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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질투하는 중 (117/159)


117화. 질투하는 중
2023.04.13.



 
3. 예씨. 12. 1. 남아.

황제는 필첩에 새겨진 글자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요 대인의 필첩이지요?”

송 태감이 황제 곁에 찻잔을 내려두며 물었다.


“그래.”

황제가 필첩을 덮자 송 태감은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필첩을 돌려주지 않으실 겁니까?”

황제가 필첩을 받은 지도 시일이 꽤 지났다.

그 사이에 3황자의 정혼녀가 뽑혔고 사고가 일어났고 결국 황제의 후궁으로까지 들어왔지 않던가.

그러나 여전히 필첩은 황제의 손에 있었다.


“필요하면 찾아가겠지.”

황제는 심드렁하게 대답하고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송 태감은 더 질문하지 않았다.


“차향이 좋군.”

“혜빈께서 혼수로 가져온 차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필첩 겉장을 쳐다보았다. 필첩 안에는 이상한 단어들만 가득했다.

처음에 황제는 이게 낙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다. 그러나 3황자가 예혜와 정혼한 뒤. 필첩을 펼친 황제에게 ‘3. 예씨’라는 글자가 유독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마치 ‘3황자가 예씨 여자와 정혼한다’고 써둔 것 같아서였다.

그 뒤부터는 ‘12, 1, 남아’란 글자도 신경 쓰였다.


‘우연인가.’

 

* * *



‘말이라도 꺼내 봐야겠어.’

어느 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불 안에서 뒤척이다가 결심했다.

그놈의 필첩 때문에 신경 쓰여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일단 황제를 찾아가서 필첩에 대해 말이라도 꺼내 봐야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필첩에 쓰인 내용이 이상하게 여겨질 테니, 어차피 부딪쳐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가는 게 낫겠지.

이에 다음날. 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입궐해 황제를 찾아갔다.


“요 대인 오셨군요.”

송 태감은 필요 이상으로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폐하께 여쭐 말씀이 있는데. 잠시 뵐 수 있겠나?”

나는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요. 기뻐하실 겁니다.”

송 태감은 묘하게 웃으며 말하더니 혼자 서재로 들어갔다.

잠시 뒤. 송 태감이 밖으로 나와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고맙네.”

나는 송 태감에게 인사를 하고서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막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책상 앞에 앉은 황제가 아니었다.


‘예혜 낭자?’

예혜 낭자는 책상 곁에 서 있다가 나를 보자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혜빈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여기 예혜 낭자가 있을 줄 몰라서 당황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서 차례로 인사했다.


“저자는…….”

예혜 낭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열자 황제가 내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13황자의 이국사다. 13황자와는 정혼한 사이지.”

13황자와 정혼했다면서 사내 복장을 하고 있으니 의아할 것이다.

하지만 예혜 낭자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곧 차분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요요화입니다, 마마.”

“반갑네.”

회귀 전 나는 예혜 낭자를 좀 부러워했다. 3황자와 혼인할 사람이니까. 그런데 후궁이 되어 다시 만나다니…….

사람 일은 정말 조금만 틀어져도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구나.


“혜빈 마마께서 계시는 줄 몰랐습니다, 폐하. 신은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어쨌든 황제가 후궁과 즐겁게 어울리는데 내가 끼어들 수는 없다. 나는 눈치껏 인사하고서 뒤로 물러났다.


“괜찮다.”

하지만 내가 나가려고 들자 황제가 단호하게 말하더니, 예혜 낭자에도 지시했다.


“혜빈은 그만 나가거라.”

아니, 내가 나가면 되는데.

하지만 황제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다. 나는 민망해서 고개를 숙였고 예혜 낭자는 말없이 인사를 올렸다.


“제가 나가면 되는데요.”

예혜 낭자는 순순히 나갔지만 나는 문이 닫히자 민망해서 살짝 항의했다.


“혜빈은 먼저 와 있었고 더 나눌 말도 없었다.”

황제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간단하게 말하고서 물었다.


“그래. 요 이국사는 짐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 왔지?”

“실은 폐하. 일전에 폐하께서 신을 구해 주셨을 때 제가 물건 하나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런가?”

“예. 옷을 갈아입을 때 떨어뜨린 듯해서요. 혹시 상궁에게 물어봐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러지.”

황제는 흔쾌히 대답했다. 상궁이 이미 주었다던가, 자기가 발견했다던가 하는 말은 없었다.


‘모르는 척하는 건지 진짜로 안 주운 건지…….’

“한데 그게 무슨 물건이지?”

“예?”

“어떤 물건인지를 알아야 찾기 쉬울 게 아니냐.”

“아. 필첩입니다.”

말을 하고 나니 조금 불안해서 나는 일부러 덧붙였다.


“아무거나 막 생각난 단어를 적어두는 낙서용 필첩이라서요. 별 내용은 없는 겁니다. 하지만 너무 막 적은 거라서 누가 볼까 부끄러워서요.”

“그렇군.”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말을 들어줄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이상 조를 수는 없었다.


“황송합니다, 폐하.”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서 이제 나가겠단 신호를 보냈다.


“…….”

하지만 황제는 나가라고 하는 대신 책상에 쌓인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내 쪽으로 건넸다.


“폐하?”

받아 들긴 했지만, 감히 펼치지 못하고서 쳐다보자 황제가 평이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이국사를 한 번 부르려 했다. 태월 사절이 보문 공주 일을 논하러 여기에 오기로 했거든.”

나는 놀라서 두루마리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 그렇군요.”

“짐은 태월에 자네를 황자비로 소개했다. 그래야 보문 공주를 더 강하게 처벌할 수 있거든.”

“예?”

“하지만 자네가 아직 황자비가 아닌 건 여기 오면 누구라도 알 수 있겠지. 그러니 자네는 태월 사절을 맞이할 때 함께 있도록 하라.”

“예에?”

“자네와 열셋째가 ‘이미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라는 걸 그 사절 앞에서 보이도록 하란 말이다.”

나는 실제로 반 정도 두루마리를 떨어뜨렸다. 얼른 주섬주섬 두루마리를 도로 감아 챙겼지만 마음은 여전히 쿵쿵 뛰었다.

제자랑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인 척 굴라고? 그것도 태월 사절 앞에서? 제자랑 나란히 앉아서 하하호호 할 상상만으로도 등골에서 소름이 올라오는데!


“오늘이 수업 날이던가?”

“예에…….”

“잘됐군. 자네가 열셋째에게 전하고.”

멍한 정신으로 인사를 재차 올리고 나가려는데, 황제가 또 날 불렀다.


“아. 하나 더.”

이번엔 또 뭔데!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돌아보자 황제가 씩 웃으며 물었다.


“곧 생일인데 가지고 싶은 건 없나?”

“송구하옵니다, 폐하. 신은 폐하의 나라에서 살 수 있단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황제와 더 얽히는 건 사양이다. 나는 얼른 아부로 사양한 뒤 서재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속은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고민거리를 덜러 갔다가 더해서 나오는구먼.

필첩은 여전히 행방불명인데 태월 사절 앞에서는 무서운 원수와 부부 행세를 해야 한다. 제자 몰래 살짝 찾아온 건데 황제는 제자에게 심부름까지 시켰다.

아이고 머리야.

* * *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오셨군요.”

수업을 위해 월무궁 서재로 들어가자 제자가 오래간만에 먼저 말을 걸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내게 다가오기까지 했다.

뭐 좋은 일이 있었나. 근래에 본 얼굴 중 가장 표정이 가벼워 보였다.


“폐하를 잠시 뵙고 와서요.”

내 말을 듣자마자 가볍던 표정이 순식간에 무거워졌지만.


“…….”

아무 말도 안 하네.

나는 얼른 내 자리로 달아나면서 빠른 속도로 말했다.


“태월 사절이 온대요, 전하. 폐하께서 태월 사절이 오면 저와 전하가 ‘이미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처럼 보여야 한다고 당부하셨어요. 보문 공주를 강하게 처벌하기 위해서 그쪽엔 저를 황자비라고 소개해 두셨대요.”

나는 서랍에 얼굴을 파묻고서 마구 뒤지는 척했다.


“…….”

하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젠장.

살금살금 고개를 들자 내 책상 바로 앞에 선 제자가 보였다.


‘아. 진짜. 나 저 인간 저기 서 있을 줄 알았어.’

그의 이마에 ‘나 화났다’라고 쓰여 있었다.


“왜 화나셨어요?”

제자는 내가 황제를 찾아가서 화가 난 거다. 하지만 모른 척 묻자 제자가 내 책상에 짚었던 손을 떼면서 나를 불렀다.


“스승님.”

“네, 전하.”

“스승님. 나의 스승님.”

“네, 전하. ……나의 전하?”

나의 전하란 말을 하자마자 섬뜩하게 올라갔던 그의 입매가 잠시 꿈틀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나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휙 돌아섰다.

그대로 문가로 걸어간 제자는 거기서 머뭇거리다가 도로 돌아왔다.

도로 돌아왔을 땐 표정이 다시 서늘하게 바뀌어 있었다. 뭐야. 표정 교체하고 왔나.


“스승님. 제자가 충고 하나 하겠습니다.”

“새겨듣겠습니다.”

“스승님. 황자비가 될 뻔했다가 후궁이 된 사람이 실제로 나왔습니다. 아시지요? 혜빈. 예씨 가문 혜 낭자 말입니다.”

“알지요. 전하랑 폭포에 갔다가 봤잖아요.”

제자는 ‘좋아 똑똑하네’라고 말하듯 칭찬하는 미소를 한 번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싹 정색하며 명령했다.


“선례가 생겼으니 더욱 조심해야지요. 스승님께서도 앞으론 혼자서 부황을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남들에게 괜한 오해를 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오해라니요…….”

“형님들과 정혼한 여인들은 다 같이 모일 때가 아니면 폐하를 따로 뵙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승님은 폐하와 둘만 보는 일이 너무 잦군요.”

무슨 억지야.


“그 낭자들은 관료가 아니잖아요, 전하. 하지만 신은 관료이니 이런저런 일로 폐하를 뵙게 됩니다.”

“다른 이국사 누가 폐하와 독대합니까.”

“…….”

물론 다른 이국사들은 나처럼 황제와 독대할 일이 없긴 하지. 나도 회귀 전에는 황제와 독대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뭐. 내가 놀러 간 적은 없지 않나. 황제가 먼저 부르거나 아니면 꼭 필요할 때만 갔는데.


“대답.”

내가 입술을 꾹 닫고 있자 제자가 서늘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하지만 전하. 전 필요할 때만 폐하를 찾아갔습니다. 게다가 집무실로 갔어요. 아무도 오해하지 않을 거예요.”

“보문 공주 일로 부황께서 스승님을 많이 챙기셨지요.”

“!”

“사람들이 부황이 스승님을 총애한다고 합니다. 혜빈의 선례가 생겼으니, 부황과 스승님이 가까이 지내면 사람들은 몹쓸 상상을 할 겁니다.”

그 몹쓸 상상은 네가 하고 있다 이 제자야.

나는 발끈해서 다시 물었다.


“꼭 가야 할 일이 생겼을 땐 어쩌지요? 제가 폐하께 오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날 싫어하니 저러는 거겠지만 그래도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꼴이 너무 짜증 났다.


“제자와 같이 가면 됩니다.”

오늘 같은 일은 너랑 못 가니 그러지, 이 나쁜 제자야. 네 앞에서 내가 미래 일을 적은 필첩 일을 얘기해야겠어?


“스승님. 대답하세요.”

입을 다물고 버티자 제자가 내 양 볼을 누르고서 명령했다.


 
순순히 대답할까 싶었지만, 그 흉흉한 눈빛을 마주하자 한층 더 화가 났다.

나는 누가 내 머리를 통통통 두드리면 분노가 쑥쑥쑥 자라난다.

제자 앞에 납작 엎드려야 한단 걸 알면서도 나는 아주 약간 반항하고 말았다.


“왜 이리 질투하는 것처럼 구십니까. 남이 보면 제가 전하를 연모하는 게 아니라 전하가 절 연모한다고 오해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십니까.”

나도 알아. 네가 그런 의도 아니라는 거 안다고. 자꾸 시비를 거니까 한 말이다.


“당연히 투기하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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