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누가 짐승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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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누가 짐승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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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누가 짐승이냐
2022.04.2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선심 쓰듯 튀어나온 15억이라는 액수에, 제하 일행은 기가 막혔다.
도건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봐, 15억이라니. 말도 안 되는 가격이잖아. 이게 총도 아니고…….”
“총이 아니니까 더 귀한 거야. 이런 물건, 어디서 찾을 수나 있을 것 같아? 거래소 쫙 돌아다녀 봐. 이 가격에 이만한 물건, 못 사.”
“못 사겠지. 누가 그 물건을 그 가격에 팔아?”
빈정거리는 대꾸는, 제하 일행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찾을 수도 없겠지. 누가 이런 무기를 갖다 놓겠어?”
주인과 제하 일행의 실랑이에 난입한 청년은, 휘적휘적 걸어와서 당연한 듯 제하의 옆에 섰다.
진녹색으로 염색한 머리칼에, 밝은 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스터드가 잔뜩 박힌 가죽 재킷이 잘 어울렸다.
“넌 또 뭐냐? 괜히 끼지 말고 빠져.”
주인이 험악하게 말했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입술 끝을 비뚜름하게 들어 올렸다.
“내가 아까 다 봤거든? 그거 한번 팔아보겠다고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호객행위 하는 거? 이 사람들 오기 전에는, 총 한 자루 사면 덤으로 주겠다고도 했었잖아.”
“내, 내가 언제……!”
버럭 외치는 주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도건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뭐야? 덤으로 넘기려던 무기인데 15억이나 부른 거야? 이봐, 아저씨. 아무리 세상이 다 망해가도 그건 아니지. 우리가 그걸 어디 딴 데 쓰는 것도 아니고, 범 잡는 데 쓰려는 건데…….”
“맞아. 이 아저씨는 안 되겠네. 이 가게 바가지 씌운다는 거, 다른 범 사냥꾼들한테도 알려야 하는 거 아냐?”
제하가 도건의 말을 거들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서 기웃거리기 시작하자, 주인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태도를 바꿔서 비굴하게 웃었다.
“아니, 뭐 또 말을 그렇게까지 하고 그러시나? 누가 바가지를 씌우겠대? 다들 우리를 위해서 범 잡느라 애쓰는 거, 알지. 알고말고. 어른이 농담 좀 한 걸 가지고…… 응?”
제하 일행은 주인을 지그시 노려봤다.
“아, 진정들 좀 하고. 자, 이거 어때? 이거.”
주인이 손에 잡히는 총 하나를 집어서 내밀었다.
“이 총에 저 창까지 해서, 딱 15억. 이거, 완전히 밑지는 장사야. 요새 15억으로는 총 한 자루도 못 구하는 거 알지?”
물론 알았다. 거래소에 들어와서 노점상을 돌아다니는 동안, 10억 이하의 총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통장에 있는 돈은 12억 남짓.
난처해진 제하가 슬그머니 도건 쪽을 돌아보려는데, 반대쪽에 서 있던 진녹색 헤어의 남자가 검지를 하나 들어 올렸다.
“아저씨. 바가지 씌우려고 해서, 이 사람들한테 상처 입힌 위자료는 줘야지. 더 깎아. 10억으로 해.”
“아니, 무슨 그런……! 그건 말도 안 되지! 이거 아주 도둑놈들 아냐!”
“도둑놈들이라니…… 아저씨가 먼저 사기 치려고 했잖아.”
주인은 도와줄 만한 사람을 찾아서 눈알을 굴렸지만, 다들 흘끔흘끔 구경만 할 뿐이었다. 요새 같은 세상에서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는 죽거나 다쳐도 아무 보상을 받지 못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질대로 다 뒤집어엎을 수도 없는 게, 제하 일행은 범 사냥꾼이었다.
범과 싸우는 자들을, 평범한 상인이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주인은 끙끙 앓다가 결국 바닥에 침을 퉷, 뱉었다.
“아, 씨. 꿈자리가 드럽더라니…… 가져가라, 이 도둑놈의 새끼들아!”
+++
노점상을 떠나서 거래소를 빠져나올 때까지, 제하 일행은 말이 없었다.
거래소를 나온 후에야, 제하가 크게 숨을 뱉어내며 말했다.
“10억에 무기를 두 개나 샀어.”
“그러게. 야, 도와줘서 고맙다.”
도건이 진녹색 헤어의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걷던 남자가 움찔하더니, 훗, 하고 웃었다.
“뭐, 별로. 간다.”
휙 돌아서서 떠나려는 그의 팔을, 제하는 저도 모르게 붙잡았다.
“저기.”
“어?”
“나는 제하라고 하는데…… 너는?”
“아, 난 세인.”
어색한 자기소개 이후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하와 세인은 자신의 이름만 밝힌 후, 눈을 맞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도건이 하하하, 웃으며 둘의 등을 탁 두드렸다.
“너네, 뭐하냐? 왜 벌써 뜨거운 우정이야?”
제하가 얼굴을 붉히고 세인의 손목을 놔줬다.
“아, 미안.”
“뭐, 별로. 진짜로 간다.”
“잠깐만. 혹시 너도 사냥꾼이야?”
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왜?”
“따로 속한 팀이 있는 게 아니면, 우리랑 같이 다닐래?”
또다시 세인의 눈동자가 일렁, 흔들렸다.
“우리, 곧 큰 싸움을 하게 될 것 같거든.”
하지만 제하가 덧붙인 말에, 세인의 표정이 굳었다. 맑았던 눈동자에 진득한 공포가 새겨졌다.
붉은 입술을 달싹거리던 세인이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아니, 나는 범과 싸우고 싶지 않아.”
범 사냥꾼이 범과 싸우고 싶지 않다니.
제하는 세인의 궤변에 당황했지만,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 세인을 붙잡을 수 없었다.
+++
불티는 콧등을 찡그리며 팔뚝을 확인했다.
며칠 전, 나래에게 당한 상처가 이제야 아물어가고 있었다.
범은 상처를 입어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지만, 같은 범에게 당한 상처는 그리 쉽게 낫지 않았다.
크르르르르-
그날의 싸움을 떠올린 불티의 목에서, 나직한 울림이 흘러나왔다.
“멍청한 것…….”
불티는 나래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래가 어릴 때부터 귀엽게 여기고 잘 대해주었다.
음력 1월 16일, 결계가 약해지는 날에 인간 세상에 나갔던 나래가 상기된 얼굴로 돌아온 건 약 10년 전의 일이었다.
-“되게 귀여운 애를 만났어, 불티.”
신나서 얘기하는 나래에게, 불티는 분명하게 말했다.
-“인간 놈과 어울릴 생각하지 마라, 나래. 그놈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잖아!”
하지만 나래는 불티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1년에 한 번, 인간 세상에 나갈 때마다 ‘귀여운 애’를 만나고 돌아오는 듯했다.
저러다가 말겠지, 어차피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귀여운 애’는 조만간 늙어 죽겠지.
그때는 문이 완전히 열릴 줄 몰랐기에, 나래를 내버려 뒀다.
하지만 결계가 약해졌고, 문은 열렸다.
나래는 뛰쳐나갔고, ‘귀여운 애’를 만났고, ‘귀여운 애’를 위해 죽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아껴주던 불티에게 상처까지 입히며, ‘귀여운 애’를 위해 죽어갔다.
“그 멍청한 것이!”
불티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작은 비명이 울렸다.
불티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철창에 갇힌 인간들을 노려봤다.
인간 놈들은 질색이다.
인간을 좋아하는 범 또한 질색이다.
인간도, 인간을 좋아하는 범도 싹 다 죽여버릴 생각이었으니, 나래도 죽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죽였다.
하지만 가슴에 남는 이 찝찝함은 무엇일까?
-“불티, 제발…….”
왜 자꾸 그 멍청한 여자애의 눈물 섞인 눈동자가 떠오르는 걸까?
“사, 살려주세요. 제발…….”
“나, 나는 의원이요. 시의원이라고. 나, 나를 살려주면 이런 곳 말고 아주 좋은 집을 줄 수 있소.”
“아이만이라도 살려주세요. 네? 제발, 이 애라도 살려주세요.”
철창들 사이로 난 통로를 걷는 불티에게, 아직 미련이 남은 사람들이 애원하기 시작했다.
개가 짖는 것처럼 시끄러워서, 불티는 주먹으로 철창을 때렸다.
콰앙-!
사람들이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시끄러, 버러지들.”
불티는 정말이지, 인간이 싫었다.
불티가 갇혀 있던 그 세계는, 시간의 흐름도, 계절의 흐름도 없는 곳이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곳.
멈춘 시간 속에서도 굶주림은 느껴지지만, 지독한 굶주림에도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곳.
죽음조차 버린 그곳에서, 불티는 아주 긴긴 세월을 살았다.
바로 저 인간 놈들 때문에.
범들을 그 세계에 가둔 주제에, 저들은 자기들끼리 하하호호 번식하고 번영했다.
그런데 지금 저 꼴을 보라지.
그때의 힘을 모두 잃고, 범에게 매달려 애원하는 꼴이라니.
저런 놈들 때문에 영원처럼 오랜 시간을 고통받아온 건가 싶어서 실소가 나왔다.
제일 안쪽 철창 앞에 멈춘 불티가, 철창 안을 들여다봤다.
잿빛 털을 가진 범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자후.”
그의 이름을 부르자, 범이 천천히 눈을 떴다.
탁해진 연갈색 눈동자.
불티는 자후가 죽어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불티…….”
자후는 힘겹게 일어나서 불티에게 다가왔다.
한때 친구였던 자후가 죽어가는 모습을 봐도, 불티의 눈에 동정심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이게 뭐 하는 건가……? 후포 님께서도 자네가 이런 일을 한다는 걸 아시나?”
“알 게 뭐야?”
“불티!”
“그래, 인간들이랑 섞여서 죽어가는 건 어때? 엉? 만족스럽나? 이제 슬슬 인간을 먹어야겠다 싶지 않아?”
자후가 갇힌 감옥 안에는 인간이 여러 명 있었지만, 자후는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서도 인간을 먹지 않고 있었다.
이곳은 인왕산 범바위 뒤의 그 지옥 같은 세계와 다르니,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불티, 이제 우리는 인간을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네. 굳이 이래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인간을 먹어야 강해지고, 인간을 먹어야 이 세계를 되찾지.”
“왜 되찾으려 하는 거지? 이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도 있지 않나?”
“함께 어우러져? 저놈들은 우리를 배신했어! 너는 그 지독한 세월을 벌써 다 잊은 거냐?”
“오래전의 일이네, 불티. 지독히도 오래전의 일이야.”
“내게는, 우리에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일이야!”
불티가 소리치자, 건물이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자네가 이러는 건, 후포 님께서도 원치 않으실 거네.”
“아니, 후포 님도 곧 깨달으시겠지. 인간이 얼마나 비열하고 저급한 생물인지.”
불티는 주먹으로 철창을 쾅, 내리쳤다.
“인간을 먹어, 자후. 한 놈만 먹어도 풀어줄 테니까.”
“나는 인간을 먹지 않아, 불티.”
“그래? 그럼 거기서 콱 뒈져버리든가.”
+++
호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불티와 대화를 나누던 자후라는 범은 이제 숨쉬기도 힘든 듯, 아까보다 약해진 숨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었다.
‘저 범은 먹을까, 저대로 죽을까?’
아마도 먹을 거라고, 호수는 생각했다.
호수가 이곳에 갇힌 지 열흘이 넘었다.
지독한 고문을 받고도 견뎌냈지만, 굶주림만큼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저 범을 죽여서 뜯어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배고파. 죽기 싫어. 배고파. 죽기 싫어.’
이런 와중에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죽어버리면, 고문을 받지도, 배가 고프지도 않을 텐데.
문득 궁금했다.
굶어 죽어가는 와중에도 인간을 먹지 않으려는 저 범과 저 범이 죽으면 먹을 생각만 하는 자신 중, 누가 더 짐승 같은지.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