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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황제가 총애한 두 사람 (115/159)


115화. 황제가 총애한 두 사람
2023.04.06.



 


‘필첩이 없어!’

집에 돌아와 세필과 필첩을 꺼내려고 보니 붓은 있는데 필첩이 없었다.

다급히 옷을 갈아입고서 벗은 옷을 여기저기 두드려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없어! 없다고!’

공포심에 숨이 막혀왔다. 나는 침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디에 떨어뜨린 거지?


‘암살자한테 습격당하기 전까진 있었어. 여기저기서 기록을 했으니까. 그럼 암살자를 피해 달아날 때 떨어뜨렸나? 황제를 만난 후? 아니면 그 은퇴한 숙수 집? 황궁에 돌아가서? 옷 갈아입다가?’

“소가주님. 식사 올릴까요?”

문 너머에서 시비인 월섬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외삼촌네 일이 잘 해결되어서 외사촌들이 돌아가자 월섬은 한결 마음이 편해진 듯했다.

나는 벗었던 옷을 도로 입고 문을 열었다.


“나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

“네? 방금 들어 오셨는데요?”

“뭘 떨어뜨리고 왔어. 중요한 물건.”

“예?!”

나는 곧장 집을 나가 황제를 만난 거리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내가 다닌 길을 그대로 되짚어 올라갔으나 암살자를 만난 곳에도 암살자를 만나 도망친 길에도 필첩은 없었다.

나는 은퇴한 숙수의 집 문을 반쯤 넋이 나가 두드렸다. 여기에도 없다면…….


“네, 누구세요?”

문을 열어준 사람은 숙수의 손녀였다. 손녀는 문을 열었다가 날 발견하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낭자. 혹시 제가 여기 있을 때 필첩을 떨어뜨리지 않았나 싶어서요.”

“그런 물건은 없었어요.”

손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기에 대답하려고 보니 저만치 뒤에서 은퇴한 숙수가 나를 시정잡배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얼른 그 집을 떠났다. 저절로 입에서 괴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젠장. 황궁에서 옷 갈아입을 때 떨어뜨렸나?’

어쩌면 길거리에 떨어뜨렸는데 누군가 보고 주워갔을지도 모른다.

황제가 그 필첩을 줍는 게 나을까 길거리의 누군가가 줍는 게 나을까.


‘다 별로야.’

만약을 대비해서 필첩에는 단어만 나열해 두긴 했다. 단어도 조금 꼬아서 나열해 두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게 뭐야?’ 생각할 수준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면 필첩을 가진 사람은 ‘이게 이 뜻이구나!’라고 알 수 있을 터였다.


‘아아…… 미치겠네.’

해가 질 때까지 떠돌아다녔지만 결국 나는 필첩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소가주님. 나리께서 부르십니다.”

이 와중에 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나를 따로 부르기까지 했다.


“알았어.”

내키지 않지만 아버지 방으로 찾아가자, 아버지가 책상 앞에 신중하게 앉아 있다가 물었다.


“보문 공주가 널 해치려 했다면서?”

황제가 대놓고 공주를 추궁하더라니. 역시 하루도 안 되어서 일이 다 퍼져나갔구나.


“예.”

숨길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순순히 긍정하고 빈 의자에 앉았다.


“폐하께서 보문 공주의 궁인들을 어느 마을에 풀어 놓고 거기에 암살자들을 푸셨다더라.”

내가 자리에 앉자 아버지가 찻잔 하나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암살자를 풀다니요?”

“나쁜 시도를 했지만 네가 살아남았으니 똑같이 기회를 주신다고. 반나절 동안 암살자에게서 살아남으면 살려서 추방하겠다 하셨다지.”

황제는…… 진짜 가차 없구나. 13황자랑은 다른 방향으로 성질머리가 장난이 아니다.


“가능할까요?”

“살릴 생각이 있다면 적당히 겁만 줄 이들을 보내실 거고. 아니라면…….”

아랫사람으로 살아남기는 정말 힘들구나.

보문 공주가 내게 해코지를 할 때마다 공주의 궁인들도 한 몫을 보탠 건 안다.

전에 공주가 내게 자기 물건을 잃어버렸단 누명을 씌우려 할 때도 공주의 궁녀도 옆에서 같이 내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했다. 그 궁녀는 이미 쫓겨났지만.

공주도 싫지만 그들 역시 싫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감정과 별개로 그들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공주가 하겠다고 하면 그냥 따라야 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주범인 공주는 그 정도로 처벌받지 않겠죠?”

“그렇지. 공주를 그렇게 처벌했다가는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

“공주는 처소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두고 태월 사절단에게 정식으로 항의한 다음 그쪽으로 서신을 보냈다. 공주가 ‘황자비’를 죽이려 했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그래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세게 나가고 있구나. 공주 궁인들이 받는 벌보다는 약하지만 나를 이국사가 아니라 황자비로 칭해서 일을 키워 버리네.


“앞으로는 행동에 조심하고 몸을 사려야겠다 요화야.”

아버지는 걱정스럽게 당부하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내 잘못은 아니지만 이 일로 태월과 사이가 삐끗하게 되면 그걸 내 탓으로 돌리는 신하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에게야 이국사 하나의 목숨보다는 나라의 평화가 더 중요할 테니까.


“조심할게요.”

 

* * *

요화는 필첩과 보문 공주 사건에 시달리느라 13황자에 대해 잠시 잊어버렸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13황자에게도 고스란히 들어갔다.

운귀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화려는 개나리 그림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이번 목표는 부황인가 봅니다 스승님.’

“폐하께서 이국사를 좀 유달리 챙기시는 듯합니다.”

운귀는 그런 화려를 보며 염려했다.


“괜찮을까요? 신하는 자신을 총애하는 군주에게 마음이 가기 마련입니다. 폐하께서 이국사를 그렇게 아끼신다면 이국사는 폐하를 결코 배반하지 못할 겁니다.”

“글쎄. 워낙 배반이 특기인 사람이라.”

화려는 중얼거리고서 그림 속 스승을 쳐다보았다.

말은 차분하게 했지만 그 역시 생각이 복잡했다.

스승도 그처럼 회귀했을까. 스승이 회귀했는지에 따라 변수가 많아졌다.


‘회귀한 거라고 해도 이전의 기억뿐이겠지만…….’

고민하던 화려는 미친개를 투입하기로 했다.

회귀하는 동안 황제가 기존 후궁 외 새로 들인 후궁 중에서 대단히 총애한 이는 딱 둘이었다. 하나가 스승 요요화였고 다른 하나가 3황자의 정혼녀였다.

3황자의 정혼녀는 화려가 겪은 많은 삶 동안 대부분 3황자의 정혼녀로 머물렀고, 아무 사고도 치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번. 그 정혼녀가 황제의 후궁이 된 적이 있었다.

그 정혼녀는 겉보기에는 온순하고 상냥했고 실제로도 매번 조용히 지냈기에, 화려는 늘 3황자와 그 정혼녀를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그 정혼녀가 후궁이 되었을 때도 삶의 많은 변수 중 하나로만 여겼고 설빈처럼 조용히 지낼 거라 여겨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혼녀는 후궁으로 들어오자마자 돌변해서 그야말로 미친 듯이 후궁을 휩쓸고 다녔다.

결국 그녀는 내궁의 승리자가 되었고 마지막에 13황자와 겨루는 상대가 되었다.

13황자가 본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박쥐 같은 자가 스승 요요화라면, 제일 미친 인간이 그 정혼녀였다.

심지어 그때 스승이 손잡은 인간도 그 정혼녀였다. 그야말로 박쥐와 개가 한 패가 되어서 지상과 하늘에서 날뛰는 형국이니,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모른다.

이후 13황자는 그 정혼녀가 황제의 후궁이 되지 못하도록 모든 변수를 차단하려 애썼다.


‘독은 독으로 막는다.’

스승과 그 여자가 동시에 후궁이 된 적은 없다. 하지만 둘 다 후궁이 되었을 때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황제는 이번 삶에서도 요요화에게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스승이 회귀했다면 그의 원한에 대해서도 알 터. 황제의 총애를 이용해 그를 견제하려고 들 수도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좀 번거로워지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황제가 스승에게 둔 관심을 돌릴 상대를 다시 데려다 두는 수밖에.

그 여자는 황제의 관심을 자신에게 단단히 붙들어낼 수 있었다. 또한 회귀한 스승이 겪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부황이 셋째 형님 혼담 이야기를 아직 안 꺼냈나?”

 

* * *



“3황자 전하 혼담을 구하는 공문이 내려왔단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식사할 때였다.

나는 아직도 필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식사를 하다가 사레가 걸릴 뻔했다.


“네?”

“3황자 전하 말이야.”

어머니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참 선하고 다정한 분이신데. 몸이 약해 시집오려는 규수들이 없으니 결국 혼담 기준을 낮추었다고 하시는구나. 이렇게 해서 신부를 구해봤자…….”

어머니는 말끝을 흐리셨다. 3황자가 곧 죽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딸을 시집보내는 가문이 사위를 진심으로 아낄 리가 없었다.

백이면 백 흑심을 품고 3황자가 죽은 뒤의 일을 계산해 딸을 보내는 것일 터. 어머니는 이걸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3황자는 어머니 쪽 먼 친척이기도 하니까.


“어쩌겠소. 딸을 아끼는 사람들은 딸이 과부가 되는 게 싫어서 정혼 하지 않을 테고, 혼처가 아쉽지 않은 명문가에서는 미래가 없으니 3황자와 정혼 하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말을 꼭 그딴 식으로 해야 해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이후 두 분이 투덕거리는 동안 나는 재빨리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어머니의 염려와 달리 3황자의 정혼녀가 될 여인은 아주 상냥하고 청초하고 아름답고 현명한 여인이었다.

그 여자의 부모님에게 꿍꿍이가 있는지 없는지는 나도 모른다. 회귀 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죽기 직전까지 그 여자는 3황자의 정혼녀였다. 게다가 그녀는 얼굴도 못 보는 3황자에게 매번 직접 만든 요리나 직접 수놓은 옷감을 보내는 등 정성을 다했다.

나도 몇 번 그 여자를 본 적이 있는데, 질투하기도 힘들 만큼 착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 여인을 의심하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3황자가 곧 죽을 몸으로 좋은 여인의 앞길을 가로막게 생겼다고 혀를 찼다. 다들 그 여인을 가엾어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곧 죽을 거라 말했던 3황자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3황자보다 건강한 황자와 황녀들이 다 죽거나 유배되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나보다도 더 오래.

* * *

며칠 뒤. 3황자의 정혼녀는 내가 아는 대로 예씨 가문에서 정해졌다.

사주단자를 교환할 때 사주 전문가가 예혜 낭자는 3황자를 구할 사주라며 감탄했단 이야기가 이번에도 흘러들어왔다.

나는 여전히 필첩을 찾지 못했기에 거기에 집중하며 그 이야기를 애써 모른 척 흘려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평소처럼 평범하게 입궐해 수업을 진행했다.

오늘 예혜 낭자가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러 입궐한다지만 나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날씨가 좀 덥군요. 초여름이라 그럴까요.”

그런데 수업 도중 내가 부채질을 하고 있자니 제자가 뜬금없이 말을 걸었다.


“스승님. 같이 산책할까요?”

나는 부채질을 멈추고 제자를 쳐다보았다.

책방에서 청양을 마주친 이후 나는 최대한 몸을 사리고서 제자를 대하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농담도 평소보다 훨씬 줄였다. 제자 역시 이전만큼 내게 농을 걸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산책? 무슨 꿍꿍이지?


“어디로요?”

“글쎄요…… 황궁 뒤쪽에 작은 폭포가 있지요. 그곳은 어떠신지요?”

딱히 거부할 명분이 없어서 나는 제자와 함께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게 되었다.


“보문 공주 사건은 들었습니다, 스승님.”

“네에…….”

“많이 놀라셨겠지요.”

“네. 좀 놀랐습니다.”

“부황이 구해 주셨다니. 참 시기적절했지요.”

“…….”

그런데 불편한 대화를 나누며 폭포 부근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폭포 앞에 사람들이 한가득하였다. 게다가 무슨 일이 있었던지 다들 사색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제자가 내 소매를 잡더니 살짝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달려가던 태감이 제자를 알아보고 달려와 다급히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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