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제안과 기다림 (155/159)


155화. 제안과 기다림
2023.08.24.



 
내가 용정 네 의심병을 믿고 있었지! 아무래도 용정은 막상 실물로 날 보고 나니 자기를 구한 사람이 도화인가 나인가 긴가민가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온 힘을 다해 내렸다.


“우리가요?”

어쨌든 도화가 자기가 은인이라고 나선 데다가 내게 그 이야기까지 해둔 상황에서, 내가 나서서 ‘내가 네 은인이오!’ 하고 직접 밝히기는 애매했다.


“글쎄요.”

그렇다고 완전히 부인하자니 도화의 거짓말을 적극적으로 돕는 느낌이라 나는 적당히 둘러대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촐싹거리면서 뛰어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보란 듯 느긋하게 걸어갔다.

* * *

용정은 여유롭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뒤에서 보면 그가 본 은인이 아닌 것 같은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때 순간 ‘이 사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날 기억만 제대로 있었어도.’

용정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눈살을 구겼다. 그러면 은인이 이 사람이었나 저 사람이었나 헷갈릴 필요도 없을 텐데.

이런 애매한 기분은 그날 저녁 요도화를 잠시 만날 때까지도 이어졌다.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늘어뜨리고 여러 장식으로 치장한 요도화의 모습은 그가 본 여인 중 손꼽히게 아름다웠으나, 용정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용 공자.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기색이 드러났는지 요도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여러 가지 일이 많았지요.”

“여러 가지 일이라니요?”

“이곳 황가 일이라 제가 감히 입 밖에 담기 힘드네요.”

요도화는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서 그냥 넘어가도 될 테지만, 용정은 잠시 생각하다가 일부러 덧붙였다.


“나중에 요 이국사에게 물어봐요.”

요도화는 쓸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사촌 자매이긴 하지만 언니와 저는 위치가 다른걸요. 감히 말을 걸기 쉽지 않아요.”

 

* * *

다음날. 후궁들이 문안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황후는 대놓고 린화를 꾸짖었다.


“요 귀인. 폐하께서 요 이국사와 나누어 가지라고 내리신 하사품을 독차지하다가 혼이 났다고 들었다.”

“아닙니다, 마마. 착오가 있던 거 같아요.”

황제가 황후에게 다 이야기했나? 린화는 당황해서 반박했다. 하지만 황후는 린화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자네는 자매간이니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형제자매들은 서로의 물건을 나누어 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니까. 그러나 요 이국사는 요씨 가문에 속해 있고 자네는 입궁해 후궁이 되지 않았나. 자네와 요씨 가문 재산이 합쳐져 있지 않으니 이젠 그러면 안 돼.”

황후의 목소리는 꾸짖는 와중에도 자애로웠다. 하지만 그거야 3자의 입장에서 듣는 목소리일 뿐이었다.

린화는 황후가 자신을 이해해주는 척 이 모든 일을 자신의 탓이라고 확정 짓는 걸 알고 기가 막혔다.


“정말로 아니에요 마마……!”

다급히 반박해 보았으나 황후는 대꾸도 하지 않고 바로 다른 후궁들에게 말했다.


“어제 7황자와 1황자 일을 보았으니 모두 잘 알겠지. 형제자매 간의 우애는 아주 중요해. 자네들은 모두 황자 황녀들의 친모이니 폐하의 자녀들이 서로를 아끼도록 잘 이끌어주어야 하네.”

원비와 교비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 * *

황제에게 혼이 난 뒤로 열흘가량이 지났다. 그 기간 동안 나는 황제가 석류석 목걸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화낸 이유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린화가 황제의 총애를 잃었단 말을 듣고 린화를 보러 다녀와서 전해준 덕이었다.

아버지는 ‘황제가 린화를 오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황제가 내게 보낸 하사품들을 린화가 빼돌렸단 오해를 사게 되었다고. 그 하사품 중에 석류석 목걸이가 있었나 보다.


“린화는 네가 폐하께 괜한 말을 해서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던데.”

“괜한 말이라니요. 폐하가 석류석 목걸이를 돌려달라고 하셨는데, 받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들었을 뿐이에요. 아버지도 하사품 중 그런 물건이 없던 걸 아실 거잖아요.”

“그래, 네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없다고는 하던데…….”

“린화가 저한테 화를 내요?”

“린화도 네가 있는 걸 없다고 말했을 거라 여기진 않는단다. 하지만 린화는 네가 중간에서 폐하께 요령껏 둘러댔더라면 사건을 조용히 해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아니 생전 처음 듣는 목걸이 이야기를 하면서 돌려달라는데, 제가 여기서 뭘 어떻게 둘러대란 거예요?”

“알겠다고 대답한 다음에 깨졌다던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다던가 둘러대도 되었잖니.”

“그것도 어느 정도 기본 정보가 있어야 둘러댈 수 있는 거죠.”

아버지는 린화가 내게 화를 내는 건 안 될 일이지만, 린화가 서운해하는 걸 어느 정도 이해는 하는 듯했다.

황제는 나를 부르지 않았고, 나와 린화가 황제의 총애를 잃자 사촌들에게 쏟아지던 혼담은 놀랍게도 싹 끊겼다. 나는 사람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제 이득을 쫓아다니는지 이 일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며칠 뒤에 아버지가 또 말해주길, 1소황자는 친할머니인 교비 밑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제자의 수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은 이전에 수업 날이 있었는데, 제자가 사람을 보내서 수업을 한번 건너뛰자고 해서 이번에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운 없이 월무궁 서재로 가 보니 제자는 이전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전하. 잘 지내셨어요?”

안으로 들어가며 묻자 제자는 서책을 넘기다 말고서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 서랍을 열었다.


“스승님.”

서책을 꺼내 펼치고 있자니, 제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네?”

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곁으로 다가와서는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뭐 여러 가지로 일이 있었어요. 전하는 괜찮으세요? 7황자랑 1황자께서 감옥 가고 나서 폐하한테 붙들려서 반성문 쓰셨다면서요.”

“반성문…….”

제자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어 웃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와 달리 제자는 아주 평온해 보였다.


“열흘 전에 여기 왔었는데.”

“압니다. 그래서 청양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가 자리에 앉는 걸 보다가 나도 서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수업 시작할게요.”

 

* * *

수업을 마친 뒤 나는 내 물건을 싸서 바로 일어났다. 용정은 날 보고 긴가민가한 듯하면서도 아직 연락이 없었고, 린화는 이 일을 또 내 탓이나 하고 있다.

아버지는 침울해 있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는 여전히 좋지 않다. 이 와중에 황제도 화났으니 언제 불똥이 튈지 모른다. 여기저기서 상황이 좋지 않으니 제자와 싸울 여력도 없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런데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 나를 제자가 굳이 따라나섰다. 웬일이지? 전에 무슨 사건 있고 나서부터는 배웅 안 해주더니?

의아해하면서도 대문가까지 같이 걸어간 뒤 나는 한 번 더 인사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따라 나오지 마세요.

그러고서 돌아설 때였다.


“스승님.”

제자가 이번에도 따라 나와서는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으면서 물었다.


“힘든 일이 있거든 제게 말해주세요. 제자가 스승님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예?”

무슨 소린가 싶어 쳐다보자, 제자가 꽤 그럴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자는 스승님의 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스승님의 짐이 되어도, 저는 스승님의 편입니다.”

아주 듣기 좋은 개소리였다.


‘멀쩡히 잘 살아가던 내게 독배를 내린 놈이 뭐라는 거야?’

게다가 내가 용정 건으로 제자에게 상담을 하겠는가, 필첩 건으로 상담을 하겠는가.


“별일 없어요. 요즘 동생이 폐하와 사이가 좋지 않단 이야기가 있어서 신경 쓰일 뿐이에요.”

개중 제일 만만한 린화 사연을 둘러댄 다음 나는 제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앞을 보았다.

속으로는 열심히 제자를 차단하고 있지만, 제자의 얼굴은 사람을 미혹에 빠뜨리는 악 같은 모양새였다. 그가 날 걱정하는 척 표정을 꾸며내면 조금 흔들릴지도 모르니 얼굴을 아예 안 보아야 했다.

마침내 월무궁 담벼락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길이 끝나면서 대화원과 대로로 나아가는 길이 나타났다.

평소 그가 날 바래다준다면 여기까지였기에, 나는 책 보따리를 끌어안고서 제자에게 세 번째로 인사했다.


“이제 진짜로 가 볼게요. 전하, 더 바래다주지 않으셔도 돼요.”

“제자가 몸이 아픕니다.”

“예?”

그런데 이 제자가 뭔 일이 있었나? 그는 이번에도 헤어지는 대신 난데없는 말을 했다. 안색도 좋구먼 어디가 아프다는 거야?


“가는 길에 어의에게 말하고 갈까요?”

그래도 일단 대꾸하자, 제자는 고개를 젓더니 내 머리에 꽂힌 비녀 방울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보름 정도 요양을 갈 생각입니다. 스승님도 저와 함께 가시지요.”

“제가 왜요?”

“그러면 어지러운 일에서 한 발 떨어져 있을 수 있으니까요.”

“!”

“스승님께서 같이 가겠다 하신다면 한 달 정도로 기한을 늘리겠습니다.”

나는 아마도 멍청할 게 틀림없는 표정으로 제자를 쳐다보았다. 진짜로 아프나? 하나도 아파 보이지 않는데? 그럼 혹시 뭐 계략 같은 걸 부리려고 멀리 가나?

회귀 전 제자는 자기 무리를 데리고 멀리 가야 할 일이 생기면 나도 데려가긴 했다.

하지만 그건 제자가 황위 쟁탈전에 자기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의 일이었다. 이 시기에는 그러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제자는 책방 사건으로 날 의심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렇다면 계략을 부릴 때 날 데리고 가선 안 됐다.

그런데 왜 같이 가자고 하지? 혹시 진짜로 아프나? 겉보기만 멀쩡할 뿐인가?


“왜 그리 놀라십니까.”

제자는 웃음기 섞인 질문을 던지고서 내 비녀에서 손을 뗐다.


“제자가 오래 자리를 비우면 스승님은 당연히 따라오셔야지요. 이국사들은 대부분이 그러지 않습니까.”

그렇지. 일반 스승이 제자를 따라 다니지 않겠지만 황자들의 스승이라면 제자를 따라다녀야지…….


“많이 아프세요?”

“아픕니다.”

“어디가요?”

“증세가 많아서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책보를 다시 힘주어 끌어안았다. 제자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하늘을 한번 보고 말했다.


“제자는 모레 떠납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시고 모레 수업 시간에 월무궁으로 오시지요. 짐은 제자가 충분히 챙겨 가니 몸만 오셔도 됩니다.”

“어디로 가는데요?”

“지왕주도로 갈 겁니다.”

 

* * *

제자의 제안은 꽤 나를 혹하게 만들었다. 상황이 여러 가지로 좋지 않으니, 이럴 때는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도 좋을지도 모른다.

공개적으로 여행 간 곳에서 제자가 날 독살하진 않을 거고……. 어쩌면 여행하면서 사이가 좀 가까워질지도.

결국 고민 끝에 나는 제자와 함께 지왕주도에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아침. 짐을 챙기는데, 뜻밖에도 유 가주가 사람을 보내왔다.

유 가주를 찾아가자 그가 두루마리 세 개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은신처 세 개를 더 구했습니다.”

“정말이요?”

“하지만 이번에도 부탁 하나를 들어주어야 합니다, 이국사. 가능하겠습니까?”

“그럼요! 뭘 하면 되는데요?”

“별 건 없습니다. 우리 가문과 원수지간인 가문에서 여는 육순 잔치에 참석해서 사람 하나만 확인하고 오면 됩니다.”

춤추고 어쩌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다행히 이번엔 유 가주가 내게 부탁하는 일도 쉽기에 나는 바로 수긍하고 물었다.


“알았어요. 언제인데요?”

“날짜는 내일인데, 수왕주도에 있는 가문이라 오늘 출발해야 할 겁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어쩌지. 그러면 제자랑 같이 요양은 못 갈 텐데.


“알았어요.”

고민 끝에 나는 은신처를 구하러 가기로 했다. 어차피 요양 길에 따라가는 건 제안만 받았을 뿐 정해진 게 아니니까. 제자도 내가 안 와도 별생각 없겠지. 진짜 아픈 것도 아니고.

* * *


 
청양은 금사연석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화려를 곁눈질하다가, 참지 못하고 다가가 말했다.


“전하.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요 이국사는 외출하고 없답니다.”

“…….”

“오지 않을 듯하니 그만 출발하시지요. 아니면 숲에서 야영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의인 초감도 얼른 따라 권했다.


“맞습니다, 전하. 몸도 좋지 않으신데, 노숙했다가는 몸에 더욱 무리가 갈 겁니다. 그만 출발하시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