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처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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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처리해야겠다
2023.02.06.
나더러 소가주 자리를 직접 나서서 포기하라고? 이게 뭔 소리야?
“아버지가 그걸 원하세요?”
내가 묻자 숙부가 쓸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넌 어차피 소가주가 될 수 없잖니. 그런데 버텨서 무슨 소용이겠냐.”
대답이지만 대답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세요?”
이에 다시 묻자 숙부의 표정이 조금 비틀렸다.
“형님이 어떻게 그렇게 말하겠니. 설령 속으로 그리 여기시더라도 말이야.”
그럼 추측인 거잖아.
“형님은 그런 생각을 해도 체면 때문에 나서지 못할 거란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는 거죠?”
“따지자면 그렇지. 그러니 네가 나서라는 거잖니.”
“그렇군요.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숙부.”
“우리는 가족이니까.”
건성으로 한 인사치레였으나 숙부는 겸양하는 척 대답했다. 문득 숙부의 모습이 꼬리가 통통한 너구리로 보였다. 물론 숙부는 너구리만큼 귀엽지 않다.
“네. 하지만 아버지가 절 위해 아무 말도 안 하시는데 제가 나서면 아버지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너는 효녀가 되는 거고 네 아버지는 체면이 사는 거란다.”
“오히려 체면을 잃는 거지요. 자식을 지켜볼 시도도 못 하게 되시잖아요.”
“싫다는 게냐.”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요, 숙부. 필요할 땐 남장을 시켜 놓고서 필요 없어지니 팽하고 손을 떼버린다고 할 거예요.”
“넌 네 아버지를 나쁘게 말하는구나.”
“아니요, 아버지를 믿는 거지요. 숙부 제안을 따르면 아버지가 좋아할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서요.”
드디어 숙부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네게 나쁜 말을 했단 뜻이냐.”
나는 싹싹한 척 미소를 계속 꾸며내며 손을 저었다.
“왜 자꾸 나쁘게만 해석하세요? 그러지 마세요. 숙부가 아버지를 위해 한 말이 아버지 뜻이 아닐 수도 있단 말이잖아요. 그러니 숙부도 저한테 살짝 말씀하신 거고요. 그렇지요?”
첫째 숙부가 떠나자 월섬은 내 방에 들어와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을까요? 좋은 의도로 온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게다가 숙부도 숙부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고 조심해서 행동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내내 얼굴 볼 일도 없던 숙부와 아침부터 충돌하다니. 조금 꺼림칙한 마음이 드네. 괜찮을까?
“소가주님, 얼른 가셔야지요.”
월섬이 재촉했다.
나는 챙겨두었던 짐을 챙겨 방문을 나섰다.
* * *
황제가 미리 알려준 장소로 가자 이미 사람들이 절반 정도는 도착해 있었다.
후궁들은 봄꽃보다 더 화사하게 차려입고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대화 중이었고, 황녀와 황자들도 앞으로 있을 시험을 모르고서 밝은 색상의 옷을 입고 있었다.
제자 역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 텐데도 꽃놀이하는 의상이었다. 뭐. 나도 그렇지만.
“황제 폐하 납시오!”
송 태감의 외침에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모두 조용히 일어났다.
“날씨가 좋군. 이렇게 화창한 하늘을 보니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고 싶어지는구나. 나라가 건강하고 힘이 있어야 앞으로도 쭉 이런 날들이 이어지겠지.”
황제는 회귀 전처럼 미끼를 날리기 시작했다.
미래를 모르는 황자와 황녀들은 아직 웃고만 있었다.
“그러려면 짐의 자녀들이 영민하고 아는 게 많아야 한다. 그렇지?”
황제가 물어볼 때도 황손들은 다들 “네.” 하고 힘있게 대답했다.
“좋군. 그럼 모인 김에 황손들의 학업 성과나 확인해볼까.”
황제가 흐뭇하게 말하고서야 황손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황제가 손짓하자 태감들이 줄지어 종이와 벼루, 문진, 붓, 먹, 작은 물통 등을 가지고 나타났다. 몇 달 전에 내가 이국사 경쟁을 할 때 같구나. 저 태감들은 늘 저렇게 대기하고 있는 건가.
“자. 황손들은 모두 줄지어 앉거라.”
황제가 지시하자 황자 황녀들은 낯빛이 퀭해져서 자리 잡고 앉았다. 꽃놀이를 기대하고 모였다가 물벼락 맞은 기분이겠지.
태감들이 그들에게 시험 볼 도구를 가져다주었다.
“이걸 사용하시면 됩니다.”
황제는 뒷짐을 지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너희는 내치와 외치. 둘 중 어느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를 고르고 이유를 적거라. 둘 다 중요하다는 대답은 정답이고 정답에는 자기 생각이 들어가기 어렵지. 그러니 그 답은 이번에는 듣지 않겠다.”
시험이 시작되자 황자와 황녀들 모두 진지하게 붓을 움직였다. 후궁들은 서로 소곤거리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를 가진 후궁들은 조금 긴장한 것 같았지만, 아이가 없는 후궁들은 재밌어하기만 했다.
송 태감이 종을 치자 모두 동시에 붓을 내려놓았다. 태감들이 시험지를 거두어 황제에게 가져갔다. 황제는 시험지를 하나하나 살폈다.
“1황자는…… 참으로 엉망이구나.”
한참 뒤. 황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래서 짐의 장자라 할 수 있겠느냐.”
황제는 그저 중얼거릴 뿐이었지만 1황자는 벼루에 맞은 듯 사색이 되었다.
“송구합니다, 부황.”
“짐에게 송구할 필요야 있나. 네 미래에 송구해야지.”
“아바마마…….”
“가장 뛰어난 건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첫째면 중간이라도 해야지.”
여기에 2황자가 희미하게 웃으려는 순간.
“아니, 1황자만 무어라 할 게 아니구나. 황자들 다들 멍청해.”
황제의 말이 바뀌었다. 2황자의 얼굴도 굳었다.
“황자란 것들이 5황녀와 8황녀를 못 따라가는구나.”
회귀 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회귀 전, 1황자는 2황자와 비교되어 혼이 났다. 그런데 난데없이 5황녀, 8황녀라니?
저절로 황후 쪽으로 눈길이 갔다. 둘 다 황후의 딸들이었다.
“단 하나도 5황녀를 뛰어넘는 이들이 없구나. 참으로 멍청해. 누이들보다도 영리하지 않으면서 짐의 후계자가 될 수 있겠느냐!”
황제는 점진적으로 분노했고 그때마다 목소리가 커져갔다.
아니, 이래도 되나? 이런 식이면 내가 제자를 두둔하고 뭐고 할 것도 없겠는데? 이전부터도 생각하긴 했지만, 회귀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그대로 일어나진 않는구나.
“가장 성적이 낮은 황자는 누구인가요 폐하?”
그때 이를 지켜보던 교비가 상냥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물었다.
“13황자다.”
황제가 대답하자, 교비는 알겠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 같이 시험을 못 보았더라도 일단 꼴찌가 정해지자, 사람들의 한심해하는 눈길은 자연히 제자에게로 몰렸다.
세세한 사항은 다르지만 교비의 말 한마디가 다시 회귀 전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1황자의 동복 누이인 4황녀가 까르르 웃으면서 어머니의 뜻을 받들었다.
“열셋째는 어릴 땐 좀 똑똑한 거 같더니. 클수록 멍청해지네요.”
“네 성적도 만만치 않다.”
황제가 딱 잘라 말했으나 4황녀는 꿋꿋했다.
“소녀는 황제가 될 일이 없는걸요. 소녀를 후계자로 삼으실 거라면 공부에 지금부터라도 온 힘을 쏟지요.”
황제는 고개를 젓긴 했으나 4황녀에게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너는 날이 갈수록 능청스러워지는구나.”
이때다 싶은지 7황자가 놀리는 투로 끼어들었다.
“열셋째는 공부를 해도 성과가 없으니 차라리 학업을 멈추고 무술을 익히는 게 낫겠습니다. 키는 크니까요.”
“무술을 무시하시나요 형님? 열셋째는 검술 스승도 없고 연무장에도 안 나오는 데다 사냥 대회에서도 두드러진 적이 없는데 무술을 익히라니요.”
7황자와 한 패인 11황자도 교묘하게 제자를 두둔하는 척 깔아뭉갰다.
“무인들을 무시하면 안 되지요.”
12황자도 말을 받으면서 키득거렸다.
가장 성적이 뛰어나다는 5황녀는 차분하게 눈을 반쯤 내리깔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욱 돋보였다.
나는 힐긋 제자를 보았다. 제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이 비아냥거리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 틈을 보다가 나는 잠시 말이 끊어진 틈에 재빠르게 치고 나갔다.
“13황자 전하는 황자님들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리니 그렇지요.”
대신들은 모두 침묵하고 있었는데 내가 혼자 끼어들자 순식간에 후궁과 황친들의 시선이 내게로 몰렸다.
린화도 나를 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제자도 나를 돌아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됐다. 이거면 됐어. 난 어차피 제자에게 잘 보이려 나선 거니까. 이제 다시 없는 듯 있어야지.
“열셋째 성적이 가장 형편없는 건 스승이 형편없어서가 아닐까요?”
하지만 내가 끼어들자 7황자는 더욱 신이 나서 말했다.
“맞습니다. 열셋째도 부황의 아들인데 혼자 머리가 나쁘진 않겠지요. 열셋째 성적이 엉망인 건 이국사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일 겁니다.”
11황자도 말을 보탰다.
“아니면 요 이국사가 여인이라 둘이 같이 있으면 공부를 하지 않고 놀기만 하니 학업이 미진한 건지도 모르지요.”
원비가 농담조로 뱉자 이제는 후궁들도 동시에 웃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제자를 편들려고 한 건데. 내가 끼어들자마자 화살이 다 내 쪽으로 날아오네.
“폐하. 자신이 지식이 많다고 남을 잘 가르치는 건 아니지요. 어쩌며 열셋째를 위해서는 정말로 스승을 바꾸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교비는 좀 더 나아가 이렇게 권하기까지 했다. 이건 예상한 바가 아닌데.
린화는 입가를 가리고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책임을 져야지요.”
이대로라면 상황이 곤란해지겠다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나도 한 번 더 끼어들었다.
“하지만 제대로 스승 노릇을 못 해 쫓겨나야 한다면, 폐하께서 칭찬한 5황녀와 8황녀 전하의 스승을 제외하고는 다 같이 물러나야 하지 않나요?”
물귀신 작전을 펼치자 날 놀려대던 후궁과 황친들의 미간이 동시에 좁아졌다.
“하긴. 그러면 일이 너무 커지겠네요.”
그래도 모른 척 덧붙이고서 나는 쑥스러운 척 웃었다.
그러자 원수인 7황자가 참지 못하고 또 끼어들었다.
“제일 시험을 못 본 게 열셋째지. 열셋째가 꼴찌인데 왜 다른 사람들이 같이 스승을 바꾸어야 하지? 너무 과하군!”
안타깝게도 7황자는 권력을 휘두를 때만 무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권력도 황제 앞에서 눌려 있으니, 오늘은 7황자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전하. 저는 13황자의 스승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걸요. 대부분의 이국사들은 스승이 된 지 몇 해가 지난 분들이잖아요. 당연히 같은 선에서 비교하면 안 되지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꾸하자 7황자의 얼굴이 멍든 것처럼 시퍼렇게 변했다. 그러고서 7황자가 더 입을 열려는 찰나.
“되었다.”
대화를 지켜보던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요 이국사의 말이 옳다.”
7황자는 입을 움찔거렸으나 결국 제자리에 도로 앉았다.
나는 제자를 보았다. 제자는 내 쪽을 보고 있진 않았으나 턱을 괸 채였고 시선은 초점이 없어 보였다.
관심 없는 척하고 있지만, 저 자세는 필시 내 말을 다 귀담아들은 자세였다. 귀가 내 쪽을 향하고 있잖아.
그때 제자가 아예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를 마주 보다가 슬쩍 손을 흔들자 제자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새삼 꽃구경이라도 하려는 듯 만개한 꽃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도 가장 아름다운 건 제자였다. 나는 제자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오늘 일이 그의 마음에 효과가 있었을까? 내가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을까?
* * *
요요화의 참견은 황후에게는 확실하게 나쁜 인상을 주었다.
“요요화. 참으로 여우 같구나.”
꽃놀이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황후는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궁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왜 그러십니까?”
“요요화가 꼬리를 쳐대니 폐하가 13황자를 눈여겨보기 시작했어.”
“13황자 전하께는 별 관심을 안 두고 계시던데요?”
시험 내내 황후의 뒤에 서 있던 상궁은 의아해서 되물었다. 황제는 요요화를 두둔했을 뿐이었다.
그조차도 잠깐이었고 곧 황자들을 모두 꾸짖었다. 이후 꽃놀이 이야기로 바로 넘어갔다. 13황자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분명 13황자에게도 관심을 두었다. 폐하의 눈만 보아도 알지.”
“5황녀 전하와 8황녀 전하 칭찬이나 더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상궁이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는 황자들이 멀쩡하면 황녀들을 염두에 두지도 않을 거다.”
이를 갈며 말한 황후는 돌아서서 화사하게 핀 꽃나무를 노려보았다.
“더 싹이 크기 전에 요요화와 13황자를 처리해야 할 텐데.”
“다른 황자님들을 먼저 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른 황자들은 이미 튼튼한 나무나 다름없지. 하지만 13황자는 이제 막 자라는 묘목이다. 다른 황자들을 처리하고 나면 다음엔 13황자가 튼튼한 나무가 되어 있을 게 아니냐. 그러니 가장 약한 13황자부터 처리해야지.”
“소인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보문 공주는? 그 용정이란 자 소식은 아직 없느냐?”
* * *
꽃놀이가 끝난 뒤. 태감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뒷정리를 하면서도 13황자를 힐긋거렸다.
13황자가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에서 꽃대만 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는 13황자의 태감이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따라다니고 있었다.
바구니가 꽃대로 수북해지자 태감이 싹싹하게 물었다.
“전하. 이걸로 방을 치장해 드릴까요?”
13황자의 태감 심하가는 농땡이를 심하게 부렸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 앞에서까지 그러긴 어려웠다.
“아니.”
“아. 혹시 황후마마께 드릴 건지요?”
“스승님께 가져다드리고 와라.”
심하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참으로 사이도 좋으십니다.”
“…….”
“3황자 전하께서도 며칠 전에 이국사께 꽃다발을 선물하셨지요. 꽃다발도 예쁘지만 전하의 꽃바구니가 좀 더 특별해 보입니다. 이국사께서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전하.”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가던 화려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