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놓칠 수 없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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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놓칠 수 없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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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놓칠 수 없는 빛
2022.04.30.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하루는 신시의 지도를 펼쳤다.
신시는 중앙에 흐르는 대수를 중심으로 북쪽의 신시가지와 남쪽의 구시가지로 나뉘었다.
신시가지의 중심에는 이살 타워가 있었고, 거기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인왕산이 있었다.
구시가지는 1구부터 20구로 나뉘어 있었는데, 18구부터 20구까지가 대수와 맞닿아 있어서, 신시가지와 가장 가깝고 가장 안전한 동네였다.
하루가 가리킨 곳은 19구였다.
“놈들의 본거지는 여기에 있다.”
“19구에 있다고? 말도 안 돼. 거긴 그나마 구시가지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라고. 거기가 뚫리면 신시가지도 뚫리는 거라서, 경계가 꽤 삼엄해.”
도건의 말에 하루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잿빛 머리카락이 살랑, 흔들렸다.
“그리 따지자면 지금 이 상황도 이상하지 않느냐? 인왕산은 여기, 신시가지 북쪽에 있는데, 왜 신시가지보다 구시가지에 범들이 모이는 걸까?”
“그건, 군대가…….”
거기까지 말하고 도건은 입을 다물었다.
군대는 범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묘한 힘을 얻게 된 범 사냥꾼들만이, 범의 속도와 힘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탱크를 몰고 폭탄을 터뜨려대면 범을 잡을 수야 있겠지만, 범 한 마리를 잡자고 도심에서 폭탄을 날려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범은 인왕산에서 가까운 신시가지가 아닌 구시가지에 모여든다.
“나도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해왔어. 마치 신시가지에 있는 누군가와 계약이라도 한 것처럼 범들이 구시가지만 노리잖아. 그것도 1구부터 차례로.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시가지가 완전히 안전한 건 아니지만, 구시가지에 비해서는 범의 습격이 거의 없다시피 해.”
주안이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하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대체 누가 범이랑 손을 잡겠어? 범은 인간을 잡아먹잖아.”
“모든 범이 그런 건 아니야, 제하야.”
주안이 종종 보이곤 하는 슬픈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제하는 주안에게 묻고 싶었다.
주안이 형, 형은 왜 항상 그렇게 울 것 같은 눈빛을 해?
하지만 왜인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게도 말하기 힘든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그에게도 말하기 힘든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범도 인간이랑 똑같아. 사랑을 하고 증오도 하고,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지.”
“으응…….”
그건 제하도 알고 있었다.
제하의 아버지도 범이었고, 제하의 아버지도 사랑을 했으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범이라고 해서 막무가내로 인간을 죽이는 건 아닐 거다, 게다가 지금처럼 강해지는 인간들도 생기는 상황에서는, 계략을 꾸미는 범도 있을 거다, 라는 거지?”
도건이 이야기를 정리하자, 주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래도 신시가지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놈들의 본거지가 있다는 건 뭔가 좀 이상해. 우리가 모르는, 큰 힘이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어.”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범 몇 마리 상대하는 것도 버거운 상황에서, 또 다른 힘이 끼어든다면 이만저만 힘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이제는 하나의 군단처럼 된 호랑나비 군처럼 인해전술로라도 밀어붙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답답한 한숨을 내쉬는 제하의 어깨에, 하루의 손이 얹어졌다.
선이 고운 손가락이 제하의 어깨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 움켜쥐었다.
“한숨을 쉰다고 달라지는 게 있겠느냐.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들 하지. 우리도 정신 똑바로 챙기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 보자꾸나.”
+++
세인은 고개를 숙여, 허벅지를 확인했다.
허리의 벨트에서 이어지는 검집이 양쪽 허벅지에 하나씩 자리 잡았고, 거기에 얼마 전에 구입한 단도가 한 자루씩 꽂혀 있었다.
제하 일행과 그런 식으로 헤어진 게 마음에 걸려서, 한 번 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거래소를 찾아갔었다.
제하 일행은 만나지 못했지만, 괜히 신경 쓰이는 단도 두 자루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다.
물론 범 사냥꾼들에게만 저렴할 뿐, 범을 잡아서 현상금을 받아본 적 없는 세인에게는 전 재산을 털어야 할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다.
부모님은 애정을 주지는 않아도 용돈만큼은 과할 정도로 많이 줬다.
반항심 때문에 쓰지 않고 모아둔 돈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거기에 대학 다니면서 번 과외비까지 합쳐서 단도 두 자루를 구입할 금액을 마련한 것이다.
‘나는 범 사냥할 생각 없는데…….’
제하가 사냥꾼이냐고 물었을 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들에게서 본 같은 전생.
조금 더 그들과 함께 다니며, 같은 전생을 가진 이유를 알아보고 싶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저 소속감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제하가 같이 다니자고 제안해줬을 때는 기뻤다.
하지만.
-“우리, 곧 큰 싸움을 하게 될 것 같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공포가 심장을 움켜쥐었다.
범에게 산 채로 삼켜졌던 그 순간의 공포.
캄캄한 범의 뱃속에서 느낀 두려움.
트라우마가 해일처럼 덮쳐와, 세인의 숨통을 조였다.
그때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지만, 또 그렇게 운이 좋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범과 싸우기는커녕, 두 번 다시는 범을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큰돈을 주고 단검 두 자루를 손에 넣은 이유를, 세인은 정말이지 알 수 없었다.
‘그 녀석들은 큰 싸움이라는 거 했나? 살아 있기는 한 건가?’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났지만, 제하 일행을 만나지 못했다.
어제까지는 거래소 근처를 어슬렁거렸지만, 그런 자신이 우스워져서 오늘부터는 거래소에 가는 걸 관뒀다.
19구로 향하는 이유는, 그나마 그 근처가 안전하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세인은 범이 출몰할 위험이 없는 곳에서, 사람들의 전생이나 구경하며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길이 막혔다고?”
“네, 그렇대요. 18구부터 20구까지 들어가는 길이 막혔대요.”
“아니, 누가 길을 막아? 왜 길을 막는 거야?”
“군인들이 쫙 깔렸대요. 아무래도 자기 집을 버리고 그쪽으로 몰리는 사람이 많다 보니, 통행을 제한하게 됐나 봐요.”
“그게 말이 돼? 그럼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으라는 얘기야?”
터덜터덜 걷던 세인의 귀에, 이해할 수 없는 얘기들이 들려왔다.
“차를 타고도 못 들어가나 봐요. 버스도 노선이 바뀌었고…….”
“아니, 대체 왜……? 그럼 우린 어떡하라고?”
고개를 숙이고 걷느라 몰랐는데, 도로가 꽉 막혀 있었다.
차도에는 오가지 못하는 차들이, 인도에는 삼삼오오 모인 불안한 표정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삿짐 트럭이나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다들 신시가지와 가까운 18구 근처로 이동을 하는 중이었던 것 같다.
세인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범에게 먹혔다가 살아남은 후, 후각과 청각이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예민해진 청각에, 저 앞쪽에서 사람들이 길을 막아선 군인들에게 항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달리, 군인들의 대답은 절도 있었다.
“상부의 명령입니다.”
이유 같은 건 설명해주지 않았다.
세인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구시가지가 범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서, 신시가지로 향하는 길을 막아버리다니.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이런 식으로 길을 막다니.
‘이게 진짜 현대에서 벌어지는 일이야?’
기가 막힌 상황에 고개를 뒤로 젖히자, 따가운 봄 햇살이 눈을 찔렀다.
‘세상이 진짜 어떻게 되려는 거지?’
세인은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둘러봤다.
사람들은 공포와 분노와 허탈함과 체념이 적당히 섞인 눈으로, 자기들이 가고 싶은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세인의 눈에, 어딘가를 향해 씩씩하게 움직이는 네 남자가 들어왔다.
제하 일행이었다.
세인은 홀린 듯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사람들이 향하는 곳과 반대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렇게 걷던 이들이 멈춘 곳은, 인적이 드문 골목이었다.
귀를 기울이자, 하루가 바닥을 가리키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다. 그놈들이 이리로 들어가서, 저쪽으로 걸어가는 것까지 봤지.”
하루의 손가락이 세인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기에, 세인은 얼른 주차된 차 뒤로 몸을 감췄다.
그때, 세인의 눈에 자신이 숨어 있는 차 옆을 달려가는 남자가 보였다.
헐렁한 조거팬츠에 흰색 점퍼를 걸친 그를 향해, 제하가 손을 번쩍 들었다.
“환, 여기야!”
제하 일행은 ‘환’이라는 남자를 환영해주고, 하루는 어깨에 메고 있던 활을 환에게 건넸다.
“이 무기는 네가 쓰면 될 것 같구나.”
환은 비장한 표정으로 활을 받아들었다.
그들은 잠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 후, 거침없이 맨홀 뚜껑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사라진 후, 세인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맨홀 쪽으로 걸어갔다.
캄캄한 구멍이 세인을 집어삼키려는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실제로 세인을 집어삼켰던 범의 아가리를 떠오르게 해서, 심장이 쿵쾅쿵쾅 아프게 뛰었다.
하루가 말한 ‘그놈들’이라는 것은, 분명 범을 말할 것이다.
‘어떡하지?’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냥 돌아서서 가던 길을 가면 그만이다.
누구도 세인에게 오라고 하지 않았고, 누구도 세인이 이 자리에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딱 한 번 마주쳐서 대화를 나눈 제하 일행의 생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래도 좋아야 하는데…….
“에이씨! 나도 모르겠다.”

+++
호랑나비 군의 총대장인 동철은 경태의 전화를 받았다.
경태는 제하 일행이 맨홀 안으로 들어갔으며, 아무래도 범을 잡으려는 것 같다고 했다.
[어떡할까요, 대장?]
“내가 뭐라고 했지? 그놈들은 죽여두는 게 낫다고 했지?”
[그, 그렇긴 한데……. 대장, 제가 그동안 지켜봤는데……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범도 열심히 잡고…….]
동철은 한숨을 삼켰다.
교도소에서 만난 경태는, 아직 초범이라 그런지 순진한 면이 남아 있었다.
잡혀 온 것도 친구들이랑 같이 술 마시고 강도질을 하다가 잡혔는데, 친구들이 죄를 전부 경태에게 떠넘겼다고 들었다.
약간은 멍청한 경태가, 동철은 싫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은 잘해주면 잘해주는 만큼 충성을 바치기 때문이었다.
“그놈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 혼란을 가져올 거다, 경태야.”
동철은 달래듯이 말했다.
“내가 말한 게 틀린 적이 있었냐?”
[어, 없긴 한데…….]
물론 없겠지.
동철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술을 마셔도 안 마셔도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어머니는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엄마가 꼭 데리러 올게. 알겠지, 동철아? 착하게 지내면 엄마가 꼭 데리러 올게.”
그래서 착하게 지냈다.
아버지에게 맞아도 울지 않고, 고작 7살인데도 집안일까지 하며, 몇 년을 착하게 지냈다. 하지만 아버지의 폭력은 점점 심해졌고,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어린 나이에, 동철은 깨달았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거.
그 후로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도둑질도 하고, 사기도 치고, 강도질도 하고…….
하지만 동철은 자신을 믿었다.
언젠가 한 방 큰 걸 터뜨려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사람이 될 거라고.
어느 누구도 감히 내 말에 토 달 수 없는, 그런 위치에 앉고 말 거라고.
‘그리고 그렇게 됐지.’
동철의 눈이 번뜩였다.
‘나는 이 자리에 앉았어.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모두가 굽실거리는 이 자리. 내 말을 모두가 믿고 따르며, 토 달지 않는 자리.’
범이 날뛰고 호랑나비의 규모가 커질수록, 동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이들이 많아졌다.
얼마 전에 만난 경찰청장조차도, 동철에게 굽실거리며 범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예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번 잡은 권력은 동철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멀어버린 눈에 새로운 빛이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그 빛은 무척이나 찬란하고 영광스러워서, 다른 것들을 잊게 만들었다.
동철은 그 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동철은 단호하게 말했다.
“성진이네 팀을 보내주마. 협력해서 그놈들을 제거해.”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