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조금도 안심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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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조금도 안심되지 않는
2023.08.07.
선남선녀가 흐드러진 노란 꽃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특히 교비의 눈에는 더욱 그랬다.
“아주 잘되었구나.”
교비의 입꼬리가 만족스레 올라갔다.
“정말 잘되었어.”
교비의 상궁은 제 주인처럼 대범하지 못했다. 신분이란 방패가 없기 때문이었다. 일이 잘못되면 주인의 죄를 덮어쓰는 일이 허다하기에, 상궁은 초조해하며 물었다.
“괜찮을까요? 1황자비 전하는 왜 이런 일에 마마를 끌어들이는지 모르겠습니다. 1황자 전하께선 난균을 불렀으니 요 귀인은 1황자비 전하가 부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위험한 일은 모두 마마께 떠맡기고 뒤에 빠져 있으려는 게 아닐까요?”
교비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1황자비가 그녀를 대하는 게 이전과 달라졌다는 건 교비도 알고 있었다. 총애를 잃었을 즈음부터 점점 그런 기색이 보이다가 1소황자를 빼앗긴 이후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1황자비와 1황자는 혼인한 사이였고 한배를 타고 있었다.
“괜찮을 거다. 우리는 저들이 잠깐 마주치게 했을 뿐이지. 저들이 서로에게 마음이 없다면 몇 번을 마주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우리는 헛수고를 한 게 될 거고.”
교비는 뒤로 돌아섰다.
* * *
‘용정이 외국인이라서 호기심을 누르고 얌전하게 지내나?’
늦은 저녁.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침상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영리한 용정이 왜 날 찾지 못하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혹시 제자가 중간에서 방해하나?
‘용정이 사파 무림인들이 다니는 골목길에서 얻어맞고 있었지. 그 일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나?’
“소가주님.”
그때 문이 열리고 내 시비인 월섬이 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래?”
베개를 계속 끌어안고서 묻자 월섬이 눈짓으로 문 너머를 가리켰다.
“밖에 요 소저가 오셨어요.”
“죄다 요 소저잖아.”
“도화 소저요.”
도화는 첫째 숙부의 서녀 넷째딸이었다. 나는 사촌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으니 당연히 그 애와도 데면데면했다.
“날 왜 찾아왔대?”
월섬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월섬도 모르겠지.
나는 베개를 내려놓고 일어나 얼른 옷을 정돈했다.
월섬은 밖으로 나가 도화를 데리고 들어왔다.
“언니. 늦은 밤에 미안해요.”
도화는 단정한 차림으로 들어와서, 가족끼리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괜찮아. 월섬, 도화한테 차를 가져다줘.”
도화가 금방 나갈 생각이라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도화는 거절하지 않았다. 월섬이 청정차를 타와서 내려놓고 나가자 도화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언니. 언니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월섬한테 내 차도 가져다 달라고 할걸.
“언니. 용 공자를 알지요?”
아니, 안 가져오길 잘했다. 지금 차를 마시고 있었다면 잠깐 사레에 들릴지도 몰랐다.
다행히 아무것도 마시던 중이 아니었기에 나는 멀뚱멀뚱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게 누군데? 이름을 다 말해주어야지.”
“용정이란 남자예요. 외국에서 왔어요.”
“아. 태월 사람이지? 알지. 이름은 들어 봤어.”
객잔 주인이 말한 ‘내가 너무 바빠서 대신 온’ 사촌 소저가 얘구나. 그걸 이실직고하러 왔나?
요도화는 조심조심 차를 마시면서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내 반응을 확인하고 싶은 듯했다.
“그런데 네가 그 사람 이야기를 왜 물어? 너랑은 만날…… 일이 없지 않나?”
떠보듯 물어보자 요도화는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언니가 알고서 모른 척하는지 아니면 구하긴 했지만 이름을 모르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며칠 전에 사람을 구한 일은 기억하겠지요. 언니가 구한 사내 이름이 용정이에요.”
정말로 이실직고하러 왔나?
“아. 그 사람. 기억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모른 척 기쁜 듯이 물었다.
“왜? 그 사람이 혹시 날 찾아? 이제 괜찮아졌나?”
“실은 언니. 제가 그 사람의 은인인 척하고 있어요.”
오. 이 정도로 솔직하게 다 얘기할 줄은 몰랐는데?
“정말이야?”
눈을 일부러 커다랗게 뜨고 목소리를 높이자 요도화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그랬어?”
“미안해요.”
질책하는 투로 묻자 요도화는 두 손을 꼭 모았다.
“뭐라고 변명하든 언니는 기분이 나쁘겠지요. 하지만 언니가 그분을 두고 떠났잖아요. 그래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언니는 13황자 전하를 사모하니까 일부러 떠났다고 여겼어요.”
“그거랑 네가 내 흉내를 내는 건 별개지. 누가 내 흉내를 내면 기분이 나빠.”
“언니 흉내를 내는 건 아니에요. 그분은 언니가 자기를 구했단 외엔 아무것도 언니에 대해 모르는걸요. 전 그분 앞에서 그냥 제 모습으로 있어요, 언니.”
“만나봤구나.”
“언니…….”
갑자기 요도화가 슬픈 표정을 하고서 울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정말로 미안해요. 하지만 언니, 전 그분을 사모하고 있어요.”
몇 번 봤다고……?
“제가 언니처럼 떳떳한 정실부인 소생 규수라면 그분에게도 솔직하게 말했을 거예요. 그분을 구한 건 내 언니이고, 언니는 정혼자 눈치가 보여서 나오기 곤란했다고요.”
얘 은근슬쩍 자꾸 내 정혼자 이야기를 계속하네?
“처음엔 사실대로 이야기하려 했지만 그분을 뵙고 나서 반해 버렸어요. 반하고 나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어요. 언니, 저는 서녀잖아요. 그분은 저랑 달리 번듯한 가문의 관리인걸요. 게다가 초혼이니, 저는 그분과 혼인할 수 없을 거예요.”
“네가 뭘 말하려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부러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서. 네가 거짓말 하는 걸 모른 척해달라고?”
“네. 언니, 그분도 저를 보고 한눈에 반한 눈치였어요. 제가 그분의 은인이라고 하면 그분의 가문에서도 제가 서녀란 이유로 무작정 반대하진 못할 거예요. 언니, 제발 저를 가엾게 여겨서 이 일은 모르는 척해주세요.”
요도화는…… 영리하구나.
모른 척 그냥 용정을 낚아채 가지 않고 굳이 내게 그 일을 이야기해서 자기 거짓말에 날 끌어들여 버리네.
게다가 동정심에 호소하면서 거절하면 내가 냉정한 사람인 것처럼 만든다.
이랬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이미 언니와 얘기가 끝났다’는 식으로 둘러대려는 거겠지. 자기 이득을 노리면서도 손해 볼 길은 확실하게 막아두는 수였다.
“언니. 많이 화났나요?”
요도화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물었다.
용정이 왜 날 안 찾아오나 했더니. 이런 미인에게 홀딱 반해서 그렇구나! 아이고 머리야.
* * *
‘이건 제자 짓이 아니겠지?’
다음날. 월무궁으로 걸어가고 있자니 습관적으로 제자부터 의심이 갔다. 제자가 내 사촌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진 않지만…….
그래도 왜 무슨 일이 생기면 제자가 가장 먼저 의심스러운지 모르겠다. 이것도 편견인가.
이 때문에 나는 수업하는 내내 제자에게 이 일을 묻지 않으려 애썼다.
‘제자가 용정 건에 대해 알아보더라도 뭐 어쩔 거냐’는 생각에 일을 진행하긴 했지만, 그에게 대놓고 용정 일을 묻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제자도 오늘은 시비를 걸지도 찝찝하게 가깝게 붙지도 않았다.
그런데 수업을 끝내고 돌아가는 도중. 평소 황제의 측근 태감이 날 기다리는 길목에 뜻밖에도 린화의 사가 궁녀인 월채가 서 있었다.
“월채야? 여기서 뭐 하느냐?”
날 보러 왔나? 의아해서 다가가 묻자 월채는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소가주님, 절 좀 도와주세요.”
“왜? 무슨 일 있어?”
그런데 왜 그걸 린화한테 말하지 않고 나한테 말하지? 린화가 처리하기 어려운 일인가?
“말해봐. 도와줄게.”
어쨌든 우리 집에서 있다 간 아이인지라 나는 월채를 안쪽으로 데려가며 물었다.
월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소매로 눈가를 닦고서 앞장섰다. 따라오란 건가?
내가 따라서 걷자 월채는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을 즈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가주님, 우리 소주 좀 말려주세요.”
“린화가 또 사고를 쳐?”
“아직 친 건 아닌데, 치실 것 같아요.”
월채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어제 교비가 불러 대화원에 갔다가 우연히 난균과 만난 일을 알려주었다.
마주친 건 우연인데 두 사람이 그때 대화를 나누면서 주고받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고 말이다.
“우리 소주가 누구 이야기를 할 때 그런 표정을 짓던 건 선안 공자뿐이었거든요.”
월채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덩달아 등골이 오싹해졌다. 예시가 선안이라니.
게다가 월채는 모르겠지만, 나는 린화와 난균이 얼마나 서로를 흠모하는 한 쌍이 됐었는지 알지 않는가.
“이쪽이에요. 오늘도 두 분이 대화원에서 만나서 살짝 얘기를 나누고 계세요. 궁녀들에게 떨어져 있으라고 해서 저만 살짝 빠져나왔어요.”
월채를 따라간 곳에는 과연 다른 사가 궁녀인 월미가 발을 구르고 있었다.
나는 월채와 월미에게 조용히 하고 있으란 신호를 보내고서 살금살금 기척을 죽이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꽃과 나뭇잎이 장막처럼 흐드러진 곳 너머에 난균과 마주보고 선 린화가 보였다.
“요린화!”
거기에 대고 이름을 부르자 린화와 난균이 동시에 뒤로 두세 걸음씩 물러났다.
“언니?”
린화는 휙 고개를 돌렸다.
“언니가 왜 여깄어?”
“내가 여기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저 도령이 여기 있는 게 문제지.”
나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하고서 난균을 쳐다보았다.
“오해입니다, 낭, 이국사.”
난균은 손을 저으면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꽃이 아름답게 피어 구경하던 중에 우연히 마주친 겁니다.”
“난 공자. 난 공자는 아직 과거 공부 중이라 알고 있는데요.”
“!”
“왜 여기에 계십니까?”
내가 난균에게 매정하게 묻자 린화가 내 등을 뒤에서 퍽 내리쳤다.
“언니. 뭐 하는 거야. 왜 그래?”
“너랑 난 공자는 떳떳하겠지만 이런 상황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오해를 사기 쉬워. 특히 난 공자는 아직 관리가 아니라 궁에 올 일도 없잖아.”
“1황자 전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부탁받은 일이 있어서요.”
난균이 절대로 아니란 듯 변명했으나 1황자 이야기를 듣자 불안한 마음은 한층 커졌다. 진짜 우연히 마주쳐도 불안할 판인데. 1황자 부름으로 왔다고?
“그렇군요.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제 동생은 폐하의 후궁이니까요.”
단호하게 말하고서 팔을 잡아당기자 린화가 마지못해 따라왔다. 하지만 난균이 근처에 없어지자마자 린화는 내 팔을 힘주어 뿌리쳤다.
“미쳤어? 거기서 언니가 그러면 내가 뭐가 돼?”
“미쳤냔 소리는 내가 하고 싶다 내가. 1황자 식구가 우리 식구를 싫어하는 걸 몰라? 1황자가 난균을 부르고 교비가 널 불렀는데 이상하단 생각 안 들어?”
“!”
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듣고 나니 이상하긴 한 모양이다. 이에 안심하고서 앞으로 조심하라고 말하려는데, 린화가 매몰차게 돌아서며 경고했다.
“내 일에 참견 좀 하지마. 지금은 내가 언니보다 더 귀한 몸이야.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고.”
“네가 그러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우리 가족까지 피를 보니까 그러잖아.”
“나랑 난 공자는 떳떳해. 그러면 된 거야.”
차갑게 말한 린화는 성큼성큼 멀어졌다.
아아…… 진짜 저 망아지.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