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받아도 미움 못 받아도 미움 (119/159)


119화. 받아도 미움 못 받아도 미움
2023.04.20.



“…….”

제자가 그냥 받아먹기만 해도 고마울 것 같다. 좀 먹어라.

그러나 제자는 계속 나를 미쳤냐는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손이 슬슬 민망해져서 나는 그를 향해 최대한 간절한 눈빛을 쏘았다. 제자가 유일하게 내게서 예쁘다고 표현하는 그 눈빛 말이다.


“전하. 전하아.”

목소리도 일부러 끌면서 말하자, 마침내 제자가 젓가락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덤덤하게 인사하고서 내가 덜어준 반찬을 입에 넣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먹어주는구나.

나는 부끄러운 척 웃고서 다시 내 젓가락을 집었다. 이 정도 했으니 후궁들에게 ‘나는 황제 폐하한테 관심 없음’ 표시는 됐겠지.


“스승님.”

그런데 이번에는 제자가 먼저 나를 불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반찬을 집더니 내 쪽으로 가져왔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같이 분위기를 맞춰주려는구나 싶어서 나는 얼른 내 앞접시를 내밀었다. 하지만 젓가락은 접시가 아니라 내 입 앞으로 왔다.


“아 하시지요.”

뭐라고? 나는 놀라서 제자를 쳐다보았다. 제자가 젓가락을 살짝 흔들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 하시지요.”

그가 다시 권하는 소리에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그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진심이야?

그러나 제자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젠장!’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제자는 내 입안에 반찬을 넣어 주고서 빙그레 웃었다.


“이러니 좋군요.”

내가 반찬 씹는 걸 바라보며 제자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필시 약 올리는 거였다.


“입에 맞으시는지요?”

“네. 맛있네요…….”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고 있어서 나는 뱉지도 못하고 음식을 삼켜야 했다.

제자에게 독살당한 탓일까. 이 음식엔 독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제자가 준 음식이 배에 넘어가자 괜히 속이 끓는 느낌이 났다.


“이것도 드시지요.”

하지만 제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른 음식을 덜어 또 내 입 앞에 가져갔다. 마지못해 입을 벌리자 제자는 음식을 넣어 주고는 내 등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꼭꼭 씹어 드세요 스승님.”

물론 제자가 권하지 않아도 거의 오십 번은 씹고 있었다.


“그럼요.”

억지 미소를 따라 짓고서 나는 주위를 슬쩍 살폈다.

나와 제자가 서로 음식도 먹여주고 과하게 애정을 표현해서인가. 황후와 원비의 말에 날카로워졌던 분위기가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


“13황자와 요 이국사는 정말로 사이가 좋군요. 혼인하면 금실 좋은 부부가 되겠습니다.”

순비가 웃으면서 농담하자 다른 후궁들이 따라 웃을 정도까지는 풀렸다.

안도해서 슬쩍 원비를 보니 원비는 손 아래에서 빠져나간 사냥감을 보는 표정이었다.


‘조심해야겠어. 황후와 원비는 황제가 나한테 이성적으로 관심을 보인다고 고의로 몰아가려 하고 있어.’

 

* * *

식사하는 내내 몇 번 더 미약한 공격이 오갔다. 첫 입궁 때의 소란 때문인지, 아니면 바로 빈으로 올라가서인진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예혜 낭자가 공격을 많이 받았다.

나를 향한 공격은 처음뿐이었지만, 날이 선 대화를 들으며 식사하고 있자니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활발한 선안이 9황녀 옆에서 얌전하게 식사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전하.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게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나는 제자에게 살짝 말하고서 일어섰다.


“같이 가겠습니다.”

“뒷간 가는 거예요.”

반쯤 몸을 일으키던 제자는 얼른 도로 앉았다.


“왜 앉으세요? 같이 안 가세요?”

그 모습에 잠시 득의양양해서 놀렸지만, 제자의 표정을 보고 나는 얼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러고서 뒷간에 들렀다가 잠시 근처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벌고 있을 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져 다가가 보니 예혜 낭자가 혼자 우두커니 서서 허공에 붓질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예혜 낭자는 팔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이국사.”

나를 보자 그녀가 또박또박 내 신분을 읊었다.


“혜빈 마마.”

그 얼굴을 보는데…… 나는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다. 3황자를 향해 순수하고 올곧은 연심을 보내던 회귀 전 그녀를 떠올리니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

내가 3황자와 혼인할 수 없다면 예혜 낭자처럼 좋은 사람이 곁에 있길 바랐는데…….


 


“이국사? 왜 우는가?”

3황자 생각을 하니 너무 감정적으로 변했나 보다.


“송구합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서 얼른 눈가를 닦았다.

하지만 회귀 전 행복해하던 예혜 낭자와 지금 후궁들에게 눈칫밥을 먹는 예혜 낭자를 비교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우는 건 3황자 때문이지만.


“혜빈 마마. ……힘내세요.”

“?”

“제가 늘 응원하고 있습니다. 혹시 신이 도와드릴 일이 있거든 찾아오시고요.”

 

* * *

박쥐가 미친개에 붙으려 한다. 화려는 요화가 뒷간에 간다며 나가서 돌아오지 않자 배가 많이 아픈가 싶어 찾으러 나왔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화려가 본 건 뒷간에 간 스승이 아니라 미친개 앞에서 얼쩡대는 스승이었다.

미친개가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자신을 탐색하는데도 눈치 없이 혼자 엉엉 우는 꼴을 보자 화려는 목 뒤가 욱신거렸다.


“스승님.”

화려는 상황을 지켜보는 대신 바로 다가갔다.

화려가 다가오자 미친개가 고개를 돌렸다.


“13황자?”

화려는 미친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짓고서 어리둥절해 있는 스승을 살짝 잡아당겼다.


“스승님이 혜빈 마마께 실례를 저지르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아까 술을 조금 마시더니 취하신 듯해서요. 어디 가셨나 했더니 여기로 오셨네요.”

회귀 전 스승은 미친개와 별 접점이 없었다. 스승은 회귀 전 기억이 있더라도 미친개의 실체를 모를 것이다.

스승이 불만스럽게 화려를 올려다보았다.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술에 취했다니 억울한 듯했다.


“스승님. 제자를 알아보시겠는지요?”

화려는 모른 척 얼굴을 맞추고 물었다. 그는 두 손으로 양 볼을 감싸고 일부러 스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스승은 처음에는 버티더니 결국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요. 알아봅니다.”

숙인 고개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입니다.”

화려는 요화의 뺨을 놓아주고서, 미친개에게는 꾸벅 고갯짓으로만 인사했다.


“그럼 혜빈 마마. 계속 산책하십시오.”

미친개와 박쥐는 이미 한번 손잡은 전적이 있었다. 그는 황제가 박쥐를 탐내지 않도록 미친개를 데려온 거였다. 미친개와 박쥐가 또 한패가 되라고 불러온 게 아니었다.

철저히 감시해야 했다. 이 복슬복슬한 박쥐는 언제 어디로 날아가 누구에게 붙을지 몰랐다.

* * *

13황자와 요 이국사가 서로 꼭 붙어서 티격태격하면서 사라진다. 예혜는 그 뒷모습을 고개를 기울여 쳐다보았다.


“진짜 사이좋네요.”

그녀를 따라 입궁한 사가 궁녀가 괜히 툴툴거렸다.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저게 뭐래요. 우리 마마도 잘하면 3황자 전하와 저렇게 지내실 수 있었는데…….”

궁녀는 툴툴거리다가 아차 싶어서 예혜를 보았다.


“죄송해요 마마.”

“뭐가?”

“그게…… 그냥요.”

“괜찮아.”

예혜는 덤덤하게 대답하고서 자신의 손에 쥔 붓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걸 눈치채진 않았겠죠?”

붓 안에 독환이 든 걸 아는 궁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눈치챌 게 어딨어.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예혜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예혜는 13황자와 요 이국사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떼지 않고 계속 쳐다보는 모습은 묘하게 섬뜩했다. 눈동자만 움직이는 조각 같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그 방향만 쳐다보세요?”

“신경 쓰여서.”

“13황자요? 아니면 이국사요?”

“이국사.”

예혜가 드디어 시선을 손에 든 붓으로 내렸다.


“이상하지.”

그녀의 고개가 반대 방향으로 기울었다.


“왜 날 보면서 울었지? 왜 날 그렇게 가엾다는 듯이 봤을까?”

“그냥 마마가 잘못한 것도 없이 후궁들한테 구박당하는 게 가엾은 게 아닐까요?”

“울었어.”

예혜는 붓을 들어서 이국사가 사라진 방향으로 그림을 그리듯 움직였다.


“왜 울었을까.”

 

* * *



“전하. 전 술을 한 모금도 안 마셨어요.”

제자에게 붙들려 연회장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똑똑하게 그의 거짓을 정정해주었다.


“압니다.”

의외로 제자는 덤덤하게 잘못을 시인했다.


“그런데 왜 혜빈 마마 앞에서 술주정뱅이로 만드세요? 혜빈 마마가 저를 초면에 술주정 부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면 안 됩니까.”

제자는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하고서 반쯤 닫힌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시지요.”

문이 열리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선 제자를 추궁하기 힘들었다.

나는 더 항의하지 못하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혜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면서 잠깐 내 쪽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날 향해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보다가 나는 작은 목소리로 제자를 불렀다.


“전하. 전하.”

“또 뒷간 가실 겁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제자를 부른 건 그에게 예혜 낭자가 얼마나 선한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자는 내가 예혜 낭자와 대화하는 게 불만스러워 보이니 말이다.


“혜빈 마마요. 외로운데 제가 말을 걸어드리니 감동하였나 봐요.”

속삭이면서 나는 눈으로 예혜 낭자 쪽을 가리켰다.

그러나 제자는 예혜 낭자를 보는 대신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요?”

그 시선이 너무 얄궂어서 묻자 제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 *

식사를 끝낸 뒤 드디어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안도해서 가까스로 긴장을 좀 풀려는데 황제가 갑자기 말했다.


“요 이국사와 열셋째는 잠시 남거라.”

그 말에 하나둘 떠나려던 후궁과 황친들이 나와 황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제자가 함께 남기 때문인지 황후가 몰아갈 때처럼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은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짧게 보고 줄지어 나갔다.


‘왜 폐하가 나랑 제자를 남겼지? 태월 사절 앞에서 더 잘하라고 그러나?’

의아했지만 사람들이 다 나간 뒤 나는 제자와 함께 황제 앞으로 다가갔다.

황제가 눈짓하자 송 태감이 문을 닫아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완전히 우리만 남게 되자 황제가 송 태감에게 또 눈짓을 했다.

그러자 송 태감이 이번에는 뚜껑을 연 길쭉한 상자를 어딘가에서 꺼내 가져왔다.

상자 안에는 화려한 머리 장식이 들어 있었다.

황제는 그걸 꺼내더니 제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요 이국사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다. 네가 직접 달아 주거라.”

“!”

일전에 황제에게 머리 장식을 받았다가 난리가 난 적이 있다.

그 일이 떠오르자 저절로 시선이 제자의 옆모습으로 향했다.

폭포 물줄기 아래에 선 것처럼 온 피부가 오싹오싹해져 왔다. 제자는 표정이 굳어 있었다.

젠장. 내가 저 장신구를 하면 제자는 더 기분이 나빠질 텐데. 부담스럽다고 거절해야 하나?

하지만 황제가 주는 장신구를 거절하면 황제에게 찍힌다. 황제가 주는 선물은 거절하는 것도 힘들었다.

최후의 승리는 제자라지만 제자가 승리하기까지의 몇 년간 최고 권력자는 황제였다. 황제에게 밉보였다가는 제자가 권력을 잡기 전에 쳐내지는 수가 있었다.


‘젠장. 어쩌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