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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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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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2023.06.26.
유 가주는 심장이 철렁했다. 전하께서 은신처 이야기는 왜 물으시는 거지?
“요즘은 아닙니다.”
의아한 마음을 감추고 유 가주는 아무렇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어쩌면 13황자는 일전에 요요화와 함께 공동 은신처를 얻게 된 일 때문에 저런 질문을 한 건지도 몰랐다.
“요즘은.”
13황자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유 가주의 말을 따라 했다.
유 가주는 심장이 더욱 철렁했다. 그 일 때문에 질문하시는 게 아닌가?
“유 가주.”
“네, 전하.”
“나는 내 사람이 거짓말하는 걸 아주 싫어한다.”
“!”
단순히 그 일 때문에 질문한 게 아니구나! 유 가주는 13황자가 나지막이 한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차를 마시면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전에는 요요화가 왜 은신처를 구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거야 은신처니까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13황자가 지금 하는 말을 들어보니, 요요화가 은신처를 구하는 원인이 13황자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전하께서 노부를 난처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상인은 신뢰가 생명이었다. 유 가주는 일부러 곤혹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말을 돌렸다. 대답을 피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13황자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13황자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서 찻잔을 움켜잡았다.
* * *
내가 월무궁을 혼자 단장하려고 든 게 이 정도로 분노할 일인가. 남은 겨울 동안 제자는 수업 내내 차갑고 싸늘하게 굴었다.
“전하. 있지요-.”
내가 슬그머니 말을 걸어도 “수업하시지요.”라고 딱 잘라 끊어버렸고, 수업이 끝나도 잘 가란 소리도 없이 서책만 뒤적거렸다.
“좋은 아침이에요, 전하.”
월무궁 서재에 들어서면서 아침 인사를 건네면 “네.” 하고 짧게 대답하고서 바쁜 척 서책을 뒤적거리거나 먹을 갈았다.
저 인간의 속내가 늘 왔다 갔다 하는 건 알지만 이번에는 그 시일이 좀 길었다.
‘황제가 내게 필첩 예지에 관해 알려달라고 해서 그런가? ……하지만 폐하는 아직 그 이야기를 해달라며 날 부르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제자는 날 괄시하고, 월무궁 지붕과 벽은 여전히 부실하고, 황제는 가끔씩 린화에게 선물을 보내며 내게도 선물을 보내는 그런 시간이 겨우내 계속되었다.
4황녀의 혼례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궁전은 소란스러워졌으나 구석에 자리 잡은 월무궁에는 그 소란이 전해지지도 않았다.
그러다 4황녀의 혼인을 이틀 앞둔 초봄. 나는 삭막하던 월무궁에서 이상한 변화를 감지했다.
평소처럼 월무궁 대문을 직접 열고 들어와서 서재로 이어진 돌길을 걸어가려는데 옆에서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볕이 적당히 들어오는 정원 한구석에 금빛의 휘황찬란한 평상이 놓여 있었다.
‘저게 뭐야?’
허름한 월무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다가가서 살피니 금빛 평상은 월무궁과 더더욱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평상 주위에서는 고운 흙냄새가 났다. 평상 주위에 내 팔 만한 얇은 묘목이 두 그루 양옆으로 심겨 있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갑자기 뒤에서 들린 소리에 나는 놀라서 몸을 돌렸다. 어느새 온 건지 제자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전하께서 가져다 두신 건가요?”
당연히 그렇겠지만 나는 당황해서 질문했다. 회귀 전에는 월무궁에 이런 가구가 없었다.
“원래는 침상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제자는 돌려서 자신이 가져다 둔 게 맞다고 수긍했다.
“침상이요?”
“하지만 침상을 만들 정도로 많은 금사연석을 구하지 못하여서 평상을 만들었지요.”
“금사연석이요?!”
금사연석 이름을 듣자마자 저절로 목소리가 쭉 올라갔다. 어쩐지 번쩍번쩍하다 했더니! 금사연석 평상이었다고!
“아니 그 귀한 거로 평상을…….”
돈이 많은 사람은 많지만 금사연석은 적다. 이 금빛 나는 돌은 부유한 사람도 구하기 힘들었다.
“스승님이 월무궁을 단장하고 싶어 하시는 듯해 놓았습니다.”
“네?”
“이번 봄엔 힘들겠지만 내년 봄쯤이면 나무가 자라 꽃을 피울 겁니다. 빨리 자라는 묘목으로 가져왔으니까요. 꽃이 피면 평상에서 꽃구경하시지요.”
“네?”
“스승님은 꽃구경을 좋아하시니까요.”
내가 꽃구경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당혹스러운데. 겨우내 나를 냉랭하게 대하더니. 왜 봄이 되자 갑자기 이런 짓을 하지?
제자의 변덕에 머리가 혼란스럽다. 따라가기가 힘들어. 겨우내 날 괄시하고 나니 아주 조금 미안해졌나?
“감사합니다…….”
이해가 가진 않지만 그래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러자 제자는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제 거처를 단장한 것뿐이니까요.”
‘조금 전엔 나 때문에 놓았다면서.’
뭐 어쩌란 거야. 고마워하란 거야 말란 거야. 황당해서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제자가 휙 몸을 돌리더니 자기 서재로 걸어갔다.
“얼른 오시지요. 수업 시간이 지났겠습니다.”
쟤는 정말…… 이해하기가 힘들어.
* * *
4황녀의 궁녀가 신이 난 얼굴로 “전하! 전하!” 하고 외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4황녀는 한 방 가득 쌓인 혼수품들을 살피다가 복도를 보았다. 달려오는 궁녀의 얼굴이 무척 밝은 걸 보니 아주 좋은 소식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냐.”
4황녀는 덩달아 웃음을 띠고 물었다.
정혼을 한 지 십 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혼인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고만 있었다. 이제 혼례를 이틀 앞둔 그녀는 어머니와 오라버니 부부의 난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몹시 들떠 있었다.
“금사연석으로 만든 몹시 아름다운 평상이 월무궁으로 갔다 합니다.”
4황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순비께서 그걸 보고 감탄하면서 13황자가 어떻게 이렇게 좋은 물건을 손에 넣었냐고 물었더니, 운반하는 사람이 선물용으로 어렵게 구하셨다고 대답했대요!”
“선물?”
그 말에 4황녀도 조금 솔깃했다. 지금 궁궐에 선물을 받을 만한 행사를 앞둔 건 그녀 하나뿐이었다. 이틀 뒤가 혼례 아닌가.
“전하께 드리려나 봅니다!”
혼수 품목을 적던 유모 상궁이 환한 얼굴로 외쳤다.
4황녀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설마 그러려고. 나는 열셋째와 이렇다 할 친분이 없는걸.”
하지만 슬며시 올라오는 기대까지 누르긴 어려웠다.
“친분이 없긴 하지만 사이가 나쁘지도 않잖아요.”
소식을 전한 궁녀가 밝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다른 황자황녀들이 13황자를 괴롭힐 때 전하께선 거기에 끼지 않으셨지요. 어쩌면 그 때문에 전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유모 상궁이 얼른 말을 보태자 4황녀는 자기 목덜미를 문지르며 쑥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약한 동생을 괴롭히는 건 할 짓이 아니라고 여겼을 뿐이야. 그런데 열셋째가 그렇게까지 고마워할지 모르겠네.”
그러면서도 4황녀는 새롭게 수리가 끝난 자신의 거처를 떠올리고 거기에 평상을 놓을 부분이 있나 계산해보았다.
아름다운 꽃나무를 여기저기 많이 심었으니 그중 한 곳에 놓으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지요? 13황자께서 전하께 그런 좋은 선물을 준비했다면 전하께서 요요화를 혼내기 좀 곤란할 텐데요.”
그때 내내 조용히 있던 궁녀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 말에 유모 상궁과 밝은 궁녀도 입을 다물고 4황녀를 쳐다보았다. 4황녀도 그 이야기에 난처한지 눈썹을 찌푸렸다.
“13황자께서 좋은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했으니 이번 혼례 때는 요요화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전하.”
이를 보던 유모 상궁이 달래듯 말했다. 사실 그녀는 교비에게 4황녀가 혼례 날에 허튼짓하지 못하게 막으란 지시를 들은 터였던지라, 지금 상황에 안도하고 있었다.
“맞아요 전하. 혼롓날에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이야기만 해야지요. 괜히 요요화 같은 것 때문에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궁녀들도 유모 상궁을 도와서 얼른 말을 보탰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4황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셋째와 요요화는 아직 혼인하지 않았으니 상관없을 거다. 정혼한 지 나처럼 오래된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이미 오라버니와 약조했는데 고작 금사연석 가구 하나 받았다고 약속을 무를 순 없어.”
유모 상궁과 궁녀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곧 그들은 13황자가 이 일로 4황녀를 싫어하게 되더라도 큰 손해는 없으리라 여겼다.
13황자와 4황녀는 어차피 교류가 많지도 않았다. 사이가 멀어지는 걸 거리끼기엔 13황자에게 권한이나 좋은 뒷배가 있지도 않았다.
4황녀가 요요화를 꾸짖는다고 13황자가 기분이 상해 봤자 결국 그에게 손해일 뿐이니, 13황자가 머리가 있다면 말단 관리 정혼녀 하나 때문에 4황녀와 척을 지진 않을 터였다.
“염려 마라. 그래도 열셋째가 성의를 잘 보인다면 그냥 가볍게 꼬투리만 잡고 끝낼 테니까.”
* * *
4황녀의 혼롓날. 어머니는 연회 때처럼 내게 화려한 옷을 입히고 싶어 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미리 거부했다.
“그때도 제가 손꼽히게 화려했어요 어머니. 이번에는 안 돼요. 혼례 당사자가 따로 있는 날이잖아요.”
“신부는 신부복을 입으니 상관없어. 하지만 손님 중에선 돋보여야 아무도 널 무시하지 못하지.”
그거야 황궁만큼 빡빡한 품계가 없는 궁전 밖 기준이다.
궁전 밖에서야 자기보다 더 돈 많고 관직 높은 가문 사람들보다 더 잘 차려입어도 문제 될 게 없겠지만, 황궁에서는 품계에 따라 의상도 눈치를 봐야 한다.
게다가 4황녀는 날 싫어할 거다. 4황녀는 교비의 친딸이자 1황자의 동복동생이니까. 그런 사람이 주인공인 날에 괜히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알았다 알았어.”
결국 어머니가 뒤로 물러났고, 나는 격식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차려입고서 입궁했다.
혼례식은 4황녀가 지금까지 지내온 교비의 궁전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에서 몇 가지 절차를 마친 후 4황녀는 정혼자와 함께 새로운 거처로 가게 된다.
절차는 거의 다 교비 궁전에서 마무리 지어지고, 선물을 올리는 건 새신부와 새신랑이 새 거처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지루하고 판에 박힌 혼례 절차가 끝난 뒤. 마침내 4황녀 부부와 손님들은 새롭게 단장한 백림각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부부를 축하하기 위해 전각 안은 온통 금빛 휘장을 둘러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4황녀는 새신랑과 즐겁게 웃으며 떠들다가 마침내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4황녀 부부를 위한 의자가 가장 상석에 놓여 있었고, 황제와 황후의 자리는 오늘만큼은 상석과 비스듬하게 비껴간 자리에 마련되어 있었다.
4황녀와 새신랑이 의자에 앉자 손님들이 한두 마디씩 덕담을 던지며 선물을 가져가 건네기 시작했다. 신부 측에서 한 명 신랑 측에서 한 명 번갈아 가는 순서였다.
그러다 마침내 제자의 순서가 돌아왔다.
2황자비 부부는 이미 혼인을 했기에 둘이 같이 나가 선물을 하나만 건넸으나, 나와 13황자는 아직 혼인한 게 아니기에 따로 나아가야 했다.
제자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걸어가 혼례식 내내 들고 다니던 상자를 내밀었다. 내가 보기엔 그냥 조그만 상자인데, 4황녀는 뜻밖에도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걸 받아들었다.
“고마워 열셋째.”
그러고는 상자 뚜껑을 열더니, 안에서 귀엽게 생긴 목걸이를 꺼내 들며 웃었다.
“정말 예쁘네. 정말 고마워!”
내가 보기엔 좀 성의 없는…… 선물 같은데. 의외로 좋아하네? 저런 취향이었나?
의아해서 보고 있자니 제자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생은 가진 게 많지 않아 형님 누님들만큼 좋은 선물을 고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거리끼지 않고 받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좋은 선물을 고르지 못하기는. 열셋째 선물이 손꼽히게 좋은걸. 고마워.”
“그저 보석이 조금 박힌 목걸이일 뿐인걸요.”
그런데…… 뭐지? 제자의 말에 4황녀의 표정이 갑자기 주춤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자기 손에 든 목걸이와 제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곧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상한 건 그녀의 뒤에 선 상궁과 궁녀들조차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왜 저러지?’
“그래.”
그러더니 4황녀는 갑자기 냉랭한 말투로 말하고서 목걸이를 상자에 대충 툭 담아 뒤에 선 상궁에게 건넸다.
“왜 저러는 걸까요?”
그 모습에 근처에 선 다른 손님도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심지어 친모인 교비마저도 ‘쟤가 왜 저러지?’ 하는 표정이었다.
문제는…….
“요 대인. 이제 요 대인 차례십니다.”
4황녀가 왜 갑자기 화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다음 차례가 나란 점이었다.
당혹스럽지만 앞으로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었던 목함을 내밀자 4황녀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상자 뚜껑을 열더니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부부가 쌍으로 목걸이를 주네.”
사람들이 그 말에 작게 웃어댔다.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서 같이 웃자, 4황녀는 목걸이를 한 손으로 집어 올려서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목걸이를 상자에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열셋째와 요 이국사는 내게 굳이 목걸이를 준 거지?”
“13황자께서 뭘 준비하는지 저는 몰랐습니다, 전하. 제가 목걸이를 고른 건 아름답고 귀한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귀해?”
그 말에 4황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비웃더니 목걸이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런 하품 중에 최하품 목걸이를 혼례 선물로 내밀면서 아름답고 귀하다니. 열셋째야 가진 게 없어서 싸구려 선물을 주어도 고맙다고 했지. 하지만 요요화, 자네는 요씨 가문 적녀 아닌가. 그런 것치곤 너무 선물이 보잘것없군.”
그 말에 손님들이 수군거리며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들이야 먼발치에 있는 목걸이가 비싼 건지 싼 건지 알 길이 없으니, 황녀가 저렇게 화낼 정도면 얼마나 싸구려를 주었나 여길지도 몰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4황녀는 한숨을 내쉬며 목걸이에서 무언가를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게다가 이게 뭐지? 선물에 하얀 가루가 묻어 엉망이군. 대체 내게 뭘 준 건가.”
‘일부러 시비 거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