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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미래를 볼 줄 아느냐 (134/159)


134화. 미래를 볼 줄 아느냐
2023.06.12.



 
황제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다. 나는 이러기도 저러기도 힘들어서 눈을 내리깔았다.


“세상에, 쌍둥이라니! 몇 개월인가?”

“석 달 되었습니다, 마마.”

“세상에.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는가.”

“송구합니다, 마마. 지난번에 초기에 잘못된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엔 최대한 조심하느라 늦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황후와 2황자가 대화 나누는 걸 듣다가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황제는 이젠 날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다행이야.’

하지만 꺼림칙한데. 왜 황제가 날 쳐다봤을까.


“스승님.”

황제의 시선을 생각하느라 황후와 2황자의 대화도 흘려들었으나, 제자가 부르자 대번에 정신이 집중된다.

얼른 옆을 쳐다보자 제자가 부드럽게 웃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놀라우십니까?”

“예?”

“오해받지 않으려면 웃는 게 낫겠습니다.”

“오해요? 아.”

그 말을 듣고서 보니 1황자비를 제외한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저 중 진짜로 웃는 이들이 몇 명인진 모르겠지만, 다들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

나도 얼른 양 입꼬리를 올렸다.


“스승님.”

그러자 옆에서 제자가 또 말을 걸었다.


“스승님도 아이를 가지고 싶으신지요?”

나는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걸릴 뻔했다.


“예?”

물잔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작게 기침하며 묻자 제자가 나를 더 이상하단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리 놀라시는지요?”

“아직 혼인도 안 했는데 아이 이야기를 하시니 그렇지요.”

“이런 이야기는 친구 사이에도 하지 않습니까.”

“전하는 하셨어요?”

“제자는 친구가 없답니다.”

“…….”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멍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자니, 제자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가 펴며 말했다.


“제자는 별로. 있어도 상관없고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있으면…… 떠나보내기 슬프겠지요. 없는 게 좋겠군요.”

“!”

제자는 여러 번 회귀했다고 했지. 아이가 생기면 아이를 두고 회귀해야 하니까 저런 말을 하는 건가?

하긴. 부모님은 회귀하면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아이는 회귀한다고 해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구나.


“스승님은요?”

제자가 기필코 내 대답을 듣겠다는 듯이 또 묻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 나는 제자에게서 도주할 생각인데 아이는 무슨 아이!

하지만 뭐라고 말은 해야 할 듯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꿈에서 아이들을 확인한 다음에 알려드릴게요.”

“무슨 꿈을 꾸시려고요.”

“!”

“축하드립니다, 형수님!”

“축하드려요, 전하!”

티격태격하다가 옆자리의 6황자비 예비부부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나도 얼결에 따라 일어나며 외쳤다.


“축하합니다!”

 

* * *

분위기가 이러니 내가 적당할 때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빨리 빠져나가거나 표정 관리를 못 하면 2황자비 회임을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연회가 되어 버린 탓이다.

결국, 나는 입꼬리가 아프도록 내내 웃고 손뼉을 치고 거의 열 번 가까이 축하한다고 외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어쩌지요 소가주님? 나리와 마님은 자시 말까지 소가주님을 기다리다가 이제 막 잠드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부모님은 자러 들어간 뒤였다.


“괜찮아. 수길댁도 들어가서 쉬어.”

“드시라고 차려둔 찬거리는 방에 그대로 있어요, 소가주님. 혹시 배고프시면 조금이라도 드셔요. 데워드릴까요?”

“아니 아니 괜찮아. 들어가서 쉬어.”

수길 어멈이 하품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다가 나는 다 같이 식사하는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수길 어멈 말처럼 한 상 가득 차려진 연회 음식들이 보였다.


“…….”

그 음식들을 보자 기분이 이상해진다. 평소 내가 앉던 자리에 앉아 식은 무조림을 입에 넣고 씹다 보니 싱숭생숭한 기분이 더욱 심해졌다.

내가 제자를 피해 달아나면 부모님은 괜찮을까?

이전 도주 계획을 세울 때는 괜찮다고 확신했다. 린화가 근처에 좋은 남자와 혼인해서 사는 걸 아니까. 나를 몇 달 못 보게 되신다고 하더라도 외롭지 않을 거라 여겼지.

하지만 린화가 입궁해서 부모님을 살피지 못하게 된 상황이다 보니 영 신경 쓰인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소가주 자리에 오르면 훗날 노쇠한 부모님을 제대로 살피려 할까?

그때 드륵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자 제자가 혼자 뚝 떨어진 그림자처럼 음산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제자는 내 맞은편 자리에 앉더니 꼭 제집에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진짜 오셨어요?”

연회장에서 나갈 때는 날 안 따라왔다. 그래서 우리 집에 올 거란 말은 그냥 농담인 줄 알았는데.


“올 거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래도 안 오실 줄 알았어요. 농담이신 줄 알았어요.”

“농담이길 바라신 건 아니고요?”

아 물론 그렇지.

대답을 피하고서 무조림을 씹으며 곁눈질하니, 제자는 젓가락을 집고서 자기도 앞에 놓인 음식을 입에 넣고 있었다. 입에 넣기 전에 한 번씩 비장한 결단을 내리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전하는…… 절 헷갈리게 하세요.”

제자는 조린 양파를 입에 넣었다가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제자는 늘 일관적으로 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누가 만든 겁니까?”

“제 어머니요.”

“요리에 재주가 없으시군요.”

이…… 가차 없는 자식.

보통 남의 어머니가 만든 요리라고 하면 거짓말로라도 맛있다고 해주지 않나.

심지어 예비 장모님 음식인데!


“저도 어머니 닮아서 요리 못해요.”

짜증 나서 일부러 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러니 혼인해도 제가 전하께 요리해드리고 하진 못해요.”

“제자에겐 기쁜 소식이로군요.”

뭐야?


“기쁘다니요?”

“제자는 스승님이 주는 요리는 무엇이든 불신한답니다.”

“!”

제자가 혼자 회귀했을 때 내가 독살했다고 그랬지. 그래서 저러나. 아니 그래도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 기쁜 얼굴로 하냐. 진짜 너무하네!


“그럼 우린 찬모를 잘 구해야겠네요 전하.”

제자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왜 웃으세요?”

“스승님과 이런 이야기를 하니 신기해서요.”

“신기할 게 뭐 있나요.”

제자는 양파 요리를 내 앞에 밀어주고는 양념한 두부를 잘라 입에 넣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승님 어머니가 요리하지 않은 건 괜찮군요. 찬모가 만든 건지요?”

진짜 너무하네. 왜 자꾸 내 어머니 요리 솜씨로 시비지?

똑같이 돌려주고 싶어도 나는 못 그러는 거 알고서 저러나? 젠장.

구시렁거리고 있자니, 제자가 몇 젓가락 먹었다고 수저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스승님. 또 새해가 찾아왔습니다. 혹시 제자께 해줄 덕담이 없으신지요?”

“없어요 전하.”

“덕담이 아니어도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제자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스승님의 비밀을 털어놓으셔도 됩니다.”

“제가 전하를 많이 좋아해요.”

“…….”

제자는 의미심장하게 웃던 걸 때려치우고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변했다.

뭐. 내가 자기가 비밀 말하라고 하면 다 말할 줄 아나. 예전에 옷 찢어먹다가 서로 말이 엇나갔을 때. 그때 내가 회귀를 털어놓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바로 날 잡아먹을 속내부터 드러냈으면서?


“그렇군요.”

“전하는 제게 하실 말씀 없으세요?”

“전 스승님을 안 좋아합니다.”

나쁜 놈!


“그만 드시고 가세요.”

 

* * *

신년일 이후 닷새간은 휴일이기에 나는 느긋하게 침상에 누워 뒹굴뒹굴했다. 앞으로 최소한 이틀은 이 상태로 지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시초 무렵.


“소가주님, 소가주님. 궁에서 태감이 왔어요!”

내 시비인 월섬이 들어와서 알려주었다.


“태감이 또 왜?”

당황해서 묻자 월섬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 월섬이는 모르겠지. 나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요 대인!”

우리 집에 온 건 황제의 측근 태감인 송 태감이 자주 데리고 다니는 태감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 태감이 몹시 영광이라는 투로 말했다.


“요 대인. 폐하께서 요 대인을 부르셨습니다. 얼른 입궐할 채비를 하시지요.”

신년일 다음날에 날 부른다고……?

수상쩍지만 거부할 수 없기에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가 제대로 씻고 이국사처럼 차려입었다.


“마차를 타고 가나?”

뜻밖에도 대문 앞에는 황실에서 온 마차까지 있었다. 그걸 보고 내가 기겁하자 태감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요 대인이 어제 늦게까지 연회장에 있느라 피곤하실 거라며 마차를 보내라 하셨지요. 폐하께서는 요 대인을 아주 총애하십니다.”

“…….”

뭐지. 왜 이리 불길한지 모르겠다. 어제 2황자비가 자기 회임 소식을 발표하는데 황제가 날 쳐다보던 게 떠오른다.

찝찝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마차에 올라탔다.


“공공. 혹시 폐하께서 날 왜 부르시는지 아는가?”

이동하는 도중 슬쩍 태감을 떠보았으나 태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인이 어찌 어심을 짐작하겠습니까.”

마침내 마차가 교완궁 앞에 멈추어 섰다.


“여기서부터 걸어가시면 됩니다, 대인.”

마차 밖으로 나가자 태감은 마부에게 신호를 보낸 뒤 앞서 걸어갔다. 태직전 앞으로 가자 태감이 발 너머를 향해 외쳤다.


“폐하. 요 이국사를 데려왔습니다.”

황제의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황제는 대신들이 모두 쉬는 날인데도 책상 앞에 상소문을 잔뜩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눈 밑이 거무스름한 걸 보니 한숨도 못 잔 얼굴이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일단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자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태감이 물러나자 황제가 이번에는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아…… 불안해. 불안해.’

다섯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서자 황제가 좀 더 오라고 손짓했다.

한 걸음 더 다가갔으나 황제는 또 오라고 했다.

한 걸음 더 다가가니 책상에 놓인 상소문 내용이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이 이상 다가가는 건 너무 부담스러운데. 설마 더 다가오라고 하진 않겠지?


“이국사.”

다행이다. 또 오라곤 안 하는구나.


“미래를 보느냐.”

“!”

다행이 아니구나. 이게 무슨 소리야.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가서 안 빠진다. 당황해서 쳐다보자 황제가 상소문 밑에서 익숙한 작은 필첩을 꺼내 가장 위쪽에 올렸다.


‘내 필첩!’

 

 
역시 황제가 가지고 있던 거 맞잖아!


“이국사. 이 필첩에 그간 일어난 일 몇 가지가 적혀 있더군. 1황자비가 아이가 나아 데리고 오는 일. 예씨 성을 가진 낭자가 3황자와 연이 닿는 일. 1황자비와 2황자비 사이의 일로 1소황자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일. 그리고…… 2황자비가 쌍둥이를 회임하는 일까지.”

제기랄! 속에서 욕이 나올 뻔했다. 몇 개월간 시간을 두고 내 필첩을 보며 무슨 일이 일어나나 살피고 있던 건가.


“요 이국사. 대답하라. 미래를 볼 줄 아는 거냐.”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폐하.”

황제 앞에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하지만 내가 예언을 한다는 말을 할 수도 없어서 나는 일단 목숨을 걸고 거짓말했다.

황제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그가 픽 웃으며 물었다.


“그럼 이 일들이 우연이라 주장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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