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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고작 미신이니 가능하겠지 (128/159)


128화. 고작 미신이니 가능하겠지
2023.05.22.



 
태감들이 줄지어 대문 안으로 들어오자, 고용인들과 친척들이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또 폐하께서 하사품을 보내주셨습니까?”

어머니가 가장 앞에 선 태감에게 다가가자, 태감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네, 부인. 폐하께서 요 귀인에게 보낼 선물을 고르시다가 옥 장식과 진주 신발, 천사비단이 두 쌍씩 있으니 자매가 하면 좋을 거라시며 같이 보내셨습니다.”

태감이 선물을 내려놓고 물러나자, 내 뒤에 서 있던 첫째 숙모가 얼른 옆으로 와서 물었다.


“페하께선 왜 이렇게 너까지 잘 챙기시는 거니?”

“린화를 예뻐하시니 괜히 제게도 친절을 베푸시는 거지요.”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황제의 의도가 그렇게 순수하게 여겨지진 않았지만 솔직하게 말하긴 남사스럽지.


“린화가 시집가더니 효도를 톡톡히 하는구나. 좋은 동생을 두어서 잘됐어. 이렇게 자매를 잘 챙기다니. 그런 아이가 어디 있냐.”

첫째 숙모는 혀를 내두르며 자기 딸 둘을 힐긋 보았다.

첫째 숙모의 적녀 둘은 자기들끼리 붙어 서서 귀에 대고 무어라 소곤대고 있었다. 서녀 셋 역시 자기들끼리 따로 서서 소곤거리는 중이었다.


“우리 아이들도 사이가 좋은 편이지. 둘 중 하나라도 잘 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일 텐데…….”

숙모는 그 아이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숙모가 자기 딸도 후궁으로 보내고 싶단 말을 꺼낼까 봐 나는 얼른 하사품 곁으로 다가갔다.

젠장. 폐하는 나더러 실망했다면서 선물은 왜 바리바리 보내는 거야? 남들이 이상하게 보잖아.


‘제자도 이상하게 볼까?’

 

* * *

시일이 지나도 황제는 이전과 달리 교비를 따로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요 귀인을 찾아가는 횟수만 늘어났고, 더불어 요요화까지 챙긴단 소문이 들려왔다.

1소황자가 완쾌하자 교비는 문안 온 아들 부부에게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요화 린화 자매를 경계해라.”

“요 귀인이 최근 총애를 좀 얻게 되었다지만 어머니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고작해야 귀인인걸요.”

1황자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비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지.”

그러나 교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게다가 내가 총애를 잃은 것도 요화 린화 자매가 무언가 계략을 써서인 듯해.”

“계략이라니요?”

1황자비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 운이가 중독된 사건에 내가 연루된 일. 거기에 그 자매가 연관되어 있는 듯하구나.”

교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안 그래도 내 손자가 크게 앓아 마음이 찢어지고 있는데. 폐하께서 날 불러서 내무부에 독을 청한 게 나라고 말할 때 얼마나 심장이 들썩였는지…….”

“고정하세요 어머니.”

1황자는 얼른 다가가 등을 토닥거렸다.

교비는 자기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어차피 어미는 너희도 있고 운이도 있고 4황녀도 있으니 더 총애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너희가 걱정이구나.”

 

* * *

문안을 마치고 자신들의 처소로 돌아가며 1황자비는 남편의 팔목을 꽉 잡았다.


“어머님 말씀 들었지요?”

“같이 들었잖습니까.”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방금 어머님 말씀을 들었냐고 물었지 않습니까……?”

“…….”

1황자비는 남편을 쏘아보았다.

1황자가 주춤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1황자비는 그의 팔목을 더욱 꽉 잡고 걸음을 빠르게 했다.


“폐하께서 우리 운이를 아주 예뻐하십니다. 황후 마마도요. 그럴 만도 하지요. 지금 손주라곤 우리 운이 뿐이니까요.”

1황자는 왜 갑자기 아내가 아들 이야기를 하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저절로 목소리가 밝아져 대꾸했다.


“앞으로도 우리 운이를 가장 예뻐하실 겁니다. 정말로 순하고 영리한 아이니까요.”

1황자비는 짜증이 솟구쳐서 손톱을 세워 그의 팔을 꼬집었다. 그녀는 명문가 출신인 2황자비나 다른 정혼녀들과 입장이 달랐다. 자신도 공주 신분이었기에 1황자를 어렵게 여기거나 공손히 대하지 않았다.


“또 왜 화를 냅니까? 우리 아이 칭찬을 해도 못마땅합니까?”

1황자는 억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바보 같으니. 가장 똑똑한 손주를 가장 총애하란 법은 없습니다. 어쩌면 막내일수록 더 예뻐할지도 몰라요. 그러니 다른 동서들이 아이를 낳기 전에 우리 아이가 황태손이 되어야 합니다! 이 얘길 하는 거잖아요!”

1황자는 아내를 뿌리치고 쓰린 팔을 문질렀다.


“나도 황태자가 아닌데 어떻게 우리 아이가 황태손이 되겠습니까?”

“어머님이 가장 총애받을 땐 전하가 황태자가 아니어도 그나마 괜찮았어요. 하지만 이젠 어머님도 총애받지 못하니…….”

1황자비는 이를 깨물었다.


“내가 미쳤지. 왜 요요화는 절대로 범인이 아니라고 빠져나가게 길을 만들어줬을까!”

1황자는 아내의 등을 토닥거렸다.


“진정해요. 요화 린화 자매가 계략을 부리니 부황께서 잠깐 미혹되신 것뿐입니다. 그 둘을 치워버리면 부황도 다시 어머님을 가장 아끼실 겁니다.”

“어떻게 치우려고요? 요 귀인은 폐하께서 지금 가장 주목하고 계십니다. 요요화는 월무궁과 자기 집만 오가요. 남장여자란 약점도 폐하가 눈감아주고 계시니 그걸로 꼬투리도 잡지 못하잖아요!”

“진정해요. 그 자매 약점이 될만한 게 없나 샅샅이 살피라 지시하겠습니다.”

 

* * *

황제가 계속해서 내게 선물을 보내기 때문일까. 요 며칠 수업하는 내내 제자의 표정이 흉흉하고 좋지 않다.


“전하 전하. 얼마 안 있으면 겨울이네요. 월무궁 지붕에 구멍이 났던데. 수리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결국 아쉬운 사람이 굽히고 들어간다고, 나는 눈치를 보다가 살짝 딴 말을 걸어보았다.


“추우십니까.”

제자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되물었다.


“아니요. 이 방은 안 추운데요.”

“그러면 신경 쓰지 마시지요.”

그러나 제자는 기껏 말을 걸어도 시큰둥하게 화제를 넘겨 버렸다.


“시집오면 저도 침실을 같이 써야 하는데 별 보고 잘 수는 없잖아요.”

그게 너무하다 싶어서 슬쩍 툴툴대보았으나 제자는 코웃음만 쳤다.


“스승님이 오기 전엔 수리해 놓을 테니 염려 놓으시지요.”

“……알았어요.”

“정 추우면 부황께 말씀드리면 수리해주실 겁니다. 부황은 스승님을 총애하니까요. 아니 그런지요?”

나쁜 놈! 내가 황제한테 선물 내놓으라고 행패라도 부렸나. 황제가 그냥 린화 챙기면서 나까지 챙기는 건데 왜 나한테 신경질이야.

싫으면 자기가 황제한테 가서 말을 하던가. 나쁜 놈! 자기도 말 못 하고 나도 말 못 하고, 말 못 하고 쭈그리고 있는 건 나나 자기나 똑같구먼!

그런데 수업을 끝내고 막 월무궁 대문을 나갈 때였다. 낯선 태감이 이쪽으로 뛰어오다가 나를 보고 외쳤다.


“요 대인. 마침 잘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요 대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내 앞으로 다가온 태감은 웃는 낯으로 말을 하다가 내 뒤쪽을 쳐다보더니 표정이 살짝 굳었다. 왜 그러나 싶어 뒤돌아보니, 제자가 언제 온 건지 내 바로 뒤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전하? 언제 오셨어요?”

“배웅하러 나왔습니다.”

제자는 간단하게 대답하고서 태감에게 지시했다.


“마침 스승님을 왜 찾았단 거지? 계속 말해라.”

태감은 제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로 말했다.


“송구합니다, 전하. 1황자비께서 지난번 소황자님 사건으로 많이 놀라셨을 거라고 동서분들을 부르셨습니다.”

또? 그때 동서들 불렀다가 그 난리를 쳐놓고 또 부른다고? 입 밖으로 솔직한 말이 나가려는 걸 꾹 참고 나는 제자를 살폈다.

제자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저…… 전하.”

그러더니 내가 부르자마자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이 가도 되나.”

“전하께서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인지 태감은 쩔쩔매는 기색으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조카가 크게 아픈 일로 나도 많이 놀랐는데. 같이 가야겠군.”

제자가 그렇게 말하며 아예 대문 밖으로 나서자 태감은 입만 벙긋거렸다.


“전하. 저, 전하. 전하께서 같이 가도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황자비께서 불러오라 하신 건 동서분들뿐이어서요.”

태감은 몇 번이나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다가 드디어 말했다.


“일단 같이 가지.”

그러나 제자는 개의치 않고 손을 내저었다.


“앞장서라.”

태감이 도움을 청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가엾어 보였다. 하지만 도와주진 않을 거다.

교비가 나한테 자매가 처형당하느니 어쩌니 하고 갔어. 1황자비는 교비의 며느리지.

황궁은 가만히 있어도 뒤통수 맞기 쉬우니, 원수 집에 갈 때는 더 조심해야 한다.

나는 슬그머니 제자의 팔을 붙잡았다. 이 상황에선 제자랑 같이 가는 게 그래도 안전하겠지?

태감은 입술을 들썩거리다가 돌아서서 종종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제자의 팔을 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제자는 뿌리칠 마음이 없는 듯 앞으로 걸어갔다.


 

* * *

지난번에 비가 내릴 때 우산을 들고 온 게 제자뿐이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2황자도 자기 아내와 함께 왔다. 지난번 소황자 중독 사건에 연루되어 크게 곤란할 뻔한 일로 경계심이 드높아진 듯했다.


“초대하지 않은 분이 두 분이나 오셨네요.”

1황자비는 재밌다는 듯 웃고서 차를 대접했다.

하지만 그뿐. 별다른 일은 없었다. 이후 우리는 흩어졌고, 1황자비는 이후로도 한두 번씩 동서와 예비 동서들을 소집했다.

처음에는 2황자와 제자도 그때마다 따라왔다. 하지만 계속해서 불러대자 마침내는 두 사람도 오지 않게 되었다.

두 황자가 처음으로 둘 다 오지 않게 된 날.


“소황자를 데려와라.”

내내 사소한 일상 이야기만 하던 1황자비가 난데없이 자기 아들을 불렀다.

소황자를 부르자 2황자비와 정혼녀들은 죄다 표정이 이상해졌다. 일전에 소황자를 보고 갔단 이유만으로 중독 사건 용의자로 몰려 마음고생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안 보겠다고 할 수도 없는지라 마지못해 자리를 지키기를 잠시. 처음 보는 여자가 소황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어머니!”

소황자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른 1황자비에게 달려가 안겼다.


“우리 아들.”

1황자비는 자애로운 목소리로 소황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2황자비는 턱에 힘을 주고 고개를 돌려 문만 쳐다보았다.


“소황자가 완쾌해서 다행이네요.”

6황자 정혼녀가 밝은 목소리로 칭찬하자, 소황자는 돌아서더니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숙모님.”

“숙모래.”

6황자 정혼녀는 까르르 웃었다.


“아직 아닌데.”

아직은 분위기가 괜찮았다. 아직은.

하지만 중독 사건을 겪은 1황자비가 자기 아들을 자랑하려는 순수한 마음으로 우릴 부른 건 아닐 거야. 게다가 황자들이 없자마자 부르다니. 분명 꿍꿍이가 있는데. 대체 뭘까.


“사실 내가 자네들을 부른 건 당부할 게 있어서라네.”

내 생각에 화답이라도 하듯 1황자비가 아이 머리를 쓸면서 입을 열었다.


“당부라니요?”

7황자 정혼녀가 경계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1황자비는 다시 아이의 통통한 뺨을 살짝 꼬집었다.


“지난번에 아이가 크게 앓지 않았나. 그 일을 겪고 나니 ‘미신’조차 믿게 되더군.”

2황자비는 대놓고 이마를 찌푸렸다.

1황자비는 2황자비를 시작으로 모두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 마음이 모이면 악한 기운이 생긴다지 않나. 어쩌면 자네들이 우리 소황자를 부러워하는 마음이 아이에게 악영향을 끼친 걸지도 모른다 싶어서 말이네.”

“하하 그럴 리가요.”

6황자 정혼녀가 까르르 웃으며 대꾸했으나 1황자비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6황자 정혼녀의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내가 원하는 건 별것 아니라네. 어차피 이 아이는 폐하의 장자의 장자이니 결국 황태손이 될 아이이지.”

“!”

“그러니 앞으로 자네들이 낳을 아이들은 굳이 우리 운이보다 뛰어날 필요가 없지. 자네들이 낳을 아이들이 운이보다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아이일 거라고 하늘과 가문을 걸고 맹세하게. ‘미신’이니 거창하게 서약서를 쓸 필요도 없어.”

1황자비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모두를 둘러보았다.


“고작 ‘미신’이니 이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뭐야…… 저 별거 아닌데 기분 나쁜 명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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