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의도하지 않은 충신 (110/159)


110화. 의도하지 않은 충신
2023.03.20.



 


“요 공자는 취향이 이상하네요.”

오랜 기다림 끝에 청양이 결론을 냈다.


“겉보기와 다르군요.”

청양은 내게 책 두 권을 돌려주었다.

나는 얼른 책을 받아 끌어안았다. 쑥스러운 흉내도 멈추지 않았다.


“…….”

그래도 꺼림칙한 부분이 남았나. 청양은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청양이 책방 주인에게 손을 까딱였다.


“주인장.”

책방 주인은 불쾌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청양은 불러 놓고서 시선은 내 쪽에 고정한 채 물었다.


“여기 서책이 총 몇 권이어야 하지?”

이 집요한 자식! 내가 더 숨긴 게 있나 확인하려는 거구나. 이렇게까지 해야 해?

책방 주인은 대답해주려는 듯 장부를 펼쳤다. 거부해 이 사람아, 귀찮다고 거부해!

하지만 책방 주인이 거부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나는 얼른 끼어들어 말했다.


“내가 금화 세 개를 주고 가져간 이 책들을 제외하고 말해주게.”

장부를 넘기던 책방 주인의 손이 멈칫했다. 그가 내 신호를 알아들었을까?

나는 책으로 입을 가리고서 책방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책방 주인은 이제는 느릿하게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내가 책방 주인에게 금화 세 개를 부른 건 아무래도 저 주인장이 날 싫어하는 것 같아서였다.

내가 볼 때 저 주인장은 새벽에 가게 문을 연 내가 괘씸해서 일부러 눈치 없는 척 굴고 있었다.

그래서 신호를 보낸 것이다. 금화 하나에 책 한 권을 가져가기로 했지만, 금화 세 개를 주겠다. 즉, 난 책 세 권을 챙겼다. 알아서 모른 척해다오! 라고.

책방 주인은 입을 다물면 책 전부를 팔고 금화 세 개를 추가로 얻지만, 입을 잘못 열면 책 전부를 팔고 금화 한 개만 얻게 된다. 부디 그가 계산을 잘 해주기를!


“보자……. 아. 여기 있네요.”

장부 끝을 펼친 책방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이만사천육백이십여섯 권 있어야 합니다.”

“좋아. 그 숫자가 제대로 있다면 서책을 모두 사지.”

“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

나는 슬쩍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으나 청양이 붙들었다.

잠시 뒤. 청양은 자기 부하들을 불러왔다.

부하들은 나누어서 서점 안 책이 총 몇 권인지 헤아리기 시작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책방 주인에게 슬쩍 물었다.


“새벽에 잠을 깨워서 미안하네. 화는 좀 풀렸는가?”

책방 주인은 교묘하게 웃으며 안경을 올렸다.


“그럼요. 공자님이 아니어도 어차피 저 나리가 깨웠을 텐데요.”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그에게 금화 세 개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책방 주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금화 세 개를 서랍 안에 챙겨 넣었다.

그래도 안심하지 않고서, 나는 청양의 부하들이 책을 세고 수를 더하는 걸 계속 지켜보았다.

한참 뒤. 청양의 부하 하나가 대표로 청양에게 말했다.


“이만사천육백이십여섯 권이 있습니다.”

“확실하냐.”

“네. 세 번씩 확인했습니다.”

부하가 대답하자 청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제야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피곤한데 그만 들어가 보시지요, 요 대인.”

그 태도에 화가 나기보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이야.

물론 아직 의심을 벗은 건 아니다. 하지만 청양은 내가 아직 13황자가 찾는 책을 못 찾았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럼 이만.”

나는 책방 주인과 청양에게 밝게 인사를 하고 먼저 빠져나왔다.

그 사이 새벽하늘은 불그스름하게 변해가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파란 부분도 보였다. 어느새 아침이 된 것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앞으로만 걸어갔다.


‘어쩌지?’

당장은 위기를 모면했지만 이건 그야말로 임시 방책일 뿐이었다. 청양은 내가 수상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 게 아니라, 내가 13황자가 찾는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여기게 되었을 뿐이다.

청양은 제자에게 날 서점에서 만났다고 보고하겠지. 제자는 내가 어떻게 그 증좌에 대해 알고 있나 생각하다가 알게 될 것이다. 나도 회귀했다는 걸.


‘안 돼.’

내가 회귀한 걸 알게 된다면 제자는 날 바로 죽여버릴 것이다. 자기가 황제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곧장 죽여버릴 거다.


‘청양의 입을 막아야 하는데…….’

 

* * *

고민 끝에 나는 그 마을을 떠나 집으로 가는 대신 곧장 외숙부를 찾아갔다.


“애기씨, 자주 오시네요?”

외숙부 집으로 들어가자 한 어멈이 아는 척하며 인사했다. 돈을 받고 입양 이야기를 꺼낸 어멈은 보이지 않았다.


“전에 그 사람은? 왜 가장 마지막에 왔다는 어멈.”

“집에 일이 있다고 그만뒀지요. 왜 그러세요?”

“아니. 안 보이기에.”

내가 신고할 거라고 하자 그만두고 떠났구나. 차라리 다행이다. 내가 지금 외숙부 집에 찾아온 건 제자가 몰라야 하는 일이니까.


“외숙부는 집에 계셔?”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오셨답니다. 수사를 받느라 얼굴이 반쪽이 되셨어요.”

“지금 봬도 되나?”

“피곤해하실 텐데요. 급한 일인가요?”

피곤하기로 치자면 아마 외숙부보다 내가 더 피곤할 거다.


“많이 급한 일이야. 외숙부 심부름을 했거든.”

“심부름이요?”

어멈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외숙부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나는 외숙부를 만날 수 있었다. 외숙부는 수척해져 있었으나 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래, 요화야. 네가 내 심부름을 했다고.”

들어가자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외숙부가 물었다.


“내가 시키지 않은 심부름을 했다 하니 분명 중요한 일이겠지.”

나는 품에서 서책을 꺼내 외숙부에게 내밀었다.


“이걸 황제 폐하께 드리면 외숙모의 오라버니가 풀려날 거예요.”

외숙부는 서책을 넘기려다가 흠칫해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니?”

“일단 보세요.”

더 읽어보라고 권유하자 외숙부가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중간중간 내용을 확인한 외숙부는 서책을 내려놓았다. 외숙부는 당혹스럽단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어디서 가져온 거니?”

“외숙부의 ‘심부름’이요.”

“형님?”

“아니요. 외숙부요. 제 눈앞에 계신 외숙부요.”

외숙부는 서책 위를 손으로 쓸어 보다가 물었다.


“외부엔 그렇게 이야기해야 한단 거구나.”

“네. 그걸 황제 폐하께 드리면 역모로 몰리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 서책을 어디서 났는지 누군가 묻거든, 외숙부가 제게 ‘급히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고 해주세요. 이런 상황에 외숙부가 수도 밖으로 나가면 도주로 보일까 봐 제게 시켰다고 둘러대시면 될 거예요.”

나도 무공을 배웠지만 몇 년 바짝 배웠을 뿐이었다. 반면 청양은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다.

몇 년 무공을 배우고 그만둔 내가 청양보다 강할 리가 없다. 당연히 청양을 힘으로 막을 수 없다. 그렇다고 청양을 설득할 자신도 없다.

그래서 고민 끝에 아예 비밀을 비밀이 아니게 만들기로 한 것이다.


“요화야.”

외숙부는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네 말대로 할 테니 알려다오. 대체 이런 정보를 어디서 들은 게냐?”

“출처를 말씀드리긴 곤란해요, 외숙부. 그걸 대가로 들은 정보니까요.”

외숙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사내가 아니라 너무 안타깝구나. 네가 가주가 되었다면 요씨 가문은 훨씬 번성했을 거다. 너는 이국사에서 그치지 않고 더 높은 관직까지 올라갔겠지.”

“…….”

“하다못해 좀 더 권세가 좋은 황자와 혼인하기라도 한다면…….”

외숙부는 계속 잔소리를 할 태세였다.


“외숙부. 죄송한데요, 지금 빨리 가셔야 해요.”

나는 외숙부 말을 끊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촉했다.


“벌써?”

“한 시진 사이에 외숙모 오라버니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고요.”

나는 일부러 극단적인 예시를 들었다.

외숙부는 따라서 급하게 일어났다.


“꼭 제가 알려드린 대로 말씀하셔야 해요.”

나는 외숙부에게 거듭 당부하고서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서 집으로 돌아가니 시비인 월섬은 반쯤 울면서 날 맞이했다.


“소가주님, 갑자기 어디 가셨던 거예요? 나가서 온종일 돌아오지 않으셔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급하게 심부름 좀 다녀온다고.”

“심부름이요?”

“외숙부 심부름을 다녀왔거든.”

나는 월섬에게도 외숙부에게 한 말을 그대로 하고서 내 처소로 돌아갔다.

늘 조용하던 마당에서는 외사촌 자매가 둘이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언니! 같이 놀아!”

두 아이는 날 보자 반갑게 외쳤다.

나는 손을 빠르게 젓고서 얼른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 밤새 못 잤거든, 월섬아. 네가 찾아오는 사람들은 알아서 차단해줘.”

 

* * *

식사도 거르고 아침까지 계속 자고 있자니 문밖에서 고함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언니! 일어나봐!”

“언니, 일어나봐요!”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조용히 지낸다며! 얌전하다며!


“언니! 밖을 봐봐!”

나는 억지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마당에 한가득 쌓인 보화와 그 주위를 둘러싼 외사촌 둘이었다.

내 처소로 들어오는 문은 활짝 열려 있고, 태감들이 두 손으로 보물을 들고 날라오고 있었다.


‘저게 뭐야? 왜 우리 집에 태감들이 있어?’

 

 
그 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자니 다른 태감들을 지휘하던 태감이 얼른 달려와 인사했다.


“일어나셨군요, 요 대인. 요 가주님께서 요 대인을 깨운다고 하시는 걸 제가 괜찮다고 말렸답니다.”

태감의 설명은 충분하지 못했다.


“공공. 저 보물들은 뭔가?”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궁금한 건 ‘왜 태감이 날 깨우지 않았는가’가 아니라 ‘왜 태감이 여기 있나’였다.


“어제 요 이국사의 외숙부께서 황제 폐하께 귀한 서책을 바치며 요 이국사 이야기를 하셨답니다. 요 이국사께서 폐하를 위해 한밤중에 먼 곳까지 내려가 서책을 가져왔다지요.”

나는 당황해서 태감을 쳐다보았다.

내가 한밤중에 먼 곳으로 가서 서책을 가져온 건 맞다. 하지만 그게 왜 폐하를 위한 일로 둔갑했지?

난 날 위해서 간 거였고 대외적으로는 외숙부를 위해서 간 거였다. 왜 갑자기 황제가 나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군요.”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서 멍하게 중얼거리자, 태감이 다 안다는 듯 웃고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그 서책을 가져왔다고 해서 금서를 본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라 하셨습니다.”

“예?!”

“아, 걱정하지 마시지요. 하지만 반대되는 서책을 가져왔으니 반역할 의도가 없었단 건 참작하겠다 하셨으니까요. 해서 마우종을 감옥에서 풀어주되 삭탈관직하고 평생 관직에 오르는 걸 금하는 거로 일을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그렇군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왜 내가 상을 받는 건지……?


“폐하는 참으로 자비로우십니다.”

이해가 안 돼도 일단 황제에겐 아부해야 한다.

본능적으로 아부를 하고 나자 태감이 히죽 웃었다.


“폐하께선 요 이국사께서 폐하를 안심시킬 서책을 목숨을 걸고 가져온 데 참으로 감동하셨습니다.”

누가 목숨을 걸었단 거야?


“과한 칭찬이십니다.”

그래도 일단 겸양하자 태감은 허공을 손으로 짚어가며 조목조목 말했다.


“누구라도 이런 일엔 함부로 엮이기 싫어하지요. 서책의 존재와 위치를 알면서도 요 이국사의 외숙부는 실제로 떠나지도 못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요 이국사께서는 아니었지요. 폐하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한밤중에 먼 거리를 이동하였습니다. 호위조차 없이요. 이건 참으로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행동입니다.”

태감이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 사이 다른 태감들은 물건을 모두 옮겼다.


“하나같이 귀한 물건들이니 잘 간직하시지요, 요 대인.”

태감이 물러나자 마당에 서 있던 외사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다가왔다.


“우와 언니 진짜 멋있다!”

“언니, 폐하가 언니한테 상도 주는 거야?”

외사촌들뿐만이 아니었다.

부모님과 숙부들도 이게 무슨 일인가 궁금했던지, 다들 내 마당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폐하께서 네게 또 상을 내리셨니?”

어머니가 감탄하자 둘째 숙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요화가 전에도 상을 받았나요 형수님?”

“그럼요. 자주 보내신답니다.”

어머니가 살짝 과장해 자랑하자 숙부들이 나를 대단한 사람 보듯 쳐다보기 시작했다.

사촌들은 내가 고관이라도 된 양 넋을 놓았다.


“누나는 정말로 대단해. 여인인 게 드러난 뒤에도 폐하께 능력을 인정받다니.”

그 낯부끄러운 칭찬을 들으며 나는 어머니에게 입 모양으로 항의했다. 아니, 어머니. 두 번째 받는 거잖아요.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외숙부 소식은 들으셨나 봐. 안색이 밝아지셨네.’

그보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난 그냥 제자의 의심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왜 갑자기 내가 충신이 되어버린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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