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범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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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범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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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범바위
2022.01.22.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화려한 도시의 전경이 제하의 눈에 들어왔다.
높이 올린 빌딩 꼭대기를 장식한 기와지붕,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끝나는 처마.
한옥과 양옥을 섞어서 만든 건물들은 이살 그룹 총수인 환웅의 작품이었다.
높은 건물 사이로 보이는, 가장 거대하고 높은 건물인 이살 타워의 주인 환웅.
환웅은 몇 년 전, 이살 그룹 창립 300주년을 맞이하자, 그 기념으로 이 도시의 이름을 브랜뉴 시티 ‘신시’로 명명하고, 제 입맛에 맞게 개발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신시 주민을 상대로 파격적인 혜택들을 베풀겠다고 선포해서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지만.
‘글쎄. 이게 좋은 건가?’
제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시가 더 좋아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살 타워가 있는 대수 북쪽 신시가지는 화려하고 깨끗하게 변해가는 데 비해, 남쪽 구시가지는 점점 황폐해지는 중이었다.
예전보다 줄어든 공권력은 범죄를 막지 못했고, 구시가지의 범죄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비단 구시가지뿐만 아니었다.
한창 개발 중인 신시가지 역시 겉모습만 화려할 뿐, 그 이면은 각종 범죄로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뭐,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하겠지. 나 같은 놈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나 해야 하지 않겠어?’
제하는 슬그머니 허리춤에 손을 댔다.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며칠 전 어렵게 구한 총이 만져지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겨울의 찬바람이 불어와 제하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저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제하는 버스를 타고 인왕산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났나?’
인왕산 사건 후, 제하는 무사히 퇴원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신시 안에서도 인왕산에서처럼 참혹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거대한 발톱 자국, 흐르는 피를 커다란 혀로 핥은 자국,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은 흔적.
그런 게 남은 시체는 차라리 나았다. 머리나 몸통의 일부만 발견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의문의 연쇄 살인이 벌어지면서, 조용히 제하의 뒤를 밟던 수훈의 기척도 사라졌다.
이 사건에 제하가 관련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검은 안개와 모래바람…….’
목격자들의 증언에서 항상 나오는 말이었다.
검은 안개나 모래바람이 덮치고 간 자리에, 참혹한 시체만이 남아 있었다는 증언.
감시 카메라에 검은 안개나 모래바람이 찍히기는 해도, 그걸 불러일으킨 존재가 찍힌 건 없었다.
그야말로 기묘한 일이었다.
‘역시 그런 짓을 벌인 건 인간이 아닌 거야.’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은 그런 짓을 벌이는 존재를 ‘범’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시신에 남아 있던 이빨 자국이 호랑이의 이빨 자국과 동일하다는 소견과 깊이 파헤친 발톱 자국 역시 맹수의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시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사건을, 환웅은 두고 보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세운 신시에서 이 같은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고 있지요. 저 환웅은 신시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범 포획에 대한 특별 포상과 보상을 하고자 하는데……. 자아, 누가 우리 신시를 위해 범을 사냥하고 보상을 받아갈까요?”
기자들을 불러모은 환웅은, 버릇처럼 검은 부채로 입가를 톡톡 치며 말했다.
환웅이 현상금으로 건 금액은, 범 한 마리 당 5천만 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소시민들이 범 사냥을 나서게 하기에 충분한 금액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회의적이었다.
검은 안개와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첨단 감시 카메라에도 모습이 찍히지 않는 존재를 잡아서 죽이는 게 과연 가능할까?
가능했다.
본격적으로 사냥을 해보겠다며 무리를 지은 범 사냥꾼 ‘호랑나비 팀’이 처음으로 ‘범’을 잡았다.
그들이 잡아서 공개한 ‘범’은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호랑이 같은 귀를 가지고 있었다.
호랑나비 팀의 대장인 성진은, 방송에서 ‘범’의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원래 평범한 사람 같았거든? 그런데 분위기가 묘하더란 말이지. 피부색도 그렇고, 눈동자 색도 그렇고 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단 말이야. 그래서 슬쩍 건드려봤더니, 자, 봐봐. 이렇게 변신을 하더라고.”
‘범’은 있었다.
게다가 잡아서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많은 사람이 무기를 구해 범 사냥에 뛰어들었다.
제하도 무기를 구하긴 했지만, 그들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검은 안개.
쪼개진 기억의 파편 중에, 검은 안개가 있었다.
인왕산에서 정신을 잃기 전, 검은 안개가 덮쳐오는 걸 본 기억이 났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인왕산을 찾아갔지만, 그때는 인왕산이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범 사냥을 나서게 된 지금, 인왕산의 출입금지령이 풀렸다.
제하는 한 달 전 인왕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확실하게 알아내고 싶었다.
‘인왕산은 이미 범 사냥꾼들이 한번 쓸고 갔으니, 그리 위험하진 않을 거야. 그리고 총도 있으니까…….’
버스에서 내린 제하는, 어둠이 내려 새까만 인왕산을 올려다봤다.
그런 일을 경험했음에도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둠을 헤치고 기억을 더듬어 걸어갔다.
을씨년스러운 찬 공기가 겨울 산을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산을 오르는 제하의 몸에는 알 수 없는 온기가 돌았다.
한 번도 헤매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범바위.
웅크린 범 같은 바위는, 달빛을 받아 새초롬히 빛나고 있었다.
‘그래, 난 그날도 여기까지 왔어. 그리고 범바위에 가까이 가서…… 응? 이게 뭐지?’
범바위에 흉터처럼 길게 금이 갔다.
‘저번엔 이러지 않았는데…….’
제하는 범바위에 생긴 깊은 금에 손을 얹었다.
욱신-!
다 나은 줄 알았던 가슴의 상처에 격통이 일었다.
“큭!”
제하는 가슴을 움켜쥐고 허리를 구부렸다.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손가락 주위에 감돌 뿐인 작은 빛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제하는 제 몸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챘다.
“이게 뭐야?”
가슴에서 손을 떼고 제 손을 확인했지만, 손은 멀쩡했다.
빛을 내는 건 가슴 쪽이었다. 한 달 전 생긴 상처 부근에서 선명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대체 무슨……?”
비현실적인 상황에 기가 막혔다.
기막힌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범바위에 생긴 깊은 금에서도 제하의 가슴에서와 같은 색의 빛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두 빛은 마치 공명이라도 하듯 어둠을 가로질러 맞닿았다.
제하는 입을 벌린 채, 이 꿈 같은 상황을 멍하니 지켜봤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가슴의 통증조차 잊었다. 맞닿은 빛이 점점 밝아져서 똑바로 바라보기도 힘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다가 질끈 감았다. 얇은 눈꺼풀 너머로도 전해질 정도로 강한 빛이 사라지고 나서야, 제하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으앗!”
눈을 뜨자마자 보인 광경에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범바위가 있어야 할 자리에, 호리호리한 남자가 서 있었다.
잿빛 머리칼에 잿빛 눈동자를 가진 예쁘장한 생김새의 남자는, 짙은 남색 두루마기 같은 옷에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빨갛고 굵은 밧줄을 목걸이처럼 목에 늘어뜨리듯 두르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던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제하의 손목을 잡더니, 번쩍 들어 올리듯 일으켜 세웠다.
그러더니 다시 팔짱을 끼고 씩 웃으며 제하를 올려다봤다.
제하는 눈을 꿈뻑거리다가 검지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와, 씨. 이건 또 뭔 개꿈이지?”
“개꿈이 아니란다, 아가야. 내 이름은 하루. 인왕산 범바위지.”
인왕산 범바위와 똑같은 눈동자 색을 지닌 하루는, 기묘한 말투를 사용했다.
제하는 미간을 좁히고 하루를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와, 나, 되게 꿈 많은 놈이었구나. 꿈을 꿔도 이런 스펙터클 판타스틱한 꿈을 꾸다니. 쪽팔려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겠네.”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제하의 손목을, 하루가 붙잡았다.
제하는 성가신 듯 손을 털어 하루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힘이 얼마나 센지 아무리 팔을 흔들어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제하는 인상을 구기고 하루를 노려봤다.
하지만 하루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어른스럽게 말했다.
“아가, 많이 컸구나. 옛날에는 요만했는데.”
하루가 엄지와 검지로 손가락 한 마디 크기를 만들어 보였다.
“난 고만한 적 없어. 그리고 날 언제 봤다고 많이 컸니, 마니…….”
“요만했을 때는 항상 보았지. 네 아비에게 안겨 있던 것도 보았고, 네 어미의 손을 잡고 꽃을 따던 것도 보았지. 꽃 따서 머리에 꽂고 덩실덩실 춤을 추던 모습이 참으로 귀여웠는데…….”
“귀엽긴, 그건 그냥 미친놈…… 아니, 잠깐.”
제하의 머릿속에 그 광경이 떠올랐다.
하늘이 유독 파랗던 봄, 범바위 앞에서 엄마와 함께 꽃을 땄던 기억.
엄마가 불러주는 노래에 신나서 춤을 추던, 행복하기에 아픈 기억.
제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그곳에는 어머니와 제하뿐이었다.
그런데 그걸 이 이상한 녀석이 어떻게 아는 걸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기억력이 안 좋구나. 보았다 하지 않았느냐?. 아주 오랜 시간, 이제는 가늠하기도 어려울 만큼 긴 시간, 나는 이곳에 앉아 지켜보았지. 아가야, 이 눈과 머리카락을 보아라. 누가 보아도 바위 아니더냐.”
“눈은 렌즈 끼고, 머리카락이야 염색을 하면…….”
제하는 손을 뻗어 하루의 머리카락을 뽑았다.
“아프잖아!”
갑자기 머리칼을 뽑힌 하루가 외쳤다.
“뭐야, 평범한 말투도 사용할 줄 아네.”
“아프구나, 아가야.”
다시 말투를 바꾸는 하루를 무시하고 머리카락을 확인했다.
뿌리까지 잿빛이었다.
염색한 머리가 아니다.
‘나랑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흰머리가 날 리도 없고…….’
제하는 가만히 하루를 살펴봤다.
하루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손으로 연신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마치 거기에 긴 수염이라도 존재한다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녀석이다.
“근처에 범들은 없는 것 같고…….”
하루가 중얼거린 말에 제하는 눈을 번쩍 떴다.
“범을, 알아? 놈들이 근처에 있으면 알 수 있어?”
“느낄 수 있지. 나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범의 세계인 인왕던전의 입구를 막아놓고 수호하는 위대하고도, 위대하신…….”
“인왕던전은 또 뭔데?”
제하가 하루의 말을 끊었다.
하루가 싱긋 웃었다.
“이제 내 말을 믿는 게냐?”
“설명이나 해봐. 인왕던전이 뭔데?”
“길고도 긴 이야기다. 까마득한 과거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온, 참으로 길고도 길며 아득하고도…….”
“하루라고 했지?”
“음?”
“너, 진짜 사설이 길다? 요약정리, 뭐, 그런 거 몰라?”
“쯧쯧. 버르장머리하고는.”
하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바닥에 책상다리하고 앉았다.
그러더니 제하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잘은 모른다.”
“…….”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