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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마음이 좁은 스승과 제자 (96/159)


96화. 마음이 좁은 스승과 제자
2023.01.30.


제자는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보문 공주의 안색은 흐릿해졌다. 그녀의 기분이 무너뜨린 모래성처럼 변했다는 것은 눈치 없는 사람이 보아도 알아차릴 정도였다.


“두 사람이 사이가 좋아 보이니 좋군.”

하지만 보문 공주는 이번에도 표정 관리에 성공했다.


“꽃향기가 참 좋아.”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서 꽃을 바라보는 척 잠시 얼굴을 가렸다. 그러더니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제자가 그 뒤를 따라갔고 나도 안도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와중에도 발밑에서는 풀 향기가 물씬 올라왔다.

얼마나 그렇게 걸어 다녔을까. 우리는 조그만 꽃들이 한가득 모여 피어 있는 곳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거의 얼굴 부근까지 꽃가지들이 내려앉아서 허리를 바싹 숙여야만 지나갈 수 있는 꽃 통로가 있었다.


“참으로 예쁜데!”

보문 공주는 감탄하면서 그 부근으로 가더니, 다시 뒷걸음질 쳐서 내게 물었다.


“이국사. 잠시 이것 좀 가지고 있어 주겠나?”

그러더니 내게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공주는 자기 머리에서 동글동글한 장신구를 빼서 내밀었다.


“이걸 빼지 않고 지나가면 머리가 다 헝클어질 거야.”

공주는 그렇게 말하더니 허리를 숙여서 꽃 통로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자기 궁녀 두고 왜 나한테 맡긴대? 나는 손에 장신구를 든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제자를 보았다. 제자는 저 멀리 다른 나무를 보고 있었다.


“전하는 저길 지나가지 않으세요?”

“네.”

제자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서 대답했다.

그 바람에 나는 계속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단단한 턱과 그 위로 흩어진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의식한 것도 아닌데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서 꽃 통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공주는 안에서 꽃을 길러서 나오는 건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질 않았다.

공주는 자그마치 일각 정도가 지나서야 숨이 차서 돌아왔다. 달려서 나오는 공주는 혼자만의 모험이 재미있었는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의외로 기네요! 여기 화원은 정말로 예뻐요!”

공주는 그렇게 외치더니 빠르게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숨을 못 쉬겠어. 빨리 돌아와야 할 거 같아서 쉬지도 않고 뛰었거든.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는지 모르겠네.”

거 너무 친한 척 붙은 거 아닌가요. 나는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을 삼켰다.

그래. 즐거웠다니 되었지. 즐겁게 놀고서 나쁜 마음을 안 품는다면 그게 좋은 거다.


“그러면 이제 가지요.”

제자는 뒷짐을 지고 있다가 공주가 나를 놓아주자 말했다.

우리는 다시 왔던 길을 도로 지나 대화원을 벗어났다.


“우리는 월무궁으로 가보겠습니다. 살펴 가시지요.”

제자가 공주에게 단정하게 인사했고 나도 따라서 인사했다. 그러고서 헤어지려고 할 때였다.


“맞아. 이국사.”

공주가 나를 부르더니 내 팔을 잡고서 말했다.


“내가 맡긴 장신구를 돌려주어야지.”

“아, 그건-.”

공주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내 손을 쳐다보더니 먼저 외쳤다.


“어디 갔나?”

“아 그거-.”

말할 틈을 안 주는구나. 공주는 내 손을 붙들고서 양옆을 마구 훑어보더니 도끼눈을 떴다.


“내 장신구 어디 갔나, 이국사? 내가 분명 맡겼잖나.”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공주의 표정이 뜨겁게 달군 돌처럼 변했다.


“그건 값비싸기도 하지만 아주 귀한 물건이네. 이국사가 꼼꼼하고 섬세해서 일부러 맡긴 건데 대체 어디에 둔 거란 말인가!”

심드렁하게 서 있던 제자가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나와 보문 공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태도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혀 차는 소리가 나오려 했다. 왜 갑자기 친한 척하면서 물건을 맡기고 끌어안고 하나 의아했더니. 애초에 덤터기를 씌우려고 작정을 한 거구먼.

물건을 맡겨 놓고서 13황자가 기다리는데도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은 것도 나를 방심시키기 위한 게 틀림없다.

내가 지루함에 못 이겨 손에 힘을 빼게 한 다음 달려와 내게 안겨 물건을 떨어뜨리게 한 거지.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생겼나 본데?”

지나가던 궁인들이 소곤거리면서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여인이었다는 게 드러난 후로 나는 주위 시선을 좀 잘 끌게 되었다. 거기에 13황자가 옆에 있고 외국에서 온 공주가 화를 내고 있으니 다들 호기심이 이는 모양이다.


“어쩔 건가!”

이들을 인지해서인지 보문 공주가 언성을 더 높였다.


“이국사가 잃어버린 내 물건은 아주 귀한 거란 말일세! 부황이 내게 선물한 물건이야. 그걸 잃어버렸다니 내가 부황을 볼 면목이 사라지겠군!”

“그거참 큰일이시네요.”

내가 적당히 대꾸하자 보문 공주는 더욱 화를 냈다.


“어떻게 책임질 건가!”

나는 부글거리는 속을 누르고서 웃는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책임지길 바라시는데요?”

“우리나라였다면 그 손목을 내놓으라 했을 거네!”

보문 공주의 날카로운 말에 몇몇 궁인들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아. 그렇군요.”

그녀는 내가 겁을 내지 않자 더욱 화난 듯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13황자 쪽을 힐긋 보더니,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 관료의 손목을 멋대로 요구할 수는 없겠지. 여기는 화음이니까.”

차분하게 말한 보문 공주는 근처에서 구경하는 태감 하나를 불러 물었다.


“화음에서는 황족이 맡긴 귀한 물건을 잃어버리면 어떤 벌을 받느냐?”

태감은 쩔쩔매며 대답했다.


“잃어버린 사람이 궁인이라면 보통 곤장을 맞습니다.”

“그렇군. 그러면 이국사도 곤장을 맞아야겠군. 그게 이곳의 법이라니 말이야.”

보문 공주는 태감이 말한 ‘궁인이라면’이란 전제는 쏙 빼버렸다.

대답한 태감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전하.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부디 전하께서 공명정대하게 처분해 주세요.”

보문 공주는 직접 나서서 내게 명령할 수 없단 건 알아서인지 13황자를 보며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화음이 법과 기강이 올바로 선 대국임을 제게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아니라면 저는 이 일을 제 부친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요.”

“협박하는 겁니까.”

13황자는 느릿하게 물었다. 그가 사용한 단어에 보문 공주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협박이라니요. 온당히 일을 처리하고자 할 뿐입니다.”

13황자가 힐긋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아주 놀라운 말을 했다.


“스승님. 그렇다고 하니 얼른 말씀해 주시지요.”

묘한 말에 보문 공주는 눈썹을 찡그렸다. 나 역시 좀 놀랐다.

두어 번 말하려다가 공주의 분노에 차단된 이후. 나는 일부러 입을 꾹 다물고 버텼다. 보문 공주가 어디까지 말하는지 한 번 보기 위해서였다.

그녀에게 화가 치민 상태였기에 일부러 침묵을 선택했다. 그런데 제자는 아무래도 그걸 알아챈 듯했다. 눈치만 빠삭해서는.


“무슨 말이에요 전하?”

보문 공주가 나와 13황자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제자는 대답 대신 나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더는 숨길 수도 없었다.


“공주 전하. 아까부터 대답하려다가 말이 끊겨서 말씀드리지 못했는데요.”

나는 보문 공주에게 최대한 순진해 보이는 표정으로 알려주었다.


“공주 전하의 장신구는 전하의 궁녀가 주웠어요.”

보문 공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쌀쌀맞아졌다.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참으로 발칙하군.”

바로 부정하는구나.


“그럼 전하의 궁녀는 전하의 장신구를 줍고서 일부러 전하께 돌려주지 않은 건가요?”

나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그럼 전하의 궁녀는 물건을 주운 게 아니라 도둑질을 한 거군요.”

나는 놀라운 진실을 발견한 학자처럼 말했다.

물건이 떨어진 건 공주가 나를 끌어안을 때 인지했다. 공주가 떨어져 나간 뒤에 주우려 했는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지기에 궁녀가 알아서 줍는 줄 알고 가만히 있었지.

공주가 무작정 내 탓을 하는 걸 보고는 어디까지 하나 보려고 가만히 있었지만.


“도둑질이라니! 이국사의 발언이 참으로 무엄하구나! 참아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어!”

보문 공주의 언성이 확 높아졌다.


“이국사 자네가 하는 말은 나와 태월 황실 명예를 더럽힌 것이니 내 절대로 이 일을 용서할 수 없네. 13황자, 제가 이국사를 엄하게 벌해도 제 탓이라 원망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 전에 전하 궁녀에게 물건이 있는지부터 확인하셔야지요.”

내가 권하자 보문 공주는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들어주진 않을 거다. 감히 내 궁녀를 음해하려고까지 하다니!”

공주는 그렇게 외치자마자 자기 궁녀의 팔을 잡고서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겼다.


“가자. 당장 황후마마께 가서 이 일을 아뢰자!”

“가기 전에 먼저 확인부터 해야지요.”

하지만 13황자가 뒤에서 그들을 불렀다.


“전하께서는 자기 정혼녀를 지키느라 태월과 척을 지시겠단 건가요?”

공주는 홱 돌아서며 으름장을 놓았다.

궁녀를 뒤지게 된다면 그녀가 자기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게 들통나게 된다. 그러니 더욱 가시를 세우고 화내는 척하면서 상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아마 자기가 궁녀에게 물건을 줍게 지시해 두었으니 저러겠지.


“그렇습니다, 공주.”

13황자는 바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미소 지으면서 덧붙였다.


“나도 공주의 궁녀가 공주가 제 스승을 끌어안을 때 뭔가를 줍는 걸 보았거든요. 공주가 내 스승님께 너무 가까이 가는 게 질투 나서 계속 쳐다보고 있어서 보았지요.”

13황자의 말에 공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반대로 궁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주, 주머니를 확인해 보십시오 전하. 저는 아무것도 줍지 않았습니다.”

궁녀는 더듬더듬 말하더니 자기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저걸 보세요.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공주는 날카롭게 외쳤다.


“소매 안이라던가 품 안에 숨길 수도 있지요. 옷을 벗게 한 다음 다른 궁녀가 확인하면 나올 겁니다.”

내가 끼어들자 공주가 죽일 듯 나를 노려보았다.

잠시 모두가 침묵했다. 주위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제, 제 탓입니다! 제가 나중에 공주 전하께 전하려고 말을 하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안 되겠던지 결국 궁녀가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공주는 주먹을 꽉 쥐고서 애써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가져갔다고?”

“네, 전하. 하지만 도둑질한 게 아닙니다. 나중에 전하께 드리려고 했어요.”

“그랬구나. 하마터면 오해를 살 뻔했어.”

공주는 얼른 말하고서 궁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럴 수도 있지.”

그녀는 갑자기 대인처럼 말했다.


“그런 거라면 왜 아까 내 스승이 공주에게 추궁당할 때 나서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내 제자는 굳이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려 애쓰지 않았다.


“맞아요. 나중에 주웠다고 하려면 주머니를 뒤집어 보일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처음부터 말했어야지요.”

나도 마찬가지였다.


“겁을 먹어서 그런 거지. 분위기가 안 좋아지니까.”

어떻게든 내 곤장을 치려고 몰아가던 보문 공주도 자기 궁녀는 소중한지 말도 안 되게 두둔하려 들었다.

그러고는 13황자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내 실수네. 이국사, 자네에게 미안하게 되었군. ……서로 실수한 거로 하고 그냥 넘어가는 거로 하지. 그러면 나도 자네가 물건을 떨어뜨린 걸 탓하진 않겠네. 어쨌든 내 물건을 자네가 떨어뜨렸으니 내 궁녀가 주운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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