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조금은 사이가 좋아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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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조금은 사이가 좋아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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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조금은 사이가 좋아졌을까?
2023.02.02.
거기에 내가 적당히 넘어가려 할 때였다.
“안 되지요.”
제자가 온화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제 스승은 자칫하면 곤장을 맞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넘어 가자니요.”
제자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시선까지 부드럽게 만들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13황자께선 내 체면을 보아주지 않는군요.”
보문 공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궁녀는 두 손을 꽉 모아쥐고서 고개도 들지 못했다.
“이 아이가 말을 좀 늦게 했단 이유로 처벌까지 하고 싶단 건가요? 대체 뭘 어떻게 하고 싶단 건가요.”
“정해진 대로 처벌해야지요.”
13황자가 미소 짓자 보문 공주가 헛웃음을 뱉었다.
“화음에선 물건을 조금 늦게 전달했단 이유로 사람을 처벌하나요? 참으로 각박하네요.”
“저는 아무 이유 없이 곤장도 맞을 뻔했는데요?”
내가 끼어들자 보문 공주는 정색하고서 나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표정을 관리하지 않았다.
“전하께서 제 궁녀를 처벌하려 든다면 저는 이국사가 제 귀한 물건을 떨어뜨린 죄를 물을 겁니다.”
보문 공주는 물귀신 작전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러시지요. 그러면 저는 공주께서 제 스승에게 누명을 씌우려 한 죄를 같이 물어야겠군요.”
13황자는 몇 번이나 회귀한 인간이었다. 죽은 사람을 귀신이라 부른다면, 그는 귀신 중에서도 선배 귀신이었다. 집요하기로는 이 인간을 이길 사람이 없었다.
“공주 전하. 모두 제 탓입니다. 제 탓이니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추악한 말장난에 놀아나지 마세요.”
안 되겠다 싶던지 결국 궁녀가 무릎을 꿇고서 보문 공주에게 애원했다.
보문 공주는 주먹을 꽉 쥐고서 나를 노려보았다. 자신과 궁녀가 짜고서 내게 하려던 짓은 싹 다 잊어버린 듯했다.
제자가 내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시선을 차단해주었다.
“충신을 두셨군요, 공주. 그녀의 희생을 간직하고 앞으로는 남에게 누명을 씌우지 마시지요.”
제자의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아주 얄미웠다.
“스승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몸도 약하시지 않습니까.”
제자가 내게 권했고, 나는 그의 말을 따랐다.
그 자리에 있어 보아야 보문 공주는 계속 내게 시비를 걸려들 터였다. 아예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나았다.
궁인들이 내 쪽을 힐긋거렸지만 나는 모른 척 궁궐 옆문으로 걸어갔다.
이 일로 보문 공주는 나를 더 원망하게 되겠지. 음. 아마 그럴 거다. 공주는 아까도 13황자와 내가 합동해서 자기와 싸울 때도 13황자가 아니라 나만 죽도록 노려보았으니까.
앞으로는 보문 공주 쪽은 조심해야겠어. 황후가 언제 공주를 돌려보내더라?
* * *
다음날 일어나 식사를 하다 보니 어제 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솟아났다.
보문 공주가 내게 시비를 걸어대도 모른 척하던 제자가 드디어 날 편들었다.
나에 대한 제자의 마음에 1점부터 10점 사이 점수를 주자면, 그중 1점에는 도달한 게 아닐까? 그전에는 1점도 안 됐었고?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시비인 월섬이 빈 찻잔을 채워주면서 물었다.
“그렇지.”
“소가주님이 좋으시다니 저도 좋네요. 남장이 들통난 후로는 영 웃는 일이 줄어드셔서 걱정했거든요.”
월섬이 빈 반찬 그릇을 보며 물었다.
“장아찌를 더 가져다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식사를 마치고서 입궐해 수소문해 보니, 보문 공주의 궁녀는 곤장을 다섯 대 맞고 화음에서 추방당했다고 했다.
공주가 자기 사람을 챙기는 인물이라면 추방당하는 궁녀에게 여행 경비를 잔뜩 주고서 먼저 모국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그대로 궁녀를 팽했겠지만…… 여기까지는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겠지.
이야기를 전해준 궁녀 기양은 겁먹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보문 공주를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대인. 그 공주가 어제 완전히 흉흉한 눈으로 월무궁 주위를 돌아다녔대요.”
“난 괜찮아.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전 대인 편이니까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보문 공주는 두렵지 않다. 보문 공주보다 13황자가 더 무서운 사람이란 걸 아니까.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이전엔 제자가 내 편을 들어주었지만 아직 그가 나를 좋게 보는 건 아니니까.
* * *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나는 하루 사이에 더 만개한 꽃들에 정신이 팔려 그쪽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나무 아래로 늘어진 노란 꽃들을 멍하게 올려다보자 좋은 묘안이 떠올랐다.
‘본격적으로 준비해서 제자한테 같이 꽃놀이하자고 할까?’
우리 집 찬모들은 다들 솜씨가 대단하지. 찬모들에게 도시락을 싸달라고 부탁한 다음 제자에게 내게 만들었다고 사기를 치면 어떨까.
“이국사?”
그때 옆에 있는 나무 위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옆을 보니 옆 나무 위에 3황자가 있었다.
“아니 전하! 또 나무 타고 계세요?!”
3황자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나무 아래로 가뿐하게 뛰어내렸다.
“늘 화원에서 만나는군.”
“계속 나무에 올라가고 그러시면 위험해요 전하.”
“이젠 잔소리도 하는 건가.”
3황자는 미약하게 웃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내 마음에 돌풍이 일어났다.
그와 눈을 마주하기 힘들어서 나는 괜히 3황자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꽃 구경을 하러 왔나?”
“네…… 지나가는 길에요. 꽃이 예뻐서요.”
“대화원 담당 태감은 솜씨가 아주 좋지.”
3황자가 머리 위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데 귀가 간지러워졌다.
“꽃을 좋아하는가?”
“네, 네, 좋지요. 꽃도 좋고 꽃 보는 전하도 좋, 전하도 꽃을 좋아하시네요. 전 꽃을 사랑해요. 만세. 꽃 최고지요.”
나는 두 손을 모아 쥐다가 아차 싶어서 손을 풀었다.
멍청이. 너무 쑥스러워하는 티를 내선 안 돼. 3황자는 저 높은 곳에 있는 번쩍번쩍 대단한 보석이라고. 좋아하는 티도 내면 안 되는 사람이란 말이야. 벌써 마음을 접었잖아?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자니 3황자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가려는 건가?
아쉬운 마음을 누르고서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꽃나무와 꽃 덤불, 땅에 피어난 꽃을 이리저리 살피며 몇 개를 꺾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꽃을 한 다발 만들어낸 3황자가 나를 보며 웃자 그의 얼굴이 극락이었다. 안 그래도 고운 얼굴이 꽃 위에 있자 정말로 선인 같았다.
이 미남이 내 심장을 아주 사정없이 공격하는구나!
심장에 부담이 와서 멍하게 서 있자니 3황자가 다가와 안고 있던 꽃다발을 내게 건넸다.
얼결에 받아 들고 쳐다보자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아한다니 가져가게. 화병에 꽂아두고 방에 두면 보기 좋을 거야.”
“전, 전하, 전하. 전하.”
나는 멍청이처럼 또 중얼거렸다.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바보같이 계속 전하만 부르고 있자니 3황자가 듣기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국사는 마음이 바쁘면 말이 막히는군.”
그의 말에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마음이 바쁜 게 아니라 뛰어서 그렇다는 걸 내 황자님은 알고 계실까?
* * *
“와, 정말 예뻐요 소가주님!”
방 안에 들어와 꽃을 한 무더기 건네자 시비인 월섬이 환한 얼굴로 외쳤다.
“화병에 넣어서 책상 위에 놓아줘.”
“그럴게요. 오는 길에 꺾어 오셨어요?”
“으응. 그렇지.”
3황자가 주었단 말을 할 수는 없어서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월섬은 꽃을 탁자에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더니 길쭉한 화병에 물을 담아 들어왔다.
화병에 꽃을 넣고 튀어나온 이파리 몇 개를 정리하자 내 방이 대화원만큼 환해졌다.
“이거 혹시 13황자 전하가 주신 거 아니에요?”
월섬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놀리는 투로 물었다.
나는 월섬의 등을 떠밀어 내보냈다.
혼자 남아 꽃을 보고 있자니 기쁜 마음과 쓸쓸한 마음이 동시에 치밀었다.
이제 슬슬 황제가 3황자의 혼담 상대 기준을 낮추어서라도 그를 혼인시키려 하겠지. 그러면 3황자와 정혼 하게 될 예 씨 가문 여식이 나타날 것이다.
‘아.’
회귀 전 3황자 일을 떠올리고 있자니, 그보다 더 앞에 있을 일도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이 시기에 제자가 1황자랑 크게 충돌했다. 3황자는 그 자리에 없었고.
황제가 꽃놀이를 하자며 가족과 측근 대신들을 불러 놓고서는 난데없이 황손들에게 깜짝 시험을 치게 한다.
이때 1황자는 영민한 2황자에게 처참하게 비교된다. 이에 황제가 1황자를 혼낼 듯하자 그는 부황의 분노를 돌리기 위해서 13황자를 걸고넘어졌다.
결국 사람들 앞에서 모욕당하고 비웃음당하는 건 13황자가 되었다.
당시에 나는 13황자의 스승이라 그 자리에 참석하긴 했지만, 13황자가 비웃음을 당할 때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사태를 방관했다.
그 자리가 파한 뒤에야 제자를 위로했지만 아마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
그 시기가 슬슬 지금 같다. 1황자비가 이번 겨울에 올 텐데 1황자비가 없을 때 벌어진 일이니까.
‘좋아. 잘됐네. 이번에는 고개만 숙이고 있지 말고 나서서 제자를 두둔해야겠어. 그러면 제자한테 점수를 딸 수 있을 거야.’
제자를 두둔하면 같이 비웃음을 당하겠지만 그게 무슨 대수일까. 중요한 건 최후의 순간에 살아남는 건데.
* * *
예상대로 며칠 뒤. 황제는 ‘내일 다 같이 꽃놀이를 하자’면서 황손들과 후궁들, 대신 몇 명에게 참석을 명령했다.
이번에도 나는 참석하게 되었고, 3황자는 꽃가루를 맡으면 기침이 심해진다고 해서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하루 종일 각오를 다졌다.
13황자를 두둔하면서 내뱉을 감동적인 말들까지 하나하나 다 적어놓은 다음 달달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그리고 다음 날. 만발의 각오를 마치고서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요화야. 잠시 시간 되니?”
첫째 숙부가 마침 다가오다가 문이 열리자 바로 이쪽으로 오며 물었다.
“지금은 좀 바쁜데요, 숙부. 나중에 얘기하면 안 돼요?”
“그리 긴 얘기는 아니란다.”
소가주 문제로 숙부가 식구들을 데리고 와 우리 집에 머문 지 며칠 되긴 했다.
하지만 부지가 넓은 데다가 내 방과 손님용 부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어서 나는 숙부나 사촌들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내가 숙부를 본 건 부모님에게 문안을 갔을 때 몇 번뿐이었다. 그런데 숙부가 갑자기 얘기하러 오다니?
“알았어요.”
이상하지만 숙부를 그냥 쫓아낼 수는 없었다.
“월섬아, 숙부께 차 한 잔 가져다드려.”
나는 월섬에게 지시하고서 방 안으로 들어가 탁자 앞에 앉았다.
숙부는 내 맞은편에 앉고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이야기를 하러 온 기색은 아니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요화야. 너는 영리한 아이니 지금 네 부모님이 소가주 문제로 얼마나 골머리를 앓고 있는지 알겠지.”
“그렇지요. 그것 때문에 숙부들을 부른 거잖아요.”
“가주는 네 부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을 네 아버지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건 아니란다. 우리도 요씨 가문 사람이고 가문 문제는 모두가 머리를 맞대야 하지.”
“그렇지요?”
“요화야. 네 아버지가 이 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 우리도 계속 의논하고 있지만 적절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구나. 그래서 말인데, 차라리 네가 아버지에게 소가주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먼저 말하면 어떻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