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나한테 너무 의지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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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나한테 너무 의지하지 마세요
2023.07.03.
“전하? 뭐 하시는 거예요?”
왜 남의 술잔을 위에서 눌러?
“셋째 형님이 보이지 않는군요.”
제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요?”
나는 아무 상관없는 척 되물었다.
“스승님이 빈자리를 살피더니 갑자기 술잔을 집으셔서요. 혹여 셋째 형님이 보이지 않아서 술을 찾으시나 생각 중이랍니다.”
예리한 놈. 제자가 정확히 정곡을 찌르는 바람에 순간 호흡까지 꼬여버렸다.
“전혀 관련 없어요.”
그래도 모른 척 발뺌하자, 제자는 빙그레 웃더니 내 손을 툭툭 쳐서 치우게 하고는 내 술잔을 가져갔다.
그 꼴을 기가 막혀서 쳐다보고 있으려니, 제자가 자기 잔을 내게로 건넸다.
“이거나 드시지요. 물입니다.”
“제가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전하가 신경 쓸 부분은 없어요.”
“제자는 장차 스승님의 남편이 될 사람입니다.”
“아직 아니잖아요. 그리고 전하가 제 남편이 되어도 제가 뭘 먹고 마시는지 간섭하실 순 없어요.”
제자의 입꼬리가 얄밉게도 올라간다.
“제자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군요.”
그를 째려보고 있으려니, 제자는 내게서 뺏은 술을 한 번에 제 입에 털어 넣었다.
“전하. 그거 아세요? 전하는 정말 나쁜 분이세요.”
“술은 제자가 마셨는데 취하긴 스승님이 취하셨군요.”
“맨정신인데요.”
“맨정신에 그리 무엄한 말씀을 하시고. 참으로 대견하십니다.”
“!”
내가 오그라들어 조용해지자 제자는 코웃음을 치고서 다시 물을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그를 째려보다가 나도 술 마시기는 포기하고 음식만 집어 먹었다.
그냥 빈자리 좀 본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저렇게 화를 내다니. 화는 내가 내야 하지 않나?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4황녀가 선물을 받았을 때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분명 처음에는 좋아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급격히 기분이 나빠진 걸까?
‘제자가 또 뭔가 꿍꿍이를 부린 거 아니야……?’
* * *
제자의 표정은 연회가 파한 후. 같이 월무궁으로 잠시 걸어가다가 더욱 일그러졌다. 황제가 보낸 송 태감이 길목에 서 있다가 날 부른 것이다.
“요 대인. 폐하께서 요 대인을 잠시 부르셨습니다.”
제자는 예고해둔 바대로, 황제가 날 불렀단 말을 듣자마자 송 태감이 눈치를 주는데도 모른 척 따라왔다.
황제는 내가 제자와 같이 나타나자 잠시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어리둥절한 듯했으나 빠르게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는 제자에게 왜 따라왔냐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고 내 쪽을 향해 바로 말을 걸었다.
“오늘 참으로 고생이 많았구나 요 이국사.”
“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걸요.”
“마음고생도 고생 아니냐. 짐이 아니었더라면 경은 오늘 곤경에 처했겠지.”
황제가 이맛살을 구겼다.
“이국사가 재주가 있으니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에게 공격받는구나.”
“황송합니다, 폐하. 그래도 익숙해져야지요.”
나는 공손하게 겸양하며 두 손을 가만히 모았다. 옆에서 제자가 희미하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으나 무시했다.
황제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제자에게 지시했다.
“화려. 네가 요화를 잘 챙기도록 하라.”
제자가 곁에 있어서 황제는 일부러 필첩이나 미래 이야기는 하지 않는 듯했다.
‘다행이야.’
나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모으고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걸로 위기를 벗어났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음날. 수업을 위해 월무궁에 돌아와서 보니, 제자는 나를 잘 챙기기는커녕 노골적으로 내게 불만을 드러냈다.
내년 봄에 꽃놀이하라면서 제자가 월무궁 정원에 가져다 놓은 금사연석 평상이 사라진 것이다.
설마 설마 생각하면서 평상이 있던 자리로 가보니, 평상이 놓여 있던 자리에 흙이 움푹 패 있었다. 그 옆으로 앙상한 묘목 두 그루만이 그대로였다.
“전하. 평상이 하루 사이에 없어졌어요.”
그래도 혹시 다른 연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서재로 들어가며 지적하자 제자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서 대답했다.
“스승님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듯하여 치웠습니다.”
“마음에 들었는데요.”
“아쉽군요. 하지만 이미 치웠으니 다시 원하신다면 스승님을 지극히 아끼는 부황에게 청하시지요.”
“…….”
어디서 이렇게 치졸한 사람이 나타났을까. 불끈 치솟는 불만을 가리기 위해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막았다.
“스승님은 표정을 숨기기 힘들면 얼굴을 가리시는군요.”
제자는 그조차 놓치지 않고 조롱해댔다. 아무래도 제자는 어제 황제가 날 부른 일로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겨우내 화를 내더니. 이젠 봄 내내 화를 내려나.
“알았습니다. 전하께서 마음에 안 드신다면 치워야지요.”
하지만 나는 연상이기에 그의 치졸하고 조그맣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부지깽이 같은 불만에 휘말리는 대신 침착하게 대꾸하며 자리에 앉았다.
“수업하겠습니다.”
내가 달아나게 되면 기필코 네가 지내는 땅 밑에다가 네 욕을 백 장 적어 묻어놓고 갈 거다.
제자는 아무 말 없이 책장을 한 장 더 넘겼다.
나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서 오늘 수업할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세 줄을 채 읽기도 전에 문밖에서 “전하.” 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귀 목소리?’
힐긋 제자를 보았다. 운귀 목소리 같은데. 내가 여기 있어도 되나? 운귀는 공식적으로는 6황자의 측근 태감이고, 나는 아직 제자의 패거리에 속하지 않았잖아.
“들어와라.”
그러나 제자는 거리낌 없이 그를 불렀다.
오히려 방 안으로 들어오던 운귀가 들어오다가 날 발견하고 뒷걸음질 쳤다. 그가 ‘진짜로 들어와도 되냐’는 듯 제자를 보았다.
“괜찮다. 스승님 앞에서 숨길 일은 없지.”
제자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운귀에게 더 들어오라 손짓했다.
운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방 중앙까지 걸어왔다.
‘내가 회귀를 했나 안 했나 이 순간에도 시험하는 건가?’
일단 놀란 표정을 짓고 있자.
운귀는 제자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제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입을 열었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4황녀께서 폐하께 미움을 받았다고 신혼 첫날밤 밤새 내내 울면서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게 큰일인가?”
“네. 그러고 나서 깨어나지 않고 계셔서요.”
제자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래?”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에 놀란 부마가 어의를 불러 진맥해보니, 4황녀의 몸에서 독이 나왔답니다.”
“!”
이번에는 제자도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그야말로 아주 조금이지만.
하지만 난 진짜 많이 놀랐다. 이건 회귀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부황께서는?”
“몹시 진노하셔서 범인을 찾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곧 폐하의 태감이 와서 전하와 요 대인도 부를 겁니다.”
“나는 왜 부르는가?”
나는 되도록 가만히 있으려다가 끼어들어 물었다. 나는 4황녀랑 따로 본 일도 없는데 불려갈 이유가 없지 않나?
운귀가 내 쪽으로 몸을 약간 돌리며 대답했다.
“어의 말로는 술에 독이 섞여 있던 건 아니라 하였습니다. 독을 먹은 건 어젯밤이라 하였지요. 시간상 연회가 끝난 후이긴 하지만 그래도 연회 때 사람들이 많이 모였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페하께서 모두를 부른 듯합니다.”
운귀는 나와 13황자를 번갈아 보더니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소인은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6황자가 찾을까 봐 그런 거겠지. 제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귀는 바로 밖으로 나가더니 발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졌다.
나는 제자를 쳐다보았다. 제자는 한쪽 팔로 턱을 괴고 가만히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했으나 매우 놀란 기색은 없었다.
그러다 제자도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혹시 전하께서 한 짓이에요? 목구멍까지 질문이 치밀어 올랐으나 가까스로 억눌렀다.
회귀 전 제자가 4황녀를 처리한 수법은 이렇지 않아. 꼭 제자란 법은 없다. 암암리에 황위 다툼을 한 건 제자뿐만이 아니니까.
“당혹스럽지만 부황이 부르면 가야겠군요.”
“그러네요.”
“스승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야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인걸요.”
* * *
머지않아 운귀의 말처럼 황제가 보낸 태감이 찾아와 말했다.
“13황자 전하. 요 대인. 페하께서 당장 백림각으로 오라 명하셨습니다. 신속히 와주시길 바랍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뜻밖에도 제자가 다가오더니 내 손등을 자기 손등으로 툭 두드렸다.
문가로 걸어가다가 놀라 쳐다보자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상은 장식 세공을 추가하러 보냈습니다.”
“!”
태감이 앞서 걸어가다가 무슨 말인가 싶은지 뒤를 힐긋거렸다.
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 인간이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아까는 치워버렸다더니. 치운 게 아니란 이야기를 왜 지금 해주지?’
그 고민을 하느라 막상 백림각에 도착했을 땐 4황녀와 독에 관한 생각은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하지만 황제 앞에서 얼빠진 채 생각에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진지하고 무거운 표정을 꾸며내고서 백림각 안으로 들어갔다.
4황녀의 침방에 들어가니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4황녀는 침상에 누워 있었고, 부마는 그녀의 머리맡에 서서 침통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황후는 나와 13황자가 오는 걸 힐긋 보았지만 아는 척하는 대신 부마에게 물었다.
“그 말이 정말이냐?”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얘기가 오가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지 다시 들려달라고 하면 안 될 상황이라 나는 눈치껏 귀를 기울였다.
“예, 황후마마. 황녀께선 폐하께 오해를 산 걸 슬퍼하시며 이대로 죽고 싶단 말을 밤새 내내 하셨습니다.”
침대를 둘러싸고 있던 궁녀들이 얼른 말을 더했다.
“저도 들었습니다, 마마. 술을 새로 가져오라 하여 술주전자를 들고 들어가니 계속 그렇게 중얼거리며 울고 계셨어요.”
부마가 황제와 황후에게 4황녀가 죽고 싶단 말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었구나.
황제는 침통한 얼굴로 4황녀를 내려다보았다.
“말도 안 됩니다!”
교비는 손수건으로 계속 눈가를 닦고 있다가 황제 앞에 무릎을 꿇으며 소리질렀다.
“폐하, 4황녀는 혼인하게 되어서 내내 기뻐하고 있었어요. 폐하께 어제 꾸중을 듣긴 했지만 그거야 시일이 지나면 괜찮아질 일이었습니다. 4황녀는 폐하의 자식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일로 자결하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죽고 싶단 말은 감정이 북받치면 그냥도 하는 말 아닙니까!”
1황자 역시 눈가가 빨개져서 동생을 바라보았다.
후궁들과 다른 황자 황녀들도 서로를 쳐다보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나와 13황자 다음으로 뒤늦게 도착한 이들은 우리처럼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뒤쪽으로 가서 섰다.
“요요화.”
그때. 어두운 얼굴로 교비의 머리를 바라보던 황제가 난데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사람들이 동시에 내 쪽을 쳐다보았다.
아니…… 나도 모르겠어. 왜 갑자기 날 부르지?
“예, 폐하.”
이유를 모르겠지만 앞으로 세 걸음 나아가자, 황제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짐과 얘기 좀 하지.”
‘설마. 나한테 이 일을 예지했냐 물어보려는 건가!’
아니길 바라지만 황제가 이 와중에 날 불러서 질문할 거라고는 그뿐이었다.
황제가 문밖으로 나가자 송 태감이 나를 쳐다본다. 힐긋 제자를 보니 제자는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황제를 따라 나갔다. 황제는 문 앞에 뒷짐을 지고 있다가 내가 나오자 다시 앞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라 걷자 황제가 침방에서 조금 떨어진 후원으로 걸어갔다. 황제는 인적이 없어진 곳에 도달하자 송 태감에게 물러나라 눈짓했다.
송 태감과 호위들이 거리를 벌리고 서자 황제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경은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알고 있었느냐.”
“아닙니다, 폐하. 근래 일어날 일 중 소신이 아는 건 2황자비 전하의 회임뿐입니다.”
황제는 품 안에서 필첩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혹시 모르니 찾아봐라.”
‘회귀 전엔 없던 일인데 찾는다고 알 리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