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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뒤늦은 사태 파악 (120/159)


120화. 뒤늦은 사태 파악
2023.04.24.



 


“받지 않을 게냐.”

제자가 장식을 내려다보기만 하자 황제가 비웃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결국 제자는 장식을 받더니 내 머리카락에 달아 주었다.

그의 손이 내 머리카락에 부드럽게 닿았다가 곧바로 떨어져 나갔다.

힐긋 옆을 보니 그는 어느새 표정을 통제하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황제는 내 머리를 쳐다보며 만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드느냐 이국사.”

뒤이어 황제가 또다시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

황제가 독을 내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서 대답했다.


“그럼요. 송구하옵니다.”

“그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황제는 흔쾌히 말하고서 손을 내저었다.


“둘 다 돌아가 보거라.”

나는 꾸벅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서 얼른 그 방을 빠져나왔다.


“살펴 가십시오, 전하. 대인.”

송 태감이 문 앞에 서 있다가 웃는 낯으로 배웅해주었다.

나는 표정을 관리하고 서 있다가, 송 태감이 들어가자마자 13황자의 눈치를 보았다. 제자는 무표정해서 생각을 읽기 어려웠다.

나는 다 같이 식사한 전각을 떠나 한참을 걸어간 뒤에야 제자에게 슬며시 말을 붙여 보았다.


“전하.”

“네.”

나는 뒤를 돌아본 다음 황제가 준 머리 장식을 빼버렸다.

심장이 어마어마하게 떨렸다. 나로서는 아주 용기를 낸 행동이었다. 황제가 준 머리 장식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빼버리다니.

황제가 기분 나쁠 수 있는 행동이었고 황제가 기분 나쁘다면 그게 곧 죄가 되는 세상이었다.


“…….”

제자는 내가 머리 장식을 손에 들고 쳐다보자 잠시 침묵했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용기를 내긴 했지만, 황제가 보낸 사람이 지나가다가 이걸 보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그러고서 다시 제자를 보자 제자가 웃고 있었다. 기분이 풀린 건가?


“스승님. 그렇게 뒤를 계속 쳐다보면 전혀 멋지지 않습니다.”

그가 놀리는 투로 말했다.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전하가 싫어하는 거 같아서요.”

아. 너무 솔직하게 말했다. 어쨌든 아까보단 기분이 좀 풀렸나 봐.


“전 이 머리 장식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머리 장식 말을 할 때 내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내 귀에도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더 크게 말할 용기는 없었다.

제자가 기분이 더 풀리기를 바라면서 나는 머리 장식을 꼭 쥐고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제자가 뜻밖에도 자기 품 안에 손을 넣었다. 뭐 하려고?

제자가 옷 밖으로 손을 빼낼 때는 손에 다른 머리 장식이 들려 있었다. 오늘 내가 입은 옷과 색감을 맞춘 듯한 초록빛 잎사귀 모양 장식이었다.


“뭐예요?”

제자는 내 머리카락을 부드러운 손길로 모으더니 그 머리 장식을 해주었다. 그의 손이 주저하다가 내 머리에서 떨어졌다.

나는 손을 올려서 그의 손이 다녀간 부분을 더듬었다.


“전하? 이게 뭐예요?”

보석 나뭇잎이 내 머리 위에서 펴 있었다.


“생일 선물입니다.”

제자는 덤덤하게 대답하더니 내 소매를 슬쩍 잡아당기고서 놓았다.


“가지요.”

그러더니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화가…… 좀 풀린 건가? 안심해도 되나?

나는 살금살금 제자의 뒤를 좌우로 오가면서 따라갔다. 그의 표정을 오른쪽 왼쪽 다 살피기 위해서였다.

제자는 눈썹을 찌푸리고 쳐다보긴 했지만 막는 대신 계속해서 걸어갔다.


“저…… 전하.”

“안 어지러우십니까.”

“전하. 전하. 제가 말씀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하고 싶은 만큼 하시지요.”

“전하, 저는 전하가 준 장식이 더 마음에 들어요.”

“!”

나는 왔다 갔다 하기를 그만두었다. 제자가 화가 풀린 듯하니 이제는 표정은 살피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차분하게 그의 뒤에서 걸어갔다.

그사이 우리는 월무궁 부근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월무궁에 돌아온 다음에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서재에 딸린 곁방을 빌려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서 부스럭거리면서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였다.


“스승님.”

제자가 문 앞에서 갑자기 나를 불렀다. 나는 옷을 벗어 옆에 두다가 도로 몸을 가리고서 다급히 몸을 숙였다.

혹시 그가 벌컥 들어올까 봐 숨은 것이었으나 제자는 들어오진 않았다.


“스승님께 기억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밖에서 말하려는구나, 싶어서 안도해 옷을 갈아입다가 나는 또다시 동작을 멈추었다. 무슨…… 뜻이지?

난 널 죽일 거다. 죽으면 기억이 사라지니까. 이 뜻은 아니겠지.


“왜, 왜요? 왜요? 왜요?”

“뭘 그리 놀라십니까.”

“제 기억은 소중하니까요.”

제자가 침묵하는 사이 나는 재빨리 옷을 다 벗고 내 원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다가 쫙 소리가 나서 보니 제자가 내게 빌려준 초록색 옷이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으아아! 안 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비명을 질렀으나 그런다고 옷이 돌아오진 않았다.


“하지만 기억이 없으면 우리가 더 가까워질 수 있지요.”

젠장. 여기서 내가 이 옷을 감쪽같이 수선할 수 있을까?


“하지만 스승님께 기억이 있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우리 둘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늘이랑 실이 어디 있지? 바늘, 실? 나는 살금살금 서랍 안을 열어 보면서 바늘과 실을 찾았다.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없어! 그러나 없었다. 열어보지 못한 서랍도 있긴 하지만 황자 방 서랍을 죄다 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젠장!


“스승님.”

옷이…… 새 옷 같았는데…… 두 쪽이…….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시간이 지났는데도 내가 나가지 않아서인가. 밖에서 제자가 문을 두드렸다. 내가 너무 오래 안에 있어서인지 아까 좀 풀린 듯하던 목소리도 가라앉아 있었다.

그 살벌한 목소리를 듣자 무서운 마음이 들어서 나는 나가지도 못하고 끙끙거렸다.


“스승님. 옷을 다 갈아입으셨는지 물었습니다.”

“그게…….”

옷이야 아까 다 갈아입었지. 그 와중에 빌린 옷을 찢어 먹어서 그러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저하기를 한참. 제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서우십니까.”

“예?”

나는 옷을 붙들고서 문을 쳐다보았다. 아니, 제자가 옷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나? 난데없이 저런 질문을 왜 하지?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너무 티를 내시는군요.”

진짜 옷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나?!


“그, 그렇게 티가 났나요?”

“안타깝게도요.”

제자가 문 너머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즐거워서 웃는 소리가 아니라 비웃는 소리였다.


“그렇게 열심히 감추려 애쓰시더니. 왜 갑자기 이리 허술해지셨는지요.”

아니, 저놈이 문에 구멍을 뚫었나. 어떻게 저리 잘 아는 거야?

입을 벌리고 문을 쳐다보고 있자 그가 문을 두어 번 두드리고서 물었다.


“옷은 다 갈아입으셨는지요?”

“그렇긴…… 하지만…… 전하. 화나셨어요?”

“화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생각하는 중이거든요. 스승님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찢은 게 어마어마하게 비싼 옷인가! 나는 두 쪽으로 갈라진 옷을 들어 올려 보았다.

옷 찢어지는 소리만 듣고도 저렇게 화를 내는데 이 꼴을 보면 그가 어떻게 나올까.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막막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나는 일단 책임을 좀 나누어 보았다.


“제 탓이긴 하지만 전하도 좀 책임이 있어요.”

그러나 말을 하면서도 턱도 없는 시도라고 여겼다. 제자가 머리 장식을 어떻게 꽂든 부주의하게 옷을 벗다가 찢은 건 오롯이 나의 책임이었다.


“물론 제게도 책임이 있겠지요.”

그런데 제자는 의외로 자기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수긍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 뜻밖의 말에 놀라서 되묻자 제자가 차갑게 말했다.


“그럼요. 스승님께 앞일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가장 마지막만 중요하겠지요.”

그런데 제자 답변이 좀 이상했다. 앞일? 마지막? 황제가 준 머리 장식 얘기하는 건가? 그렇더라도 말이 좀 꼬이는 느낌인데?

잠시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멍하게 있자니, 천천히 닫힌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경솔하셨습니다, 스승님. 조금 더 버티셔야지요.”

중얼거린 제자가 완전히 문을 다 여는 순간.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자님…….”

그러고서 무어라 변명을 하려는데 제자가 내 손에 들린, 한때 옷이었던 천 쪼가리를 쳐다보더니 도로 천천히 문을 닫았다.


“전하? 왜 도로 나가세요?”

그 난데없는 뒷걸음질에 놀라서 따라 나가 문을 여니 웬걸. 제자는 뜻밖에도 목덜미와 귀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전하?”

화났다기보다는 부끄러워하는 모양새였다. 아니…… 왜?

의아해서 그를 부르자 제자가 턱에 힘을 꽉 주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전하. 저 옷 다 갈아입고 있었어요. 옷 갈아입는 중에 들어오신 거 아니니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혹시 그가 오해라도 했나 싶어서 얼른 설명했으나 붉어진 얼굴은 그대로였다.


“전하?”

재차 부르자 제자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내게 이를 갈며 물었다.


“제가 선물한 옷은 왜 찢으신 겁니까.”

“그게 제 선물이었나요?”

“그럼 그런 옷을 월무궁에서 누가 입겠습니까.”

“저도 남장을 하잖아요. 가끔 전하도-”

“안 합니다.”

“죄송해요…….”

“그래서 옷은 왜 찢은 겁니까.”

제자가 험악한 목소리로 묻는 바람에 나는 완전히 기가 죽어 버렸다. 축 늘어져서 발만 쳐다보고 있자니 머리 위로 제자가 한숨을 내뱉는 게 느껴졌다.


“아까는…… 전하께도 책임이 있다고 말씀해주셨잖아요…… 전하가 꽂아준 머리 장식 때문에 찢어진 거니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을 시도했으나 머리 위로 바람 소리가 더 크게 느껴질 뿐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비장의 무기인 예쁜 눈을 발휘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눈을 커다랗게 뜨자마자 그 위에 커다란 손이 올라왔다. 이 제자놈이 내 눈을 아예 가려버린 것이다.


“전하? 왜 제 눈을 가리세요?”

“스승님이 개입니까 고양이입니까. 왜 절 화나게 해놓고 늘 예쁜 표정을 지어서 빠져나가려 하십니까.”

“죄송해요. 전하. 절대로 일부러 찢은 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머리 장식이 평소보다 길어서 감을 잡지 못했어요.”

싹싹 빌어도 제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다 제자놈이 내 눈을 가린 바람에 그가 제대로 화가 풀리고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견디다 못해서 나는 예쁜 눈이 가려졌으니 예쁜 입이라도 보이기로 하고 입술을 새초롬하게 내밀었다. 입 보고도 화가 풀릴까?


“왜 오리 주둥이를 하십니까.”

“!”

입은 소용 없구나. 충격받아서 어깨에 힘을 풀자 마침내 제자가 내 눈에서 손을 뗐다.


“되었습니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내가 든 찢어진 옷을 받아들었다.


“옷은 새로 드리겠습니다.”

“제가 수선해드릴게요 전하.”

“되었습니다.”

“…….”

 

* * *



‘제자가 많이 화났나 봐.’

그가 날 쳐다보던 그 날선 시선을 떠올리면서 멍하게 돌아오던 길이었다.

궁전 밖을 나서자 문득 내가 기겁해 있는 사이사이 제자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발이 갑자기 무거워지면서 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제자가 꺼낸 기억 이야기가…… 혹시 회귀 전 기억 이야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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