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바꿔서 하는 거짓말 (151/159)


151화. 바꿔서 하는 거짓말
2023.08.10.



 


“난균과 요 귀인이 잘 만나고 있습니다. 사람들 눈을 피해 만나고 있지만 1황자비 부부와 교비가 이미 알고 있으니 정이 깊어지면 꼬리가 잡히겠지요.”

보고를 마친 운귀는 입을 다물고 화려의 반응을 살폈다. 화려는 일전 그의 생일 때 스승이 그려주었다는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하?”

하도 기다려도 대답이 없기에 운귀가 재차 부르자, 화려가 그림을 접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형님은 쓸모가 없어졌구나.”

“!”

운귀는 고개를 숙이고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는 화려의 속내를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하고서도 주군을 믿었기에 운귀는 빠르게 평온을 되찾고 물었다.


“어찌할까요?”

 

* * *

오랜만에 1황자와 1황자비 부부는 금실 좋은 모습으로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요린화와 난균이 대화원에서 연이어 만남을 가진단 보고를 들어서였다.

이제 시간이 흘러가면 두 사람은 선을 넘을지도 모른다. 황제가 요 귀인에게 분노하면 요요화 역시 덩달아 찬밥이 될 것이다. 갈 곳을 잃은 어심은 옛 정인을 찾지 않을까?


“입궁했으면 이미 폐하의 여인인 것을. 참으로 간도 큽니다.”

1황자비는 요 귀인의 아름다운 외모를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잠깐의 연심 때문에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멍청한 짓을 왜 하려는 걸까.

그러다 1황자비는 1황자의 태감 하나가 이상하게 구는 걸 발견했다. 태감은 초조한 표정으로 연신 몸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지?”

그 모양새가 영 이상해서 말을 걸자, 태감은 흠칫하더니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아닌 사람 치곤 영 상태가 나빠 보이는데?”

1황자도 사과를 먹다가 그쪽을 보고서 말을 보탰다.


“그러고 보니 안색이 유독 안 좋군. 몸이 아프면 가서 쉬도록 해라.”

태감은 나가지 않고 꾸물거렸다. 그 굼뜬 모습에 1황자는 눈살을 구겼다.


“쉴 거면 가서 쉬고 아니면 제대로 서 있어라.”

그러자 태감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물었다.


“전하. 혹시 그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소식이라니?”

1황자는 손잡이에 느긋하게 기댔던 몸을 바로 하며 물었다. 태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게…… 1소황자님께서 선한궁에서 방치되고 있단 소문입니다.”

“뭐라고?!”

1황자비가 벌떡 일어나며 언성을 높였다. 태감은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그게 무슨 소리냐. 춘운이 방치되고 있다니! 소상히 말하거라!”

1황자가 목베개를 두드리며 외치자 태감은 고개를 숙이고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인도 제대로 아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원비 마마께서는 1소황자님께 전혀 관심이 없으셔서 육아 경험도 없는 궁녀 하나를 붙여 아이를 돌보게 하신답니다. 궁녀는 경험이 없다 보니 그냥 먹이고 재우고 씻기는 외엔 전혀 1소황자님을 돕지 못하고요.”

1황자 부부의 얼굴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내 아기!”

이야기가 끝나자 1황자비는 책상을 쓸어 사과 접시와 찻잔을 다 엎어 버렸다. 그녀는 얼굴을 손에 묻고 흐느꼈다.

이야기를 전한 태감은 슬며시 1황자 부부의 눈치를 살피며 주춤주춤 허리를 폈다.

* * *



“우리 춘운이는 몸이 약하긴 했어도 챙김 받는 거론 고생한 적이 없는 아이입니다, 전하.”

늦은 밤 둘만 남게 되자 1황자비는 1황자의 옷자락을 잡고서 울었다. 내내 울다 멈추기를 반복한 터라 그녀의 눈가는 빨갛게 퉁퉁 부어 있었다.


“황후 마마와 원비 마마가 참으로 너무합니다.”

1황자도 화가 나서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들 부부가 아이를 제대로 기르지 못한단 핑계로 1소황자를 데려가 놓고서는 방치하고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다시 운이를 데려와야 해요.”

1황자비는 거의 1황자의 멱살을 잡을 태세로 옷깃에 계속 매달렸다.

1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리 부부가 기를 수 없다면 최소한 우리 어머니께라도 맡겨야 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선 우리에게 화가 나 계시니…… 우리 말을 들어주실까요?”

절대로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1황자는 머리를 짚고서 열심히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황제가 이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아이를 돌려줄까?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1황자가 계책을 짜내지 못하자, 1황자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선 사실인지부터 확인해야겠어요.”

“어떻게요? 우리가 찾아가면 안에 들여보내 주지도 않는걸요.”

“그 들여보내 주지 않는 걸 문제 삼으면 돼요. 문제가 없다면 들여보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1황자비는 1황자의 옷깃을 놓고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당신 지지자들에게 이 일을 호소하게 해봐요. 방치된다느니 하는 말은 꺼내지 말고 딱 이 일만 들먹여서요.”

 

* * *



‘2황자비도 회임한 지 거의 여섯 달이 다 되어 가는구나.’

2황자비가 아이를 낳으면 권력 구도가 순비 쪽으로 가겠지. 제자가 안정적으로 변한 그 구도를 어떻게 뒤흔들었더라?

회귀 전 일을 떠올리면서 얇은 붓으로 종이에 이것저것 적어 보고 있을 때였다.


“소가주님, 가주 나리께서 오셨어요.”

내 시비인 월섬이 차를 가져와 내려놓으며 알려주었다.

곧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궁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상석에서 일어나며 묻자 아버지는 의자에 앉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궁궐이 또 한바탕 시끄러울 것 같구나.”

“왜요?”

“어전회의 때 몇 대신들이 원비가 천륜을 끊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1소황자를 양육하는 거야 황후 마마의 지엄한 명이 있었으니 당연하다지만, 황후 마마는 천륜을 끊으라 하신 게 아닌데 아예 부모 누구에게도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는 건 너무한 처사라고 말이다.”

“원비 쪽에선 뭐라 해요?”

“아직 대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어라 하겠지.”

아버지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더니, 아까 월섬이 가져다준 내 찻잔을 가져가며 당부했다.


“요화야. 이런 시기엔 불똥이 튀지 않게 몸을 사려야 한다. 다행히 13황자께선 권력 구도 밖에 계시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특히 너는 폐하께서 각별히 여기시지 않느냐.”

“네에…….”

“폐하께서 이 일에 대해 네 의견을 묻더라도 나서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고 넘어가도록 하거라.”

“알았어요.”

그리고 지금 우리 식구는 원비랑 1황자가 아니라 린화를 단속할 때예요 아버지…….

* * *

아직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부모님에게 린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궁중 일에 관해 몇 마디 더 충고를 하고 나갔지만, 나는 결국 끝까지 린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 탓에 마음이 갑갑해져서 한밤중에 혼자 집 근처를 배회하고 있을 때였다. 긴 손잡이에 등롱을 매달고서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데 멀찍이서 사각 등롱 하나가 둥실둥실 다가오는 게 보였다.


“전하?”

뜻밖에도 등롱을 들고 나타난 건 제자였다. 당황해서 멈춰서 있자니 제자는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이 늦은 시간에 위험하게 뭘 하시는지요?”

“여긴 저희 집 앞인데요? 전하야말로 여기 왜 계시는 거예요?”

나는 손가락으로 궁전을 가리켰다.


“전하 집은 저기잖아요.”

“…….”

제자는 덩달아 고개를 돌려 궁전을 힐긋 돌아보더니, 태연하게 다시 날 보고 서며 대답했다.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 것치곤 너무 교묘하게 나타나셨는데요.”

“우연입니다.”

“이런 우연이 어디 있어요? 전하, 소신의 집 주변을 맴도신 건가요?”

제자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내가 계속해서 캐묻자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 표정 때문에 나는 더 캐묻지 못하고 궁전을 가리키던 손도 내렸다. 그러고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우리 집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소신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저 지나가세요.”

나는 꾸벅 인사하고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무섭습니다.”

그러나 내가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제자가 그렇게 말하더니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예?”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어 쳐다보자, 제자가 얼음장 같은 얼굴로 내 소맷자락을 살짝 붙들었다.


“늦은 시간이라 혼자 돌아가기 무섭습니다, 스승님.”

“여기까진 누구랑 오셨는데요?”

“등불이랑요.”

“그럼 등불이랑 계속 같이 가세요…….”

혼자서 지옥도를 걸어 다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인간이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제자가 내 말에 눈살을 구기기에, 나는 그에게 내 등불도 건네주었다.


“등불 두 개면 안 무서우시겠지요?”

 

 
여기서 제자랑 마주칠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이 한밤중에 혼자 나오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제자는 내 등불을 받는 대신 한 손으로 뒷짐을 지고서 오만하게 말했다.


“무서우니 스승님께서 바래다주시지요.”

뭐라?


“제게 전하를 이 오밤중에 바래다 달라고요?”

황당해서 되묻는데도 제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심지어 뒷짐 진 걸 풀고 자기 손을 내밀기까지 했다.


“바래다주십시오 스승님.”

“…….”

 

* * *

아무리 봐도 제자가 나를 놀려 먹느라 이러는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제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마지못해 궁전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한밤중이라 거리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제자와 나뿐이었다.


‘아씨. 제자를 바래다주는 거야 그렇다 쳐도 돌아올 땐 진짜 무섭겠네.’

“스승님.”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자니, 제자가 옆에서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힐긋 돌아보니, 그는 자기 사각 등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요?”

“스승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시는지요?”

“사내요?”

“사람이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전하.”

“아무나 다 좋아서요?”

왜 자기가 질문하고 자기가 비꼬는 거지?


“그럴 리가요.”

“그래도 어떤 사람이 좋고 어떤 사람은 싫고, 이런 기준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걸 왜 물어보세요?”

제자가 등롱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가 갑자기 아래로 내려버렸다. 그 바람에 불빛이 그의 발치로 이동하면서 제자의 얼굴이 훨씬 무시무시한 분위기로 보였다.


‘성질머리하고는.’

“전 전하 같은 사람이 좋아요. 전하 같은 용모에 전하 같은 성품이 좋아요.”

결국 억지로 대답하고서 다시 걸어가자, 제자도 옆에서 성큼성큼 같이 걸었다. 봄바람은 밤이 되어도 운치 있었고 옆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도 듣기 좋았다.

등롱이 흔들릴 때마다 제자와 내 그림자가 비틀비틀 술에 취한 것처럼 어우러지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성문 부근에 도달했을 즈음. 잘 들어가라고 인사를 건네려는데, 제자가 갑자기 말했다.


“제자는 스승님 같은 사람이 싫습니다.”

“괜히 바래다 드렸네요.”

“스승님처럼 말하는 사람도 싫고, 스승님 같은 얼굴도 싫고, 스승님 같은 성품도 싫습니다.”

뭐 어쩌란 건지 모르겠다. 하나도 상처받지 않는데.

도저히 그 속내를 알 수 없어서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제자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돌아가십시오. 스승님.”

 

* * *

요화가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화려는 내내 기척을 지우고 따라오던 청양에게 지시했다.


“무사히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와라.”

멀어지는 요화의 뒷모습은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중에는 요화가 든 동그란 등불만이 둥실둥실 멀어지고 있었다.

화려는 그 불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자리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저 스승은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걸까 진짜로 모르는 걸까. 본인의 말처럼 그녀가 그의 모든 걸 좋아한다면, 그가 모질게 뱉어보는 모든 말에 저렇게 태연할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