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왜 돕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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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왜 돕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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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왜 돕는 걸까
2023.05.15.
“1소황자 말이다. 이번에 1황자비가 치료해서 데려온 그 소황자.”
“네.”
“그 소황자에게 누가 독을 먹였대.”
“네에?! 독이요?!”
아버지가 내 입을 다급히 틀어막았다.
“쉿.”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내 입에서 손을 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1황자비는 사흘인가 나흘 전에 돌아왔잖느냐. 1황자비를 방문한 손님은 이틀 전에 1황자비가 불러서 찾아간 너랑 황자 정혼녀들, 2황자비뿐이지. 그것 때문에 그날 거기 갔던 사람들이 다 불려 갔단다. 이른 아침에 불려 갔어.”
나는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저도 가야 해요?”
“너도 부르러 오긴 했는데. 너는 어제저녁에 외출했지 않냐. 그 덕에 안 불려간 거지. 게다가 너는 소황자를 만난 적도 없고 13황자 전하랑 바로 자리를 떴다면서? 그래서 너는 안 부르고 바로 수사에 들어갔다더라. 천만다행이지. 정말 다행이야. 네가 범인이 아니어도 그 자리에 불려가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일 아니냐.”
아버지 이야기를 듣는데 싱숭생숭해졌다.
내 처소 침실로 들어가자 월섬이 얼른 진정 효과가 있는 차를 가져다주었다.
따끈한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자 이유 없이 무작정 따라오라고 한 제자가 떠올랐다.
‘혹시 내가 진창에 빠지지 않게 미리 빼내 준 건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말도 안 돼. 내가 아는 13황자라면 오히려 이런 일이 생기면 기뻐하며 나를 떠밀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분명 그가 날 도와준 거였다.
1황자비가 날 부른 날. 13황자가 날 데리러 온 덕에 나는 다른 정혼녀들보다 먼저 자리를 떴다. 어제저녁에는 그가 날 멋대로 데려간 덕에 아예 무서운 자리에 불려가지조차 않았다.
본인도 하도 급하게 날 챙겨 가다 보니 제대로 변명조차 준비하지 못했지 않던가. 그러니 계속 만두만 먹인 거고.
‘혹시 이게 제자가 내게 판 함정? 아니야. 아니겠지. 이걸로 무슨 함정을 판단 거야.’
* * *
식사를 마친 뒤 옷을 다 갈아입고 침상에 누웠을 때였다. 천장 나무에 생긴 짙은 자국을 쳐다보고 있자니, 회귀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던 게 떠올랐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당시에 독을 조금 먹어서 난리가 났던 건 1소황자가 아니라 2황자비의 쌍둥이 중 하나였다.
당시엔 황자비와 정혼녀들이 용의자가 아니었고 황자 몇과 황녀 몇이 용의자였다.
쌍둥이들을 지극히 예뻐하던 황제는 분노해서 황자 황녀들의 방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그리고 1황자의 부엌에서 2소황자가 먹은 독 종류가 나왔다.
황후는 이 일이 1황자 부부의 소행이라고 화를 냈다. 그 일로 황자 부부가 벌을 받진 않았으나 그들 부부 거처 궁인들이 전부 다 황후가 보낸 사람들로 교체되었다.
1소황자는 황후의 지시로 원비가 기르게 되었다. 하지만 원비는 인품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자기 아들도 있었다. 그런 원비가 피 한 방울 안 섞인 경쟁자의 손자를 고이고이 기를 리가 없었다.
‘우연일까?’
* * *
다음날. 월무궁으로 걸어갈 때였다. 한 무리의 궁인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필시 1소황자 이야기를 하는구나 싶어서 나는 나무 뒤에 몸을 감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2황자 전하가 그런 건가?”
“그건 모르지. 2황자비 전하일지도.”
“2황자비 전하 아니겠나. 2황자 전하는 어진 분이잖아. 2황자비 전하는 원래도 좀 흉포하시고.”
“누가 한 일이든 무슨 소용이겠나. 부엌에서 증거가 나왔으니 둘 다 곤란해질 텐데.”
우연이 아닐 거란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죽지 않을 정도의 독. 하필 손님으로 와 있던 황족들. 부엌에서 나온 증거.
회귀 전에는 1황자 부부가 당한 일을 이번에는 2황자 부부가 당하는 걸까?
궁인들이 이쪽을 보는 듯해서 나는 얼른 몸을 감추었다.
잠시 시간을 거기서 허비하다가 나는 대화원으로 들어가 서성거렸다.
‘엮이면 안 돼.’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설령 이 사건이 내가 아는 사건이라더라도 지금은 엮이면 안 된다.
제자가 일부러 나를 그 일에서 빼내 주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이 전투에 참전한다면 제자는 내 회귀 사실을 확신할 게 뻔했다.
‘이것도 제자의 함정인가? 내가 나서나 안 나서나 보려는 건가? 내가 나서서 해결하면 역시 회귀한 게 맞다고 확신하려는 건가? 관계없나? 어느 쪽이지?’
하지만…… 제기랄. 2황자는 내게 몇 번 도움을 주었다. 2황자비는 자꾸 내게 시비를 걸어 댔지만 그렇다고 원수라고 할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사건의 범인이 황후라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 * *
고민 끝에 나는 린화를 찾아갔다.
“언니 운 좋더라?”
린화는 긴 의자에 드러누워 책을 보다가 내가 들어가자 건성으로 아는 척했다.
“야 너 심심하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 앉자 린화가 책장을 넘기며 내 말을 무시했다.
“야 너 폐하 총애를 얻고 싶어?”
다시 묻자 린화가 책장을 또 넘기고서 나를 째려보았다.
“지금 날 놀리는 거야? 내가 큰소리치고 입궁해 놓고서 폐하랑 딱 한 번 자고 이후로는 총애도 못 받는다고?”
“그렇게 세세하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네가 폐하랑 몇 번 잤는지 나한테 말해줄 필요도 없어. 제발 말하지 마. 진짜 안 궁금하거든.”
린화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코웃음을 치고 일어나 앉았다.
책을 보란 듯 책상에 쾅 내려놓고서 린화가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았다.
“날 놀리러 왔어? 아니면 부모님 소식이나 내놔. 잘 지내셔?”
“폐하 총애를 얻을 수 있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관심은 확실하게 끌 방도가 있는데. 해볼래?”
린화가 짜증 내다 말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야? 관심을 끌 방도라니? 당연하지. 말해줘.”
“좀 위험할지도 몰라.”
“위험하면 알아서 안 할 테니 말이라도 해줘.”
린화가 책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일단 그나마 이 상황에 가장 안전한 패가 린화여서 여기 오긴 했는데. 린화에게 이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언니. 왔으면 그냥 좀 말해줘!”
린화가 재촉하자 린화의 궁녀들이 알아서 창문을 닫고 문을 닫았다.
“좋아.”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서 린화의 귀를 잡아당겨서 궁녀들도 들을 수 없도록 말했다.
“폐하께 가서 말해. 2황자 부부가 부엌에서 발견된 독을 내무부에서 받아온 걸 수도 있는데 왜 확인해보지 않냐고 말이야.”
“뭐? 미쳤어? 내무부에 왜 독이 있어? 차라리 어의들 약재 창고면 몰라.”
“일단 말해봐. 내무부에 있던 물건이 식재료를 보낼 때 끼어서 그쪽으로 갔을 수도 있지 않냐고. 그래서 만약 내무부에 그 물건이 미리 구비되어 있던 거라면 누가 그 재료를 청했는지 알아보자고 해.”
린화는 코웃음을 쳤다.
“지금 폐하는 엄청 화나셨어. 그런데 가서 2황자 부부를 두둔하라고? 난 그 사람들이랑 친하지도 않은데? 게다가 내무부에 물건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야. 그 부부 중 누군가 개인적으로 들여서 가져다 둔 걸지도 모르잖아.”
“그렇지. 하지만 내무부 식재료 창고에 있는 물건이 부엌에 있는 거라면, 그 물건을 부부가 가져다 둔 게 아닐 가능성도 생기는 거잖아. 혐의가 반으로 줄어드는 셈이니 폐하도 벌을 강하게 내리진 못할 거야.”
린화는 팔짱을 끼고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서 나에 대한 불신이 아주 철철 흘러넘쳤다.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이마에 알밤을 먹이자 린화도 내 이마를 후려졌다.
나와 린화가 서로 멱살을 잡자 린화가 사가에서 데려간 궁녀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안 돼요! 두 분 이젠 이러고 싸우면 안 돼요!”
“아 알았어. 알았다고.”
린화가 차갑게 외치자 궁녀는 조심조심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또 우리가 싸우면 중앙으로 몸을 던질 태세였다.
“안 싸워. 그러니 저기로 가.”
린화가 지시하자 궁녀는 그제야 문가로 걸어갔다.
궁녀가 멀어지자 린화가 내 귀를 잡아당겨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나한테 물 먹이려고 사기 치는 거 아니지?”
“내가 너한테 이렇게 물 먹이면 우리 가문이 잠겨요 인간아.”
“……그건 그래.”
반쯤 넘어온 린화의 팔을 잡고서 나는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경고했다.
“이 정도만 말해도 폐하는 알아서 알아듣고 척척 해내실 거야. 머리가 비상하시니까. 하지만 명심해. 절대로, 절대로 내가 너한테 이 얘기를 해주었단 건 말하면 안 돼. 알았어?”
“왜?”
“내가 해준 얘기라 그러면 폐하가 네게 관심을 가지겠니 내게 관심을 가지겠니?”
“!”
* * *
요화가 돌아간 뒤 린화는 황제를 찾아갔다.
요화가 무슨 정보를 쥐고서 저런 말을 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 린화는 어떻게 해서든 황제와 많이 보고 정을 쌓아서 아이를 만들어야 했다.
언니의 대타로 입궐하게 된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무룩하게 있어 보았자 자신의 인생만 손해 아닌가.
린화는 언니가 해준 말을 적당히 다듬어서 황제에게 그대로 전했다.
“너는 2황자나 2황자비와 별다른 친분이 없지 않나. 왜 갑자기 나서는 거지?”
황제는 린화의 이야기를 듣자 책상을 툭툭 두드리면서 생각하다가 물었다.
“이런 일에 친분이 무슨 상관인가요, 폐하. 누군가 누명을 쓴 걸지도 모른다면 당연히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짐과 황후가 2황자 부부에게 누명을 씌운 것 같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충분히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해 그럴 뿐이에요, 폐하.”
황제가 언짢아하자 린화는 괜히 왔나 조금 후회가 되었다.
‘아니야. 어떻게 해서든 황제에게 인상을 남겨야 해. 총애를 받지 못하면 후궁으로서 살아남지 못해.’
“요 귀인. 그런 위험한 독을 황실 식자재 창고에 보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황제의 목소리가 한층 더 싸늘해졌다.
린화는 다시 겁이 났다. 역시 괜히 왔나. 언니에게 좀 더 자세히 물어볼 걸 그랬나.
이 미친 언니 같으니라고. 폐하한테 이렇게만 말하면 알아서 알아들을 거라더니. 알아서 알아듣기는 개뿔 점점 더 기분 나빠하고 있잖아?
“폐하. 저는 절대로 폐하나 황후마마의 영명함을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폐하의 말씀처럼 내무부 식자재 창고에는 절대로 독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니 거기까지 살피지 않았지요. 하지만 어떤 일이든 억울한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2황자비 전하는 1황자비 전하와 싸운 일이 없고 원한이 없는데 불쌍한 1소황자님께 독을 먹일 일이 있겠습니까. 전 그저 2황자 전하와 2황자비 전하가 억울하지 않도록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린화는 최선을 다해서 스스로를 변호했으나 황제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이에 실망하는 찰나. 갑자기 황제가 묘한 말을 뱉었다.
“2. 이용. 1. 억울. 애 불쌍.”
“예?”
황제가 부른 건 요요화의 필첩에 쓰여진 문구 중 한 줄이었다. 중간 즈음에 있던 내용이었으나 몇 달이나 수시로 필첩을 보았더니 외운 거였다.
황제는 잠시 생각하다가 송 태감에게 지시했다.
“들었지? 내무부 식자재 창고로 가서 그 독이 있는지 확인해보아라. 그리고 있거든 누가 그걸 청했는지도 확인해봐라.”
“예, 폐하.”
송 태감이 물러나자 요화는 속으로 안도했다. 일단 시도는 해보시는구나.
하지만 긴장을 풀기는 일렀다. 린화는 언니가 가문을 걸고 이런 위험한 거짓을 말했으리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로 내무부 안에 그 식재료가 있는지 없는지는 린화도 몰랐다.
“요 귀인.”
그때 황제가 린화를 부르더니 뜻밖의 질문을 했다.
“그건 네 생각이냐.”
“예?”
린화는 당황했으나 얼른 대답했다.
“그럼요.”
“그래.”
황제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린화에게는 너무나 오래 느껴지는 시간이 흘러갔다.
잠시 뒤. 마침내 송 태감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