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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제일 멍청한 황자 (123/159)


123화. 제일 멍청한 황자
2023.05.04.



 


“1황자비가 돌아오다니요?”

나는 밥을 먹다가 놀라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니?”

아버지는 내가 놀라자 오히려 더 놀라서 되물었다.


“아. 아니요. 소황자는 풍토병이 심해서 황자비가 자국에 데려가지 않았던가요? 다 치료가 됐나 봐요?”

“그렇다더라. 폐하께서 따로 어의를 보내 진료했는데 아주 말끔히 괜찮아졌대.”

“다행이네요.”

“뭐. 여기 왔는데 다시 재발해 돌아갈 수도 있긴 하겠지.”

아버지는 별로 관심이 없는지 어깨를 으쓱하고 장아찌를 집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서 묵묵히 식사했다. 하지만 속은 혼란스러웠다.


‘1황자비가 벌써 돌아와?’

1황자비가 아들의 풍토병을 고쳐서 돌아오는 건 올해 12월에 있을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10월이다. 내가 아는 것보다 2개월이나 먼저 1황자비가 돌아오는 것이다.


‘회귀 전과 모든 게 똑같진 않구나.’

아이고 배야. 긴장해서인지 배가 솔솔 아파오네.

큰일이다. 1황자비가 귀환하면서도 그래도 비교적 평화롭던 황실이 제대로 싸우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정보가 오락가락해서야…….

‘제자가 개입했을까? 아니면 나나 제자 때문에 바뀐 이런저런 일들이 영향을 미쳐서 1황자비가 빨리 돌아오는 걸까?’


“요화야.”

갑자기 어머니가 내 손등에 손을 올렸다.

놀라 쳐다보자 어머니가 다 알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거라. 1황자는 머리가 안 좋잖니. 소황자도 아마 멍청할 거야. 벌써 염려할 필요 없어.”

어머니는 장차 13황자비가 될 입장에서 내가 1소황자의 등장을 경계한다고 생각하시나 보다.

부정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분위기라 나는 그냥 “예.” 대답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어머니. 어머니가 모르시는 게 있어요. 1소황자는 엄청나게 똑똑한 애라고요.

* * *

그동안 평화롭게 지냈지. 제자가 가끔씩 묘한 말이나 열 받는 말을 툭툭 던졌지만 그뿐이었다.

분명 제자가 내게 함정을 팔 거라 여겼는데 아직 그 소식도 없었다.

보문 공주 배상금 문제를 가지고 태월로 간 사절도 아직 소식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1황자비가 돌아오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라 해도 몇 개월은 앞서 일어날지도 모른단 걸 염두에 두고 대비하고.

하지만 며칠 후. 내가 뭘 대비하기도 전에 황실에서 태감이 왔다.


“요 대인. 1황자비 전하께서 요 대인을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나는 수업이 없는 날이라 편하게 산책이나 하려던 참이었다. 시비인 월섬이 나와 태감을 번갈아 살폈다.


“나를? 1황자비 전하께서?”

월섬이 놀랄까 봐 나는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 하지만 속은 우중충했다. 미친 거 아냐. 1황자비는 어제 오후에 돌아왔잖아? 그런데 하루 쉬고 나부터 불러? 왜?


“예, 대인.”

“나만? 혹 무슨 일인지 아는가?”

태감이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대인만 부른 건 아닙니다. 동서들을 모두 부르셨지요.”

더 곤혹스러운데. 뭐야. 자기 밑으로 다 불렀단 거 아닌가. 집합시키는 건가?

회귀 전에는 내가 1황자비의 동서 입장이 아니었다. 1황자비가 동서들을 불렀는지 아닌지까지는 기억에 없었다.


“대인, 혹여 곤란하신지요? 바쁜 일이 있으면 제가 전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머뭇거리자 태감이 싹싹하게 권했다. 물론 저 싹싹함은 함정이다.


“그럴 리가. 좀 놀랐을 뿐이라네. 어제 도착하시지 않았나.”

태감이 돌아가자 월섬이 내 팔을 잡고서 물었다.


“괜찮을까요 소가주님?”

“당연히 괜찮지. 나랑 1황자비는 싸운 적도 없는데 뭐가 문제겠어.”

괜찮길 바라야지.

* * *

이후 나는 옷을 갈아입고 곧장 입궐해 1황자의 거처인 항자각으로 찾아갔다.

1황자비가 떠난 후로는 1황자가 혼자 지냈지만 돌아왔으니 1황자비도 그곳으로 왔겠지. 방 안에 들어가자 방 주인은 없었고 규수 세 명만이 모여 있었다.

7황자의 정혼녀, 6황자의 정혼녀, 11황자의 정혼녀로 모두 정혼만 몇 해 전에 하고서 하염없이 혼례를 기다리는 이들이었다.

나를 보자 세 사람이 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은 아직 안 왔구나.’

일각 정도가 지나자 12황자의 정혼녀가 나타났고, 반 각 정도 후에 2황자비가 나타났다.

모두가 오기를 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2황자비가 나타나자 바로 1황자비도 방 안에서 나왔다.

나는 가장 꽁다리 황자의 정혼녀인 관계로 여기서도 제일 말석에 서야 했다.


“황자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다 같이 인사를 올리자 1황자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장 상석에 앉으며 우리들에게 앉으란 신호를 보냈다.

의자에 앉자 1황자비는 미소 띤 얼굴로 현직 동서와 예비 동서들을 주륵 훑어보았다.


“전에 보고 간 사람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도 있군.”

한 차례 모두에게 시선을 준 뒤 1황자비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보아서는 성격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저기 넘어가면 안 된다. 진짜 온화한 성품이라면 돌아온 다음 날 우리를 부를 리가 없다. 심지어 여섯 명 중 아직 ‘진짜’ 동서는 한 명뿐이고 나머지는 다 정혼녀 신분들 아닌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생각인지 다들 미소 짓고 있지만 손에 힘들이 꽉 들어가 있었다.


“긴장할 필요 없다네. 앞으로 한 식구 될 사람들이니 미리미리 친해지고 싶어 불렀을 뿐인걸.”

1황자비도 눈치챘을 테지만 모른 척 말하고서 옆의 궁녀에게 지시했다.


“귀인들께 차를 올리거라.”

“예, 전하.”

잠시 뒤 한 무리의 궁녀들이 줄지어 쟁반에 귀엽게 생긴 과자와 차를 들고 들어왔다.

궁녀들은 우리 옆에 있는 작은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고 나갔다.


“다들 들게.”

“네, 전하.”

나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몸을 뒤로 빼면서 찻잔을 집었다. 1황자비가 왜 우릴 불렀든 눈에 띄지 말고 없는 사람처럼 있다 가야지.


“?”

그러나 찻잔에 입술이 닿는 순간. 나는 바로 1황자비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다 식은 차잖아?’

 


1황자비의 궁녀들이 두고 간 차는 막 데운 따뜻한 차가 아니라 식을 대로 식은 차였다.

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서 다른 여인들 안색을 살폈다. 다들 나처럼 찻잔을 들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었다.


‘모두가 식은 차를 받았구나.’

1황자비는 입꼬리를 올린 채 천천히 자기 차를 마셨다. 1황자비가 든 찻잔 위에서는 제대로 김이 나고 있었다.


‘우리를 시험하려는 거다. 누가 이의를 제기하는지 누가 순순히 순응하는지 구분하려는 거야.’

그러고보니 1황자비가 초반에 황궁 안에서 기선제압을 시도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선제압이 혼인 안 한 우리에게까지 포함될 줄은 몰랐지만.


‘지금 자식이 있는 건 1황자비뿐이라 기고만장했지. 얼마 안 있어서 2황자비가 회임 소식을 전하는 바람에 기가 바로 꺾이지만.’

하지만 예정보다 1황자비가 두 달 정도 먼저 돌아왔으니…… 회귀 전보다 두 달 정도 1황자비의 기는 더 살아 있으려나.

나는 찻잔을 들고 조용히 꿀꺽꿀꺽 마셨다. 어이가 없긴 하지만 이 정도는 모욕으로 받지 않는다.


‘독도 마셨는데 찬 찻물 정도야.’

어차피 13황자가 승리할 걸 아는데 굳이 쓸데없는 경쟁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냥 적만 더 안 늘리면 된다.

하지만 몇몇 이들은 아니었다.


“전하. 차가 너무 차군요. 전하의 궁녀들이 실수를 했나 봅니다.”

이미 황실 족보에 이름을 올린 2황자비가 대표 주자였고, 살짝 눈치가 없는 6황자의 정혼녀가 그랬다.


“2황자비 전하 차도 찬가요? 어휴 전 저만 이런 줄 알았어요.”

반면 7황자의 정혼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감정적인 데다 이리저리 미친 소처럼 적을 만들고 다니는 7황자와 정반대였다.

11황자비는 남 눈치를 많이 보는지 이리저리 살피다가 침묵하는 편을 선택했다.


“저도 좀…… 차가 찹니다.”

12황자비는 끄트머리에 슬쩍 말을 보탰다.

1황자비는 개개인의 반응을 보려던 것이기에 기분 나쁜 내색 없이 수긍했다.


“그렇군. 내 궁녀가 실수한 모양이야. 당장 새로 가져오라 하겠네. 내 궁녀들도 내내 배를 타고 마차를 타고 이동했지. 피곤해서 그런 모양이니 자네들이 이해하게.”

“그럼요. 당연하지요.”

6황자 정혼녀가 싹싹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대충 식은 차 건은 넘어가는 줄 알았다.


“요요화.”

그런데 난데없이 1황자비가 나를 불렀다.


“네, 전하.”

얼른 미소를 띠고서 대답하자 1황자비가 의자 손잡이에 팔을 괴고 웃으며 물었다.


“자네 차도 식었는가?”

“!”

내가…… 1황자비한테 찍힐 일이 있었나? 나는 아무 말 없이 있었는데 왜 굳이 콕 집어서 내게도 묻는 거지?

내가 침묵하고 있어서 물어본 건 아닐 거다. 7황자 정혼녀도 가만히 있는데 저 사람에겐 묻지 않았으니까.


“사실 식긴 했습니다. 하지만 전 원래 식혀 마셔서…… 바꿔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전하.”

어쨌든 나는 납작 엎드려 대답했다. 충분히 적이 많은데 하나를 더하고 싶진 않다.


“그런가.”

다행히 내가 이렇게까지 숙이자 1황자비는 그럭저럭 만족한 듯했다.

그녀는 7황자 정혼녀에게는 차가 식었는지 묻지 않고 궁녀를 불러 지시했다.


“귀인들의 차가 식지 않았느냐.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고 제대로 바꿔 오거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궁녀가 새로 바꾸어 온 차는 보통의 차처럼 따끈따끈했다.


‘젠장. 나중에 제자랑 혼인하게 된다면 이런 일이 더 자주 있을 거 아냐.’

“전하. 소황자의 병은 이제 다 나은 건가요?”

그나마 6황자 정혼녀가 1소황자로 화제를 돌리면서 어색한 분위기는 조금 풀어졌다.


“다행히 완쾌하였다네. 이젠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오히려 건강할 정도지.”

1황자비도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입가가 풀어져서 따뜻한 목소리를 냈다.


“만나보고 싶어요. 1황자비 전하를 닮았으니 아주 영민하고 똘똘할 테니까요. 그렇지요?”

12황자 정혼녀가 밝게 말하자 1황자비가 궁녀를 불러 물었다.


“소황자를 지금 데려올 수 있겠느냐?”

“소황자님께선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 전하.”

궁녀가 물러나자 12황자 정혼녀가 아쉽다면서 괜히 투덜거리는 시늉을 했다.


“어미가 똑똑하면 아이도 똑똑하다고 하지요. 1황자비 전하를 닮은 아이는 당연히 똑똑할 거예요.”

그렇게 조금이나마 화기애애 해지려던 분위기는 2황자비가 묘한 어조로 끼어들면서 다시 굳었다.

2황자비는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자 눈웃음을 짓더니 내 쪽을 힐긋 보며 덧붙였다.


“난 요 이국사의 아이도 기대가 됩니다, 형님. 이국사는 과거에서 빼어난 성적으로 급제해 관직에 오른 인재잖아요.”

왜 또 나 가지고 시비야!


“최근엔 이국사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여 압승을 거두었지요. 이국사의 아이는 보나 마나 우리 아이 중 가장 영리할 거예요. 그렇지 않나 이국사?”

젠장. 1소황자를 까고 싶으면 1소황자 얘기를 하라고. 왜 날 끼워 넣는 거야?

차를 마시긴 하는데 차에서 쇠 맛이 난다. 나는 찻잔을 내리면서 슬쩍 1황자비를 보았다. 1황자비의 표정이 꽝꽝 얼어붙은 빙산 같았다.

나는 얼른 대답했다.


“어머니만 영리해서 되나요. 아버지도 영리해야지요. 우리 13황자께선 학문에 관심도 없고 재주도 없으셔요. 그래도 얼굴만큼은 아주 고우시니 공부는 못해도 예쁘고 착한 아이가 태어날 거 같아요.”

미안 제자. 너 좀 팔자.

하지만 내가 제자까지 팔아가며 바로 아부했는데도 1황자비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2황자비가 픽 웃고서 차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그럼. 아버지 머리도 중요하지.”

그 픽 비웃는 소리를 듣자 나는 내가 한 실수를 파악했다.


‘XX. 1황자가 황자 중 제일 똥멍청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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