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나를 지켜줘. (17/85)

17. 나를 지켜줘. 2022.05.07.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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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한 공기에 불쾌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제하는 손등으로 코를 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빛 한 점 없는 맨홀 안에서도, 어느 정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경계가 사라지고 문이 열리기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남들보다 밤눈이 밝긴 해도,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잘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난 요새 밤눈이 좀 좋아진 것 같아. 당근을 즐겨 먹는 것도 아닌데.” 제하의 뒤를 따라오던 도건의 말에, 잠시 웃음이 퍼졌다. 제하는 도건이 일행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문신이 가득해서 무서워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도건은 나이보다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래서 종종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질 때마다 적절하게 끼어들어, 공기를 부드럽게 순환시켰다. “저건 뭘까?” 환이 가리킨 곳에는 굵은 나무줄기 같은 게 있었다. 쇠로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고, 그 외의 물질로 만들어진 것 같기도 했다. 검붉은 색의 그것은 마치……. “혈관 같아.” 주안이 중얼거렸다. 혈관. 주안의 표현대로였다. 여러 개 줄기가 꼬이듯 늘어진 그것은 혈관 같았고,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신시의 혈관. 그렇게 생각하자 소름이 끼쳐서, 제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건이 겁도 없이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전선 같은 걸까?” 덥석-! 도건의 손가락이 그것에 닿기 전, 하루가 그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만지지 않는 게 좋겠구나. 아직 저게 뭔지 모르잖느냐.” “그거야 그런데…… 뭐, 병균이라도 있겠어? 전선일 것 같은데.” “전선이라기에는 너무 두껍지 않아? 우리 팔뚝보다 두꺼운데.” “하루 팔뚝보다는 두껍겠지만 내 팔뚝보다는 아닐걸.” 도건이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하루가 혀를 찼다. “애구나, 애. 덩치만 컸지, 애야.” 하루와 도건이 육체미를 두고 티격태격하는 동안, 제하는 소리를 들었다. 두……쿵……두……쿵……. 일정한 속도를 가진 그 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도건이 걸음을 멈추고 오른손을 들었다. 도건의 눈동자가 슬쩍 뒤쪽을 향했다. 뒤에서 누군가 따라온다는 뜻이다. 제하 일행은 조용히 무기에 손을 얹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걸으며, 상대가 충분히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공격이 들어갈 것 같은 순간, 제하가 먼저 그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날카로운 검 끝이 상대의 미간을 노렸고, 환이 당긴 화살 끝이 상대의 심장을 겨눴다. 제하의 검이 놈의 미간을 꿰뚫기 전, 제하의 눈동자에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세…….” 휘리릭-! 이름을 미처 다 부르기도 전에, 날아온 밧줄이 세인의 발목을 묶었다. 기우뚱, 넘어지려는 세인의 허리를, 제하가 얼른 받쳐서 끌어당겼다. 졸지에 제하에게 안긴 세인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제하도 같은 표정으로 세인을 던지듯 놔줬는데, 여전히 발목이 묶여 있던 세인이 또 넘어질 뻔한 바람에, 다시 끌어안듯이 도와주는 수밖에 없었다. 한바탕의 소란이 벌어진 후, 밧줄에서 벗어난 세인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동료가 되자더니, 이런 식으로 신고식을 하나 보지? 아주 대단한 신고식이셔.” “미안. 범인 줄 알고.” 제하가 담백하게 사과하며 손을 내밀었다. 세인은 제하의 손바닥을 탁 쳐냈다. “뭐, 됐고. 대체 어딜 가는 거야? 설마 범들이 우글거린다거나, 그런 데에 가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도건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자, 세인이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이 멤버로 범들 본부나 뭐, 그런 데 가려는 거라면 관둬. 그 대단한 호랑나비도 못 한 일이야. 너네 다섯 명이서 할 수 있을 것 같아?” “여섯이야.” “뭐?” “여섯.” 제하가 세인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세인의 눈동자가 술렁, 흔들리다가 제자리를 되찾았다. “난 안 죽을 거야.” “우리, 죽으러 가는 거 아니야. 살려고 가는 거지.” “웃기는 소리. 이 멤버로 공격해봐야…… 되겠어?” “네가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도건이 세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싸우러 가는 거 아니야. 염탐하러 가는 거지. 한번 가서 둘러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치고, 되겠다 싶으면 한 놈이라도 잡아보려고.” 제하 일행도 적들의 본거지에 막무가내로 쳐들어가서 싸움을 벌일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염탐. 그들의 본거지가 확실하게 어디인지, 그곳의 구조는 어떤 식인지,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다들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것뿐이었다. 그제야 세인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겁에 질린 듯, 아까부터 거칠었던 호흡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세인은 오만한 척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좋아, 합류해주지. 대신, 위험한 상황이 오면 날 지키겠다고 약속해.” +++ 경태는 팀원들과 함께 맨홀 앞에서 성진의 팀을 기다렸다. 경태에게 있어서 성진은 동철 다음으로 존경하는 선배였다. 동철의 오른팔. 성진은 자신을 그렇게 지칭했고, 동철 역시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언젠가 경태도 큰 공을 세워서 동철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었다. 처음 들어간 교도소. 만약 동철이 없었다면 그 생활에 익숙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덜 떨어진 놈’이라고 불리는 경태를, 동철은 언제나 감싸줬었다. 덕분에 험한 사람들만 모인 교도소에서도 큰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있었던 건지, 성진은 금방 나타났다. 성진의 뒤로, 훈련을 잘 받아서 절도 있는 1팀 팀원들이 보였다. 1팀은 호랑나비 군에서도 가장 강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팀이었다. “경태야, 기다렸냐?” “아닙니다, 형님.” “형님은 무슨. 너도 이제 나랑 같은 팀장인데.” “아, 아닙니다. 1팀 대장이신 형님과는 차원이 다르죠.” 경태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성진은 경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맨홀을 내려다봤다. 맨홀 뚜껑은 여전히 열린 채였다. “그놈들이 이 안으로 들어갔다고?” “네. 다섯 명이 들어갔는데, 그 후에 또 호리호리한 놈이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럼 여섯 명인가……? 흐음.” 성진은 맨홀을 내려다보며 궁리했다. 따라갈 것인가, 모르는 척할 것인가. 동철의 명령을 받아서 경태를 도와주러 오긴 했지만,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박물관에서 부딪쳤던 제하 일행은, 성진의 팀보다 수도 적고 무기도 형편없었다. 하지만 강했다. 어찌나 강한지, 마치 범을 상대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만약 저 안에 들어간 놈들 모두 제하와 비슷한 실력을 가졌다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터였다. ‘총대장님이 이 멍청한 놈한테 팀까지 만들어서 여기로 보냈다는 건, 미끼로 쓰라는 뜻이겠지.’ 경태 팀이 먼저 놈들을 상대하게 해서 힘을 뺀 다음에, 뒤에서 협력하면 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경태야. 내가 생각했을 때, 이 좁은 맨홀에 우르르 몰려 들어가는 건 비효율적이거든. 안 그러냐?” “네,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 나는 이 근처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너희 팀이 들어가서 그놈들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해보는 거야. 그다음에 나한테 알려주면, 우리 팀이 가서 너희를 도울게. 어떠냐?” 경태는 의심 없이 성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평소에는 멍청해서 답답한 놈이지만, 이렇게 쉽게 믿어주는 면은 좋았다. 경태 팀은 어중이떠중이의 모임이었다. 경태 팀이 제하 일행을 이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실컷 당하고 있을 때 내가 등장해서 제하 놈을 죽여버리면, 그 공은 내 것이 되겠지.”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팀과 함께 맨홀 안으로 들어가는 경태를 보며, 성진은 비리게 웃었다. +++ 제하 일행이 걸음을 멈춘 이유는, 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으로 걷는 와중에도 몇 개의 철문을 지나치기는 했지만, 전부 지하수로 여기저기에 뻗어 있는 혈관 같은 줄기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발견한 문은 혈관 같은 줄기로 가려지지 않았다.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에 잠시 머뭇거리는데, 환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도건이 환의 어깨를 잡았다. “서두르지 마.” “내 동생이 저 문 너머에 있을지도 몰라.” 환의 갈색 눈동자는 지독한 슬픔과 절망, 그리고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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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은 자신의 여동생인 주희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아주 작은 희망을 놓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게, 분명히 존재하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소중한 이의 생존을 희망하는 마음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기에 더는 환을 말리지 않았다. 환은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쇠가 긁히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위험은 없었다. 하지만 상상도 못 한 광경이 그곳에 존재했다. “이게…… 다 뭐야? 여기…… 대체 뭐지?” 그곳은 마치 게임에서나 보던 지하 던전 같았다.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기계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기계음. 거뭇거뭇한 기계들은 지하수로에서 본 것 같은, 기분 나쁜 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관은 천장과 바닥, 벽면을 타고 어딘가로 이어졌다. “여기, A 백화점 지하인 것 같아.” 그렇게 말한 건 주안이었다. 주안은 벽면에 쓰인 [주차장]이란 글씨 위의 작은 글씨를 가리켰다. 분명 [A 백화점]이라고 쓰여 있었다. “여기가 A 백화점이라고? 말도 안 돼. A 백화점은 아직 운영 중이야. 내가 어제 인터넷으로 확인해봤다고.” 세인이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도건이 기계에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게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이런 게 있을 수 있는 거지?” 쿠웅…… 쿠웅……. 일정한 속도로 뛰는 기계음에, 제하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천장의 전구 몇 개가 내뿜는 어스레한 빛 아래에서, 기계들은 마치 인간의 장기처럼 보였다. ‘이 소리는 꼭 심장 박동 같고…….’ 구역질이 나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던 차에, 기묘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쥐와 같은 얼굴에, 거미 같은 몸통을 가진 기괴한 생물이었다. 핏빛 눈동자를 가진 ‘그것’은 제하와 눈이 마주치자, 쪼르르 기계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저걸 놓치면 안 돼!’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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