽이 삐뚤게 올라갔다.
“제가 여쭙고 싶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왜 이런 곳에서 춤을 추고 계신 거지요?”
“!”
“그게…….”
“휴가를 달라고 하시다니요. 춤을 추고 싶으셔서 휴가를 받아 가신 거였군요.”
“그게요…….”
“이 제자가 스승님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춤도 못 추시는데 무대엔 어떻게 서신 겁니까. 극단에 돈이라도 먹이셨습니까?”
뭐야?
“지금 저더러 뇌물을 주고 무대에 올라갔냐 물으신 건가요?”
내가 수상하게 행동하긴 했지만 추측을 해도 뭐 저런 엉터리 추측을 하지?
기분 나빠서 묻자 제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그렇게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관계자로 이 안에 들어오려 계책을 세운 거겠군요. 빼돌릴 물건이라도 있는 건지요?”
“!”
제자는 말 몇 마디에 내 목적을 거의 구할 가량으로 알아내 버렸다. 나는 그가 능구렁이처럼 뱉어대는 말에 완전히 휩쓸리고 만 것이다.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으나 제자는 이미 눈썹을 치켜올리고 있었다.
“그런 모양이군요.”
제자가 자기 추측에 확신을 가지고 중얼거리더니 내게로 한층 더 가까이 붙었다.
그의 시선이 내 정수리와 어깨를 지나 아래쪽으로 향했다.
나는 얼른 손을 뒤로 감추었으나 제자는 이미 내가 손에 든 열쇠를 발견한 뒤였다.
“이걸 가지러 오신 거군요.”
누가 지나가자 제자가 허리를 숙여 내 귀에 대고 놀리는 투로 속삭였다.
발끈해서 노려보자 그가 약간의 틈만 남기고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우리 스승님은 정말. 이 머리에 뭐가 들은 겁니까. 뭐가 들어 있길래 한시도 쉬지 않고 늘 계략과 책략을 세우는 거지요?”
그는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렸다.
눈 깜짝할 사이 그가 내 손에서 열쇠를 낚아채 갔다.
“이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나는 다시 그의 손에서 열쇠를 뺏어 들었다.
“안 돼요.”
“스승님.”
그가 단호하게 나를 불렀다.
그러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나는 이걸 위해서 난데없이 사람들 앞에서 춤도 추었다.
제자는? 제자는 그냥 암시장에 오고, 나를 발견하고, 어이없어 한 게 다였다.
그러다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제자는 여기 어찌 들어왔지?’
유동백과 유 가주는 이 안에 들어올 수 없어서 내게 무희로 위장해 달라 부탁했다. 그런데 제자는 대체 어떻게 이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지?
‘대단하긴 대단한 인간이야.’
회귀를 여러 번 하면 다 이렇게 되는 걸까?
“스승님.”
제자가 일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를 꾸며냈다.
“우리가 이런 곳에서 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얼른 주시지요.”
“싫어요.”
“스승님께서 이리 수상하게 구시면 제자는 또 스승님을 신뢰하기 어려워진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사근사근해졌지만 반대로 분위기는 점점 더 가라앉아갔다.
그래도 나는 열쇠를 움켜쥐고서 내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자의 눈을 힐긋 보았는데,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제자의 표정은 섬뜩한 귀신 같았다. 입꼬리가 대칭적으로 올라가 있는데 눈에 온기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
결국 나는 제자에게 열쇠를 건네고 말았다.
“알았어요. 드릴게요.”
은신처를 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제자놈의 적의를 누르는 것이었다. 어쨌든 은신처 두 개는 획득한 상태가 아닌가.
은신처를 구하고 제자의 적의를 누르지 못한다면 은신처 효과가 확 줄어들 터였다.
“드린다고요.”
그래도 표정이 펴지지 않는 제자에게 재차 말하고서 나는 제자의 손을 가져다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편 다음 그 안에 열쇠를 쑤셔 넣어 주었다.
“됐어요?”
제자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대답했다.
“착하십니다.”
나쁜 놈.
“계속 이렇게 구셔야지요.”
진짜 나쁜 놈.
“이러면 얼마나 귀엽습니까.”
나쁜 새끼!
“불만이 가득해 보이십니다.”
열쇠를 획득한 제자가 혼자 기분이 풀렸는지 주머니에 그걸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속으로는 욕이 나왔지만 나는 꿋꿋하게 참았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제자님은 절 미워하시는 거죠?”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해도 될 거야. 물론 질문인 듯 말하긴 했으나 제자가 날 미워하고 있다는 건 나도 안다.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제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시잖아요.”
“제가요?”
“네. 네가요.”
“네가요?”
“제가요.”
“?”
“?”
잠시 말이 꼬여서 제자와 나를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깐의 침묵 후. 제자는 온화한 척 웃으면서 말했다.
“이 제자는 스승님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인 거 다 알아요.”
“정말입니다.”
“하지만 보문 공주가 절 괴롭힐 때도 안 도와주시고, 제가 이국사에서 쫓겨나게 생겼을 때도 안 도와주시더니, 이번에는…… 이번에도 절 방해하시잖아요.”
항의하고 나니 서러워서 저절로 눈꼬리가 내려갔다.
제자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입니다, 스승님. 이 제자는 스승님을 미워하지 않는답니다. 오히려 저는 스승님이 절 미워하는 게 아닌가 늘 염려하고 있는걸요.”
“그런데 왜 절 늘 도와주지 않으세요?”
“제자가 스승님을 도울 의무가 있을까요?”
“저는 제자님이 위급하면 도울 거예요. 저는…… 어…… 실제로도 제자님이 말 가지고 7황자 전하랑 싸울 때도 전하 편을 들었잖아요. 그러다 뺨도 맞았고요, 그러다가 결국 여인인 게 들통나기까지 했어요. 아직도 7황자 전하는 제게 이를 갈고 계시고요. 서로 돕는 게 사제 간이잖아요.”
제자의 입꼬리가 의뭉스럽게 올라갔다.
“우리 스승님은 칭얼거리는 모습도 얼마나 잘 어울리시는지.”
그가 놀리듯 말했고 내 기분은 한층 더 내려앉았다.
나는 진지한데 그는 나를 놀리고만 있었다.
그가 차라리 진짜로 나를 놀리기만 한다면 그나마 낫지. 그가 나를 놀리는 태도 안에는 무시무시한 적의가 꿈틀거린다는 걸 알기에 조금도 미소가 나오지 않았다.
“이리 오시지요.”
제자는 내가 굳어 있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 듯 나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으로 감쌌다.
“우리 몸치 스승님. 이런 장난은 앞으로는 하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장난 안 했어요.”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제게 말씀하세요.”
“전하가 뭐 사주기라도 하시려고요?”
“스승님이 원한다면 천하라도 못 드릴까요.”
거짓말. 그 천하를 쥐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게 나를 팽한 거면서 무슨.
“되게 친한 척하시네요.”
진심을 담아 작게 중얼거리자 뭐가 그리 마음에 드는지 제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툴툴거리면서 그를 계속 따라가다가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소매 안쪽에 넣어 두었던 열쇠를 흙이 두툼하게 쌓인 곳으로 떨어뜨렸다.
그러고서 나무 옆에 선 유동백 쪽에 짧게 시선을 건넸다.
삿갓 아래 유동백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위로 올라갔다.
어쩐지 열쇠를 두 개 챙겨두고 싶더라니. 참으로 다행이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