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억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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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억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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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억의 조각
2022.01.29.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말문이 막힌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
뭔가 아는 게 있는 것처럼 주절거리더니 잘 모른다고 하는 하루를 내려다보며, 제하는 갈등했다.
‘한 대 후려칠까?’
있지도 않은 턱수염을 쓰다듬는 시늉을 하던 하루가 말했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해. 너도 그럴 때가 있지 않느냐. 뭐, 확실한 거 하나는, 내가 지키던 저곳 뒤쪽의 어딘가에 범들이 사는 세계가 있고, 그곳이 이곳으로 흘러나오는 걸 막는 게 내 존재의 의미였다는 것뿐이다.”
“아, 그러셔.”
더는 상대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미친놈일 뿐이다.
제하는 돌아서서 인왕산을 떠나려 했다.
그때, 들려온 하루의 목소리가 제하의 발목을 붙들었다.
“음력 1월 16일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음력 1월 16일.
부모님의 기일.
그리고 인왕산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날.
제하는 휙 돌아서 하루에게 다가가, 하루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너, 뭔가 아는 게 있구나?”
“손님 오는 날이라고 들어 봤느냐?”
“손님…… 오는 날……?”
들어본 것도 같다.
“음력 1월 16일, 이 세계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바로 범이다.”
척추를 타고 찬 기운이 흘렀다.
“일 년에 딱 한 번, 범에게 주어진 자유의 날. 범들이 나와 인간들 틈에 섞여, 인간을 잡아먹고 또 일 년을 살아갈 힘을 얻지.”
-“오시게, 오시게.”
머릿속에 노랫자락 하나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제하를 무릎에 앉혀놓고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
왜 이런 상황에서 그 노래가 떠오른 걸까?
제하는 고개를 저어 머릿속을 맴도는 노랫소리를 털어냈다.
“인간을…… 잡아먹어……?”
“그래, 범족은 인간을 먹어야 흩어져가는 그림자의 세계에서 버틸 수 있거든.”
“흩어져 가는 그림자의 세계……?”
“그게 인왕던전이다. 범들이 살아남기 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가짜 세계. 가짜이기에 영원할 수 없고, 영원할 수 없기에 유지하기 위한 제물이 필요하지.”
“그 제물이 인간인 거고?”
하루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하루라면서? 음력 1월 16일 단 하루만 나오는 거라면, 지금 신시에서 벌어지는 일은 뭐지? 왜 범들이 아직까지도 신시에서 날뛰는 거야?”
“봉인이 깨졌다.”
“왜? 네가 지킨다면서? 넌 멀쩡하잖아! 안 지키고 뭘 하는 거야?”
하루가 입을 다물고 제하를 빤히 응시했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제하를 보던 하루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네가.”
하루의 손가락이 제하의 이마를 톡 쳤다.
“봉인을 깨지 않았느냐.”
콰직-!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하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부릅뜬 제하의 눈동자가 뒤로 까무룩 넘어갔다.
스륵, 쓰러지는 제하를, 하루는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
한 달 전.
음력 1월 16일.
제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인왕산 범바위 앞에 도착했을 때, 그 앞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범바위 앞에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제하는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며 그의 뒷모습을 살펴봤다.
남들보다 덩치가 큰 제하만큼이나 체격이 좋은 뒷모습.
시선을 느낀 듯, 사내가 뒤를 돌아봤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피부 빛이 어두운 사내는 제하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제하야. 못 본 사이에 많이 컸네.”
호쾌한 음성에, 제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하지만 사내가 가까워지고 사내의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 보자, 제하의 생각이 바뀌었다.
“아, 우리 아버지 친구구나. 어릴 적에 자주 만났었지. 나한테 참 잘 대해주셨어.’
제하 자신도 모르는 새에, 낯선 사내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기억나지? 후포 아저씨란다.”
“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순순히 인사하는 제하를 보며 후포가 히죽 웃었다.
후포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는 걸, 제하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동안 잘 지냈지?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찾기 힘들더구나.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야. 그렇지?”
“네, 그러네요.”
제하는 자신이 이 후포라는 남자를 만나러 여기까지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좀 앉자꾸나. 할 이야기도 많은데.”
후포가 범바위를 향해 앉으며 말했다.
제하도 그 옆에 앉아서 멍하니 범바위를 응시했다.
“기억나니? 어릴 때 네 아버지가 여기 이렇게 앉아서 자주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노래요?”
그건 잘 모르겠다.
“음. 아직은 안 되나?”
“예?”
“아니, 아니다. 네 아버지가 저기 저 바위 뒤, 저쪽 너머에 살던 범족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
범족? 그게 뭐지? 아버지가 범족이라고?
아, 그렇지. 맞아. 아버지는 범족이야. 응, 범족이고말고.
그래, 맞아. 범족이 사는 저쪽 너머에 마을이 있었지.
머릿속에서 현실이 뒤바뀌는 것을, 제하는 깨닫지 못했다.
“우리는 저 안에서 살다가 음력 1월 16일에는 이곳으로 나올 수 있거든. 그런데 저 문을 지키던 네 어머니가 네 아버지와 사랑에 빠졌지 뭐냐. 그래서 못 돌아가게 네 아버지를 붙잡았어.”
그렇구나. 어머니가 범족인 아버지를 붙잡았구나.
“노래를 불렀지. 대문놀이 노래라고, 일시적으로 우리 세계로 이어진 통로를 비틀어 열어서 유지 시키는 노래란다. 그 노래 덕에, 네 아버지는 음력 1월 16일이 끝났는데도, 범의 세계로 끌려가지 않고 여기 남을 수 있었지.”
대문놀이 노래.
“범족인 네 아버지와 곰족인 네 어머니 사이에서 네가 태어난 거란다. 놀라운 일이지. 흔치 않은 일이거든.”
그렇구나. 어머니는 곰족이었구나. 나는 흔치 않게 태어난 아이고.
“네 아버지가 종종 널 데려와서 여기 앉아, 그 대문놀이 노래를 부르곤 했단다. 아직도 기억 안 나니?”
-“오시게, 오시게.”
아버지의 나직한 노랫소리가 떠올랐다.
동시에 주위의 광경이 바뀌었다.
제하는 어린아이로 돌아가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시게, 오시게. 서둘러 오시게. 문이 닫히기 전, 서둘러 오시게. 아직 오지 않은 이는 어드메냐…….”
단조로운 곡조이지만 다정하게 내려앉는 노래.
제하는 멍한 표정으로 그때 들었던 노래를 흥얼흥얼 불렀다.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노래하는 제하를, 후포가 가만히 지켜봤다.
제하를 향했던 다정한 빛이 사라지고, 흉포한 냉기가 후포의 눈동자를 물들였다.
오시게, 오시게.
노래가 계속될수록 후포의 전신을 흐르는 기운이 강해졌다.
쩌적-
작은 소리와 함께 범바위가 갈라졌다.
문이 열렸다.
완전히 열린 문으로, 인왕던전 안에 있던 범족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후포의 입술이 잔혹하게 벌어졌다.
“문이 열렸다.”
후포 앞에 기립한 범족들이 감개무량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후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명령만 내려달라는 듯, 충성스럽고도 잔혹한 눈동자들이 후포의 앞에서 빛나고 있었다.
인왕던전 내에 갇혀 있던 범의 기운이 흘러나와 후포의 육체를 감쌌다.
후포의 손톱이 서서히 길어지기 시작했다.
후포가 입을 열었다.
“4천 년 전 마무리 짓지 못한 전쟁을, 다시 시작한다!”
그 순간, 범들이 있던 자리에 검은 안개와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안개와 바람은 인왕산 곳곳을 물들이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후포는 여전히 제 옆에 앉아 넋이 나간 듯 대문 놀이 노래를 부르는 제하를 흘끗 돌아봤다.
“4천 년 전, 날 저곳에 가둔 놈도 너 같은 잡종이었지.”
후포가 제하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문지기 무녀 어미의 피가 흐르니, 저 문을 닫을 힘도 있을 터.”
후포의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제하의 가슴에 닿았다.
“너는 죽는 편이 낫겠구나.”
.
.
“허억!”
제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긴 발톱이 가슴을 깊이 찌르고 들어와 내리긋는 통증이 생생했다.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는 제하의 눈에 하루의 잿빛 눈동자가 들어왔다.
하루가 가까이에 앉아서 제하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하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왜인지 그의 눈동자를 보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울컥, 뱃속에서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후포가…….”
산산이 조각나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한데 뭉쳤다.
오래전, 제하가 아직 어릴 때의 음력 1월 16일.
후포는 인왕던전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 이 세계에 남아 가족을 만든 아버지를 발견했다.
후포는 아버지에게 ‘손님 오는 날’이 아닌데도 이 세계에 남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려 수년간 노력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아버지도 죽이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를 지키려 한 어머니까지 죽였다.
-“제하야!”
어머니의 비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후가 있었다.
-“도망쳐!”
그래서 제하는 도망쳤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후포에게서도, 그 참혹한 기억에서도 도망쳤다.
슬픔과 죄책감이 제하의 가슴을 까맣게 물들였다.
“범들이…… 내 부모님을…….”
말을 잇기 힘들었다. 그간의 원망과 슬픔, 그리고 덤덤하게 잊고 지내온 모든 날의 기억과 감정이 물밀듯 쏟아졌다.
하루의 눈썹 끝이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 제하가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듯.
하루의 공감 어린 눈빛이 위로가 되었다.
어릴 때 부모님도, 기억도 잃고 보육원에 살던 제하는, 어디에도 섞일 수 없었다.
부모님을 잃은 후, 가족 없는 삶이 몹시도 당연했다.
때때로 부모님이 사무치게 그리워도, 침대에 웅크려 숨을 죽이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을 뿐.
온기를 나눠주며 슬픔을 달래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울지 않게 되었다.
울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부모님을 향한 지독한 그리움도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그러나, 지금.
잿빛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약간은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닌지 의심되는 하루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제하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하루의 손은, 정말 바위라도 되는 것처럼 차가웠지만.
제하는 그저 따뜻했다.
이윽고 제하가 눈물을 멈추자, 하루가 일어나 제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꾸나, 아가야.”
“아가가 아니라, 제하라고 불러.”
제하는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나서 물었다.
“그나저나 어디 가게?”
“범들이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면.”
하루가 인왕산 아래로 보이는 신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도 반격해야지.”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