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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개나리 13황자 (102/159)


102화. 개나리 13황자
2023.02.20.



“남과 다름없는 사람한테 가산은 넘기면 안 되지요. 그렇다고 해서 남이 아닌 사람한테 넘기는 것도 이상하죠.”

“그렇지!”

내 말에 아버지는 바로 동의했다. 반면 숙부들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남이 아닌 사람이 우릴 말하는 건 아니겠지?”

첫째 숙부가 날카롭게 물었다. 다 알아들었으면서 뭘 물으세요……라고 하면 안 되겠지.


“할아버지가 가꾼 재산은 숙부들이 분가할 때 할아버지께서 나누어 주셨잖아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다음에도 유산을 똑같이 나누었고요.”

그런데 어디서 사기를 쳐?


“지금 가문에 남은 재산은 아버지가 아버지 몫으로 받아서 가꾼 재산이에요, 숙부님들. 그런데 그걸 한 번 더 나누자고 하시면 안 되지요.”

“어디서 말버릇이…….”

둘째 숙부는 내게 삿대질을 하려고 손을 올리다가 주춤주춤 내리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요화야. 하지만 가문에 묶인 재산은 대대로 가주가 관리하는 거라 우리는 그건 받지 못했단다. 네가 뭘 모르나 보구나.”

“모를 리가요.”

하지만 가문에 묶인 재산은 현금이 아니었다. 보통은 땅, 산, 건물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가문 일을 할 때 사용되었다.

후손들은 가주나 소가주라고 해도 가문에 묶인 가산은 함부로 처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건 우리 아버지가 처리할 수 없는 가산이잖아요. 가문 일을 하는 데 쓰는 거니까요.”

“그렇지. 하지만 그 가문이 통째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생겼는데 그게 중요하냐 이 말이다.”

막내 숙부가 조급하게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문에 묶인 재산은 우리가 함부로 손대기 어렵다니까. 요씨 가문을 아예 박살 낼 셈이야?”

아버지와 숙부들의 싸움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내내 가주로 지내오며 가문을 보호하는 일을 해온 아버지와, 그러지 않은 숙부들은 기본적인 사고관 자체가 달라 보였다.

나는 탁자 앞 의자에 앉아서 계속되는 싸움을 구경했다.


‘한동안 계속 시끄럽겠네.’

 

* * *

그날 밤. 나는 한밤중에 집을 나와서 궁궐로 갔다. 문 앞을 지키는 병사는 평소처럼 패를 보이자 입궐 사유를 묻지 않고 들여보내 주었다.

관료들은 아침에만 입궐하는 게 아니었다. 밤에 입궐해 일하는 관리도 있고, 당직을 서는 관리도 있고, 궁궐에 기거하는 이의 초대를 받아 오는 이도 있었기에 밤중에도 입궐은 가능했다. 위급한 시기에는 안 되지만.

나는 곧장 대화원으로 걸어갔다.

곧 있을 제자의 생일에 나는 개나리를 보는 제자를 그리기로 했다. 예전에 제자랑 내가 같이 대화원을 거닐었을 때 본 제자를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가문 일로 머리가 아파서인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이에 화구를 챙겨서 직접 들어온 것이었다.


‘이쯤이던가?’

다행히 회귀 전의 기억까지 가진 터라 대화원 지리는 꽤 익숙한 편이었다. 나는 헤매지 않고서 제자와 둘이서만 봄꽃을 구경한 곳을 찾아냈다.


‘어?’

그런데 일전에 내가 앉은 그 커다란 바위 명당에 이미 선객이 있었다. 하필 제자였다. 제자는 그 바위에 혼자 걸터앉아 이제는 초록색으로 변한 개나리를 보고 있었다.


‘그냥 갈까? 아는 척하기 싫은데.’

고민하다가 나는 좀 떨어진 나무 앞에 서서 종이를 꺼냈다.

얇은 나무판에 종이를 끼워 넣은 다음 한 손으로 그걸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자가 노랗게 피어난 개나리를 보는 모습을 건성으로 그렸다.

일단은 위치 정도만 잡아 주고 나중에 집에 가서 제대로 그릴 생각이었다. 이러면 집에서도 그릴 수 있겠지.

하지만 그림을 다 그려놓고 나니 좀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넓은 개나리 화원에 혼자 있는 제자는 그림 속에서 외로워 보였다. 진짜 제자 말고. 그림 속 제자 말이다.

내가 제자를 너무 처량한 위치에 집어넣었나? 두 사람인 쪽이 좀 더 구도가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제자 옆에 나를 슬쩍 집어넣었다.

나를 그려 넣는다고 해도 그냥 동그라미 달린 작대기를 그린 다음 거기에 ‘나’라고 써둔 것뿐이지만. 음. 그래도 이렇게 하고 나니 화면이 좀 깔끔해졌네.


 
……하지만 쑥스러워. 제자도 나와 자기가 나란히 서서 꽃구경하는 그림을 보면 소름이 돋겠지? 역시 지워야겠다.


“왜 지우려 하십니까?”

그러나 내 이름에 까만 칠을 하기도 전 누군가 먼저 물었다. 기겁해서 뒤를 돌아보니 제자가 서 있었다.


“언, 언, 언제 오셨어요?”

오는 줄 전혀 몰랐는데! 기겁해서 묻자 제자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승님이 제 뒤에서 은밀하게 돌아다닐 때부터였답니다.”

뭐야? 그러면 내가 그림 그리기 전부터 이미 알았단 거잖아!


“그런데 왜 아는 척 안 하셨어요?!”

“또 뭘 하려는 건가 살폈거든요.”

“또라니요?”

제자는 설명하는 대신 내 그림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다급히 그림을 아래로 내려 뒤로 감추었다.


“왜 감추시는지요?”

그야 여기에 우리가 같이 있는 모습을 그렸으니까! 젠장. 아깐 난데없이 제자가 나타나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아주 민망한 상황이잖아.


“그냥요.”

“제자를 그린 게 아니십니까? 그럼 제자에게도 보여주셔야지요.”

“전하를 그린 게 아니에요.”

나는 뒤로 반 걸음 성큼 물러났다.

제자는 한쪽 눈썹만 위로 올리며 물었다.


“그럼 셋째 형님인가요?”

또또또!


“왜 자꾸 3황자 전하를 끌어들이세요?”

“그러면 제자에게 그림을 보여주셔도 될 텐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랑 제자가 같이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도 민망했고, 지금 그림 솜씨도 민망했다. 지금은 그냥 선만 그었다고!


“스승님. 제자가 꼭 명령이라고 말씀드려야 그림을 주실까요?”

내가 계속 버티자 제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만 부드러웠지 동공은 아주 밤중의 호랑이처럼 번뜩거렸다.


“고작 이런 일로 명령하신다니. 참으로 체면도 없으십니다.”

화가 나서 항의했으나 제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스승님 곁에서 제자가 어찌 체면을 세우겠습니까.”

“좀 세우세요!”

“그림을 주시지요.”

나는 그를 쏘아보았으나 별다른 수는 없었다. 마지못해 그림을 건네자 제자는 그림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때요?”

나는 제자가 아직 그림이 어설퍼 보인다는 데 주목하기를 바라며 물었다. 그가 나와 자기가 같이 왜 있냐고 물어보지 말기를.


“왜 커다란 작대기가 스승님이고 조그만 작대기가 제자인지요?”

“!”

“스승님이 조그맣고 제자가 키가 훨씬 크니 반대여야 하지 않을까요?”

이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해야 해 말아야 해? 나는 종이를 얹어둔 나무판을 집어 당겼다.


“주세요!”

제자는 꿈쩍도 하지 않고 계속 평가했다.


“스승님과 제자가 나란히 있군요. 개나리는 활짝 핀 걸 보니 일전에 스승님과 제가 화원에 갔을 때 일인가 봅니다. 알아보기 쉽게 그리셨군요. 스승님과 저도 이렇게 그려두니 참으로 사이 좋은 작대기 한 쌍 같군요.”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이 눈치도 없고 나쁜 제자놈! 얼굴이 열이 확 올라왔다.

제자가 평가를 마친 뒤에야 나는 가까스로 손을 내렸다. 제자의 얼굴이 코앞에 있어서 도로 올려야 했지만.


“얼굴 치우세요!”

“왜 얼굴을 가리십니까?”

“전하가 절 그렇게 쳐다보시니까요!”

“일의 전후가 바뀌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얼굴을 가리고 계시기에 왜 그러나 싶어 제자가 살핀 것이지요.”

이 뻔뻔하기 그지없는……!


“알았으니까 얼굴 치우세요!”

“치웠습니다.”

나는 씩씩거리면서 손을 내렸다가 제자의 얼굴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걸 보고 도로 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자가 내 얼굴을 먼저 가리는 바람에 소용없었다. 오히려 나는 제자의 손을 내 손으로 감싼 꼴이 되어버렸다.


“아이구 망측해라!”

놀라서 펄쩍 뛰자 제자는 그제야 손을 치우고 웃어댔다.


“뭐가 망측하단 겁니까.”

“전하와 제가 정혼한 건 맞지만 아직 부부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덥석덥석 막…… 막…… 그러면 안 됩니다!”

“제자의 손을 잡은 건 스승님이십니다.”

어이가 없어라! 너무 어이가 없으니 코로 숨도 쉬어지지 않는다. 내가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제자가 웃으며 물었다.


“스승님은 평생 사내로 살아오셨지요. 그런데 다른 사내들과 손 좀 잡는다고 그렇게 놀라십니까?”

“사내로 살아도 다른 사내 손을 잡을 일은 드문데요.”

“그건 그렇군요.”

제자가 방심한 틈에 나는 제자에게서 나무판을 얼른 가져왔다. 그걸 꽉 끌어안자 제자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스승님이 그렇게 나오시니 완성되었을 때가 더 기대됩니다.”

“전하껜 안 보여드릴 거예요. 기대하지 마세요.”

제자는 나무판 끄트머리를 슬쩍 만졌다.


“제자에게 주시려 그린 그림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런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진심이다. 원래는 그에게 줄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제자에겐 저잣거리에서 풍뎅이 그림이나 사서 줘버릴 거다.


“그럼 뭐에 쓰시려고 그리셨는지요?”

“제 방에 걸어두고 볼 거예요.”

나는 아주 단호하고 깔끔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스승님은 제 그림을 벽에 걸어두고 보시는군요.”

“!”

하지만 제자의 말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얼굴에 열이 올라와 그를 쏘아보자 제자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내가 품에 안은 나무판을 툭툭 두어 번 두드리며 당부했다.


“생일날에 제자에게 주실 거지요? 기대하겠습니다, 스승님.”

“안 드릴 거라니까요.”

“그러면 방에 건 다음 제자를 초대하여 주시지요. 제대로 걸렸나 확인하러 가겠습니다.”

나쁜 제자놈. 날 죽이지 않을 땐 놀려 먹기만 하는구나. 아주 알차게도 복수하는 인간이야.


“스승님.”

또 왜. 또 뭐!


“계속 여기 계실 건지요?”

“아니요. 이제 집에 갈 거예요.”

나는 나무판을 겨드랑이에 끼우고서 얼른 인사했다. 그러고서 대화원에 난 길을 따라 걷자 제자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왜 따라오세요?”

“바래다 드리지요.”

“또 놀리시려고요?”

제자는 대답 대신 얼른 가자고 손으로 길을 가리켰다.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 보니 멀지 않은 곳에 7황자가 보였다.

물론 7황자가 이쪽을 보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지나가는 도중에 그가 날 눈치챌 수도 있었다.

결국 난 순순히 제자와 함께 걸어갔다.


‘7황자 때문에 일부러 바래다주려는 건가? 아니겠지?’

 

* * *

요씨 가주의 첫째 동생인 요고원은 화가 나서 술을 퍼마셨다.


“후계자도 제대로 못 낳아서 딸아이를 고생시키고 모두를 속였으면 부끄러운 줄 알고 조용히 있기라도 해야지.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술병이 비었는데요, 나리. 한 병 더 드릴까요?”

“됐다!”

요고원은 괜히 점소이에게 소리 지르고서 탁상에 엎드렸다.


“가산, 가산? 웃기고 있네. 남 손에 넘어가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형님은 분명 가산을 혼자 독차지할 속셈인 거야. 젠장.”

요화가 가주가 된다면 자신의 사촌들에게 박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생판 남이 가주가 된다면 가까운 가족끼리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가산이고 뭐고 남길 것 없이 모조리 분해해 나누어 가지는 게 훨씬 좋지 않나? 요고원은 가문 재산은 손댈 수 없단 형과 조카의 말이 핑계로만 들렸다.

술집 손님 하나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새 술병을 가지고 요고원에게 다가갔다.

다음날. 그 사람은 보문 공주에게 그 일을 알렸다. 그 사람은 보문 공주가 요씨 가문을 살피도록 뿌린 정보원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렇군. 가산 문제를 둘러싸고 요 가주의 동생이 불만을 품었단 말이지.”

보문 공주는 이 일을 황후에게 얼른 보고하며 물었다.


“이런 정보를 ‘우연히’ 들었는데요, 황후마마. 황후마마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내가 무얼 알겠나. 게다가 그건 요 가문의 집안일인데 아무리 황실이라고 해도 나서서 관여하기 어렵지.”

황후는 인자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다가 돌려서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군. 요 이국사가 남장한 건 사주 때문이거든. 그런데 아직도 소가주 자리에 있는데다 가산 일로 싸움까지 나다니. 남들이 가주 자리 때문에 남장한 거라고 오해하기 십상 아닌가. 이 일을 언관이 알게 된다면 자칫 일이 복잡해질까 염려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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