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황제가 되어도 문제 못 돼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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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황제가 되어도 문제 못 돼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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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황제가 되어도 문제 못 돼도 문제
2023.02.13.
“제가 왜 그분들한테 꽃다발을 주는데요?”
나는 3황자의 말에 황당해서 물었다. 제자는 내 제자이고 월무궁에서 매일 보니 꽃다발을 주어도 된다. 게다가 사적으로 우리는 정혼한 사이니까.
하지만 내가 3황자나 황제에게 꽃다발을 주면 다들 뭔 일인가 싶어 고개를 기웃댈 터였다.
“스승님은 셋째 형님을 좋아하시니까요.”
물론 그건 그렇다. 하지만 난 이미 마음을 접었다. 게다가 마음을 접지 않았을 때도 나는 이 마음을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안 줄 거예요. 제가 집에 가져가서 제 방에 둘 겁니다.”
제자는 코웃음을 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 꽃다발을 도로 가져갔다.
“이건 이제 제 겁니다. 스승님이 도로 가져가시면 제 물건을 가져가는 게 됩니다. 황족의 물건을 가져가고 싶으신지요?”
치사한 놈! 진짜 치사해! 툭하면 신분과 지위로 핍박하는구나!
나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하지만 그가 저렇게 말하는데 꽃다발을 도로 가져갈 수는 없었다.
“전하께선 큰 오해를 하고 계시는데요.”
“무슨 오해요.”
“제가 사모하는 건 전하이지, 3황자님이 아니에요.”
“…….”
“그러니 앞으론 어디서든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단호하게 말하고서 대문을 넘어갔는데, 제자는 또 따라왔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꽃다발을 받았으니 값을 해야지요.”
“필요 없다니까요?”
“사모하는 제자가 바래다 드린다는데도 싫으신지요?”
이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나는 다리를 크게 벌려 성큼성큼 나아갔다.
하지만 제자는 내가 아무리 빨리 걸어가도 내 걸음을 따라왔다. 그는 딱 한 걸음 떨어져서 내 옆에서 함께했다.
나는 일부러 제자 쪽은 쳐다도 보지 않으려 애썼다.
‘어?’
그러다가 측문 부근에 도달했을 즈음. 뜻밖에 아는 얼굴이 보여 멈춰서야 했다.
‘용정?’
회귀 전 용정은 13황자의 측근 중 하나였다. 유동백, 운귀, 청양 이런 이들과 더불어 13황자가 아끼는 이였지.
그런데 용정이 벌써 이 시기에 나타나나? 회귀 전에는 몇 해 더 있다가 왔지 않나? 13황자가 이번 삶에는 정말 속도를 빨리 내는구나.
대단하단 생각을 애써 누르면서, 나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용정이 여기 있어서 놀랍긴 하지만 ‘지금’의 나는 용정의 얼굴을 몰라야 했다. 제자가 바로 옆에 있으니 더더욱.
‘왜 황후와?’
하지만 용정의 뒤에서 나타난 얼굴을 보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고 말았다. 용정과 함께 걸어가는 건 황후의 상궁이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저 사람이요.”
“……저 사람이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같이 가는 사람이 황후마마의 상궁이잖아요. 누군데 황후의 상궁이 직접 맞이하러 나온 걸까요?”
상궁의 존재는 나를 놀라게 했지만, 동시에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주었다.
“글쎄요. 제자도 처음 보는 사람이라 모르겠군요.”
제자는 용정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하지만 황후가 누구를 데려오건 제자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안 그런가요, 스승님?”
“황후마마는 저랑 전하를 싫어하시잖아요. 그러니 신경 쓰이는 거지요.”
아주 작게 속삭이고서 위를 올려다보니, 제자가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황후마마 이야기 꺼낸 건 비밀이에요.”
나는 입에 손을 대고서 속삭였다. 사실 방금 내가 한 말은 정말로 남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제자가 황후를 싫어하는 걸 아니까 말한 거지.
“그러지요.”
제자는 가볍게 대답하고서 문가로 계속해 걸어갔다. 용정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용정을 제자가 부른 게 아닌가? 왜 용정이 황후를 만나는 거지?’
* * *
“이쪽으로 오시지요.”
황후의 상궁이 문을 열자 용정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황후는 탁자 앞에 우아하게 앉아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화음의 황후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가까이 다가온 용정이 인사하는 동안에도 황후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용정을 빠르게 위아래로 살폈다.
용정 역시 웃으면서 인사했으나 그녀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황후는 용정이 처음 온 남의 나라 궁궐에서도 전혀 주눅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자 만족해 웃었다.
“이렇게 먼 길을 와주어 고맙네.”
상궁이 눈짓하자 궁녀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상궁은 문을 닫고 용정에게 동그란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앉게.”
황후가 허락하자 용정은 의자에 앉았다. 상궁은 황후의 뒤쪽으로 가서 섰다.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던가? 바다를 건너야 했을 텐데.”
“다행히 뱃멀미가 없는 체질이었습니다. 운이 좋았지요. 탁 트인 바다를 보니 오히려 좋더군요.”
“사람을 보냈으니 보문 공주도 곧 이쪽으로 올 거라네.”
“공주 전하께서는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본궁도 그러길 바라고 있지. 직접 물어보게.”
황후와 용정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화기애애했다.
상궁은 속으로 안도했다. 용정은 이름난 전략가이기는 했으나 외국인이었다. 게다가 상궁은 전략가란 이들은 머리가 빼어나고 굴리기를 잘하니, 하나같이 속이 구렁이 같을 거란 편견도 가지고 있었다.
황후가 용정을 불러들인 이유는 제자가 그를 원한단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황후와 용정이 말이 잘 통하는 듯하니 이제야 안심이었다.
“용 대인!”
차 한 잔을 다 마셨을 무렵 보문 공주가 나타났다.
“공주 전하. 그간 무고하셨는지요.”
용정은 일어나면서 보문 공주에게 친근하게 인사했다.
“당연하지. 용 대인이 내 부탁을 들어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 그 덕택에 체면이 살았어. 오느라 힘들진 않았는가?”
보문 공주는 보란 듯 황후 앞에서 그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이후 궁녀들이 음식을 차려 왔고, 세 사람은 느긋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식사했다. 용정은 말을 잘해서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질 않았다.
황후는 용정이 마음에 들었다. 13황자를 떠나서 그는 무척 머리가 깊은 인재로 보였다.
게다가 화음의 대신들은 머리가 좋아도 이곳의 풍속에 익숙해서 황녀를 황제로 삼는 데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용정은 황녀들에게 좀 더 자유로운 나라 출신이라 그런 거부감도 덜해 보였다.
궁녀들이 다시 간식을 들여왔다.
“실은 제가 이번에 공주님의 청을 듣고 바로 온 건 황후마마의 명성을 흠모해서이기도 하지만, 좀 쉬고 싶어서랍니다.”
“쉬고 싶다니?”
“저는 이른 나이에 관직에 올라 내내 그곳에 있었지요. 하지만 태월은 평화로운 나라이고, 전략가가 활동할만한 사건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전략가로서의 일보다는 다른 부서 일을 주로 하거든요. 그래서 당분간 쉬면서 미래를 생각해보고 싶었답니다.”
황후는 포도를 먹다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런 사정을 알고 용정을 부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용정의 이야기를 듣자 일이 아주 잘 풀리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당분간 여기 머물러 보는 건 어떤가?”
“여기요?”
“손님용 거처를 내어주지. 오늘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자네에게 배울 게 많겠어. 자네는 안목이 넓으니 황자 황녀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거 같은데…… 대접은 섭섭하지 않게 후하게 해주겠네.”
* * *
나는 13황자의 배웅을 받아 퇴궐했으나 아무래도 용정이 신경 쓰였다. 이 때문에 이각 정도 지난 후. 다시 입궐했다.
물론 이번에는 월무궁으로 가지 않았다. 나는 황후의 거처 부근으로 가서 커다란 나무 근처 의자에 앉았다.
거기서 휴식하는 척 나무에 머리를 대고 눈을 반쯤 감고 있기를 한참.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황후궁 대문이 열렸다.
‘보문 공주?’
용정을 보려고 기다린 건데. 뜻밖에도 대문 밖으로 나온 건 용정과 보문 둘이었다.
상궁이 그들을 배웅하자, 용정과 보문은 나란히 어딘가로 걸어갔다. 대화는 들리지 않지만 퍽 사이가 좋아 보였다.
‘보문 공주가 용정을 황후에게 소개해 준 건가? 대체 왜?’
회귀 전에는 황후와 보문 공주는 사이좋지 않았다. 그런데 왜 지금은 황후가 보문 공주를 쫓아내지 않지? 보문 공주는 왜 황후에게 용정을 소개해 주는 거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자니 용정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한참을 그러다가 돌아보니 용정은 가버리고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뱉었으나 속은 갑갑했다.
‘회귀 전과 모든 게 똑같지 않단 건 알았지만. 설마 이런 것도 영향을 받나? 회귀 전 제자의 측근이 황후와 가깝지 지내다니…….’
문득 궁금해진다. 이러다 제자가 자기 인재를 황후에게 뺏겨 황위 다툼에서 지면 어쩌지?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제자가 황제가 될 테니까. 제자는 회귀를 여러 번 한 대단한 사람 아닌가.
그러나 생각해보니, 제자는 회귀를 여러 번 했는데도 막판까지 5황녀와 싸웠다. 회귀 전과 회귀 후의 상황은 계속해서 달라졌다.
게다가 내게는 없는 기억이지만, 제자는 계속 내가 자기를 죽였다고 했다. 제자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란 거였다.
‘제자가 황제가 못 되면 이번엔 난 제자가 아니라 제자의 정적 손에 죽게 될 거야.’
특히 황후가 상대라면 더 그렇다. 황후는 제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도 그를 경계하고 구박하고 눌러댔으니까.
‘아…… 미치겠네. 제자한테 가서 용정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나? 아닌가. 이미 제자는 이 소식을 듣고 대비하고 있으려나?’
제자가 황제가 되어도 목숨이 위험하고, 제자가 황제가 못 돼도 목숨이 위험하다니. 어떻게 이렇게 억울한 경우가 있을까!
* * *
그 시각.
요씨 가문에 모여 있는 요요화의 숙부 셋은 신중하게 대화하는 중이었다.
맏이인 요 가주는 입궐하고 없기에 형제끼리 모인 곳에는 그들 세 사람뿐이었다.
차남인 요가원은 며칠 전 요요화와 대화한 내용을 두 동생에게 들려주며 차갑게 말했다.
“형님은 늘 자식들을 오냐오냐하며 길렀지. 그 덕택에 아이들이 자신감은 넘치는데 너무 거만하더라. 내가 좋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꼬아서 나쁘게 받아들이다니.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
삼남인 요묘화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은 애초에 가주가 될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형님이 우리처럼 둘째나 셋째라면 몰라도 가주 아닙니까. 그러면 후계자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았어야지요. 형수님이 아들을 못 낳으니 첩이라도 들여서 서자라도 보아야 했습니다.”
요가원이 흥 코웃음 치며 비웃었다.
“형님은 공처가라 형수님 말에 꼼짝도 하지 못하지. 그 덕에 우리 가문만 위태롭게 되었어.”
정실부인 외에도 집에 들인 첩이 셋이나 되는 요가원은 첩을 한 명도 두지 않고 금실 좋은 형님 부부가 꼴 보기 싫었다.
막내인 요도련이 손을 휘저었다.
“첩을 들이니 마니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형님들은 첩을 들여도 마찬가지로 딸뿐이지 않습니까.”
막내인 요도련 역시 첩을 들이지 않고 아내와 금실이 좋았기에, 둘째와 셋째는 막내가 장남을 편든다고 생각해 눈살을 구겼다.
요도련은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서 말했다.
“중요한 건 형님이 아들을 못 낳은 게 아닙니다. 가문이 통째로 남에게 넘어가게 생긴 거지요. 그렇다면 통째로 가문 재산이 그자들에게 넘어가기 전에 가산이라도 정리해 우리끼리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 네 형제가 공평하게 똑같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