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일이 해결되자 원수가 (127/159)


127화. 일이 해결되자 원수가
2023.05.18.



 


“알아보았느냐.”

황제의 질문에 송 태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린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없는 건가?

송 태감이 힐긋 이쪽을 쳐다보자 심장은 더욱 조여들었다. 왜 쳐다보지?


“폐하.”

송 태감은 잠시 뜸을 들였다.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대답하자 린화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뱉었다. 언니 말이 맞았구나!


“독이 식자재 창고에 있었다?”

안도한 린화와 달리 황제의 언성은 날카롭게 높아졌다.


“다른 식료품들과 함께?”

“예, 폐하.”

“누구냐. 누가 그걸 거기 가져다 둔 거냐. 누가 청해서 가져다 둔 거냐 아니면 어느 정신 나간 태감이 가져다 둔 게냐.”

송 태감이 다시 주저했다.


“말하라!”

황제가 탁자를 세게 내리치자 책상 위 붓걸이까지 같이 울렸다.


“교비 마마십니다.”

송 태감이 눈을 질끈 감고서 뱉은 말에 황제는 언제 소리쳤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송 태감은 고개를 숙이고서 감히 들지조차 못했다.

린화 역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궁한 지 몇 달이 지났기에 린화도 어느 정도 황제와 후궁들 사이에 대해 알았다. 교비는 황제가 꾸준하게 총애하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독을 먹은 1소황자의 친할머니이기도 했다.

황제가 침묵하자 송 태감도 린화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교비가 자기 손주에게 해코지를 할 리가 없다.”

한참 만에야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송 태감이 얼른 대답했다.

린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일로 교비가 총애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건 누군가 대신 총애를 받을지도 모른단 뜻이었다.


“…….”

한참 만에야 황제가 지시했다.


“교비를 불러와라.”

“예, 폐하.”

송 태감이 밖으로 나갔다.

린화는 문과 황제를 번갈아 보았다. 황제는 린화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녀에 대해 잊어버린 듯했다.

황제는 침묵한 채 허공을 보기만 했다. 린화는 먼저 말을 거는 대신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아직 있었느냐.”

한참 만에야 황제가 고개를 들다가 린화를 발견하고 말했다.


“폐하. 괜찮으신가요?”

“괜찮다. 그만 가보아라.”

린화는 공손하게 인사하고서 밖으로 나갔다.

궁녀를 데리고 몇 걸음 나가고 있자니 교비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교비마마께 인사올립니다.”

교비는 린화에게 살짝 고개만 끄덕이고서 황제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표정이 평온해 보였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 * *

다음날. 나는 어제 아무 일도 없던 척 수업을 위해 월무궁에 찾아갔다.

인사를 올리고서 태연하게 서책을 펼치는 내내 제자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모른 척했다.


“스승님.”

결국 견디다 못한 제자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예?”

웃으면서 고개를 들자 제자가 따라 웃으며 물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는지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1소황자가 먹은 독이 내무부 식자재 창고에서 발견되었답니다.”

“정말인가요?!”

나는 일부러 깜짝 놀란 척 되물었다.


“예. 그런데 그 독을 청한 게 교비였다는군요.”

“정말요?!”

“정확히는, 교비가 청한 건 다른 식자재였는데 글자가 헷갈리게 쓰여 있어 그 독이 오게 된 거였지만요.”

제자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내 반응을 관찰했다. 그 때문에 나는 눈이 아파도 계속 부릅뜨고 있어야 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네요 전하.”

“……어쨌든 교비는 1소황자의 친할머니이고, 많은 독 중 하필 그 독이 둘째 형님 부엌에서 발견되었으니 억울한 오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셔서 부황께서 이 일을 관대히 넘어가 주셨답니다.”

“그렇군요. 폐하는 참으로 어진 분이시네요.”

나는 열심히 반응한 다음 제자를 살폈다. 혹시 제자가 린화 이야기를 꺼낼까?

황제가 이 일을 처리하면서 굳이 린화 얘기를 하진 않을 듯해서 린화에게 가긴 했다. 그러나 일에는 늘 변수가 있으니 조마조마했다.


‘다행이야. 린화 얘긴 없구나.’

좋아. 그렇다면 제자도 날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다. 일이 잘 풀린 건 좀 수상쩍겠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냥 황제가 열심히 조사하다가 벌어진 일 아닌가.


“일이 참 묘하게 됐네요. 그렇죠 전하?”

“그렇군요.”

“맞다. 전하. 감사합니다. 전하께서 절 데려가 주신 덕분에 이 일에 제가 휘말리지 않았어요. 다들 저더러 운이 좋다고 그러네요.”

“제자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제자는 분명 이번에 날 도왔다. 하지만 내 말에 반응하는 표정은 시큰둥했다.


“수업이나 하시지요.”

 

* * *

하지만 안도하던 마음은 수업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붙들렸다.


“요 대인!”

송 태감이 월무궁 길목에 서 있다가 나를 보자 웃으면서 다가온 것이다.

젠장. 내가 이젠 송 태감만 보면 아주 심장이 조마조마해.


“송 공공. 무슨 일인가?”

속내를 감추고서 묻자 송 태감이 넓은 길을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폐하께서 요 대인을 부르십니다.”

전에는 월무궁에 갈 때 잡아채 가더니. 이제는 돌아가는 길에 잡아채 가는구나.


“아. 대인, 혹시 바쁘십니까?”

잠깐 주춤하자 송 태감이 바쁘면 가도 된다는 듯 물었다. 함정이다.


“아니요. 폐하께서 부르시니 얼른 가야지요.”

나는 최대한 싹싹하게 대답하고서 얼른 황제의 집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젠장. 무슨 일로 날 부른 거지? 린화? 린화가 혹시 폐하께 나에 대해 이야기했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송 태감이 안쪽으로 외쳤다.


“폐하. 요 이국사가 왔습니다.”

“들어와라.”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고 발을 내디뎠다.


“이리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황제가 오라고 손짓했다. 일단 표정이 안 좋진 않았다. 벼루를 던질 것 같진 않다.

나는 조심조심 그쪽으로 다가가 황제의 책상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져 섰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황제는 책상에 한 팔을 걸치고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얼굴은 제자와 똑같지만 자세에서부터 황제와 제자의 차이가 드러났다.


“요 이국사. 짐이 자네에게 물어볼 게 하나 있어서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요 이국사가 요 귀인에게 소황자 건에 관해 말하였느냐.”

“!”

조금도 돌려 묻지 않는구나. 젠장. 진짜로 린화가 내 이야기를 한 건가?

심장이 마구 뛴다.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하지만 린화가 내 이야기를 했을 경우 ‘아니다’고 대답하면 나는 황제에게 거짓을 고한 게 된다. 린화의 대답을 알지 못하다 보니 대응하기 힘들었다.


“소신은…….”

이에 일부러 말끝을 흐리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황제가 자세를 바꿔 다른 방향으로 삐딱하게 앉으며 물었다.


“전부터 생각했지. 우리 이국사는 참으로 영민해.”

“송구하옵니다.”

“역시 요 귀인을 짐에게 보낸 건 자네였군.”

“!”

린화가 말한 게 아니구나. 황제가 알아서 짐작한 모양이다. 어디서 짐작한 걸까. 내가 2황자와 약간 친분이 있는 점?

아니면…… 역시 황제가 내 필첩을 가지고 있나?

하지만 이 일은 회귀 전과 상황이 바뀌었다. 내 필첩을 보고 황제가 뭔가를 짐작할 수 있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있자니 황제가 웃으면서 물었다.


“참으로 영특하지. 이국사. 그 비상한 머리로 짐에게 해줄 조언은 없는가?”

심장이 북채를 쥐고서 아주 신이 나게 북을 두드리고 있다. 내 심장 소리가 황제 귀에 들릴 것 같다.


“영명하신 황제 폐하께 신이 감히 어떻게 조언을 드리겠습니까.”

나는 거북이가 된 것처럼 납작하게 스스로를 낮추었다. 나는 시선을 내리고 바닥만 쳐다보았다.

황제가 진짜로 감탄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황제는 내게 감탄할 수도 있었지만, 동생을 조종해 집안일에 간섭한다고 노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버텼을까.


“이국사.”

황제가 또 날 불렀다.


“네, 폐하.”

“자네는 역시 황자비로 남기엔 아까워.”

“!”

“열셋째가 보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면 괜찮지. 황후가 될 테니.”

“!”

“하지만 그 아인 황제가 될 가능성이 없다. 그런 아이 곁에 남기에 자네 재능이 아깝지 않은가?”

“폐하. 신은…… 13황자 전하를 사모합니다.”

“…….”

“신이 원하는 건 13황자 전하 곁에 머무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신은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재능 있지 않사옵니다, 폐하.”

“이국사는 욕심이 없군.”

황제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급속히 심드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황제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나를 좀 더 높게 등용해 달라고 할 수야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서 묵묵히 가만히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재미없구나.”

황제가 시들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더니 눈앞에 뭔가가 쑥 내밀어졌다. 길쭉한 고급 목함이었다.


“폐하?”

뭔가 싶어 받지 않고 바라보자 황제가 목함을 가볍게 흔들었다.


“가져가라.”

“무엇입니까……?”

“선물이다.”

“!”

 

* * *

황제는 왜 내게 선물을 준 걸까. 황제와 제자는 얼굴만 닮은 게 아니다. 두 사람은 속내를 알기 어려운 것도 닮았다.

나는 목함을 안고서 힘없이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마침 교비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옆으로 비켜서서 고개를 숙였다.


“요 이국사.”

그런데 어째서인지 교비가 굳이 내 앞에 멈추어 서서 다정한 목소리로 아는 체를 했다.


“네, 마마.”

나랑 교비 사이에는 접점이 없는데. 왜 갑자기 아는 체하지? 부탁할 게 있나?


“자네는 영민하니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겠지.”

“그렇지도 않습니다, 마마.”

“자매가 한 황제에게 붙어 총기를 흐리다가 둘 다 처형당한 일을 아는가.”

“!”

 

 
부탁할 게 있어서 아는 척한 게 아니라 시비를 걸려고 아는 척한 거구나.

교비와 나는 다른 일로 척진 적이 없지. 아무래도 교비는 어떻게 안 건지 몰라도 린화가 황제에게 식자재 창고 이야기한 걸 아나 보다. 그리고 그걸 2황자에 대한 보호가 아니라 자기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어.


“그럼요. 알지요 마마.”

“다행이군. 모르는 줄 알았네.”

“다 압니다, 마마. 그 자매 후궁도 죽고 황제도 죽고 황제가 죽으니 그 밑의 후궁과 후손까지 모두 죽지 않았습니까.”

“!”

애써 웃는 얼굴을 하고서 눈치 없는 척 서 있기를 몇 호흡 정도.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던 교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

교비는 내가 품에 안은 목함에 한 번 시선을 던지고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교비의 궁인들이 그 뒤를 따르며 나를 굴러다니는 쓰레기 보듯 보고 갔다.

그들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다가 나는 얼른 그 자리에서 달아났다.


‘린화에게 조심하라 해야겠어.’

 

* * *

1소황자가 미량의 독을 먹고 앓은 사건은 궁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누가 1소황자에게 독을 먹인 건지 정확히 매듭을 짓지 못했기에, 결국 이 일로 큰 피해를 본 건 애꿎은 소황자의 유모들뿐이었다.

유모들은 소황자 곁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단 이유로 매를 맞고 쫓겨났다.

일반적인 독 사건에 비한다면 유모들도 낮은 처벌을 받은 것이긴 했다. 그러나 유모들은 독이 발견된 2황자 부부도 처벌받지 않았고 독을 청한 교비도 처벌받지 않았는데 자기들만 벌을 받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된 뒤 며칠이 지나자 소란스러워졌던 궁전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황후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한탄했다.


“1소황자가 무사히 회복하고 있다니. 골골거리던 아이가 이제 많이 건강해지긴 한 모양이구나.”

“독을 좀 더 쓸 걸 그랬습니다.”

상궁의 말에 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독을 먹고 죽기라도 한다면 조사를 더욱 철저히 했을 거다. 그래도 수확이 있으니 다행이지.”

황후는 최근 며칠간 황제가 교비에게 덜 찾아간다는 보고를 떠올리고 만족해 미소 지었다.


“교비 마마는 누가 새로이 입궁하든 늘 폐하께 총애받았지요. 폐하의 총애를 잃은 건 처음이니 지금쯤 아주 분해 있을 겁니다.”

“그렇지.”

황후는 빙그레 웃으면서 찻잔을 문질렀다. 하지만 곧 황후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교비가 총애를 잃은 건 좋다. 하지만…….”

“폐하께서 요 귀인을 자주 찾아가셔서 그러십니까?”

“요 귀인만 자주 찾아가는 거면 그나마 낫지. 폐하께서 자꾸 선물을 두 개씩 챙기지 않느냐.”

“그냥 요 귀인이 어여쁘니 요요화를 같이 챙기는 게 아닐까요?”

“바보 같은 소리. 폐하가 교비를 총애할 때 교비의 자매에게 선물을 같이 보낸 적이 있느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