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지금 여기 있다.
(23/85)
23. 지금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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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지금 여기 있다.
2022.06.18.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병실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세인은 간이침대에 엎드린 채로, 조심스레 호수의 침대를 확인했다.
어젯밤 제하의 멱살을 쥐고 분노를 터뜨린 호수는 한참을 흐느끼다가,
“미안, 네 탓도 아닌데.”
라고 말하고 침대로 돌아간 후, 쭉 저 상태다.
‘자는 것 같지는 않고…….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데.’
어제 호수가 깨어나기 전, 세인은 범의 눈썹으로 호수의 전생을 확인했었다.
호수의 전생 또한 세인,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두와 같았다.
전생이 같은 7명.
서로 인연도 없는 곳에서 다른 삶을 살던 7명이, 하필이면 범들이 기승을 부리자 이렇게 한곳에 모였다.
이쯤 되면 이건 그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다.
말을 해야 하는데, 분위기가 무거워서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범인 제하.
자기가 범바위라고 말하는 하루.
범에게 보육원 동생들을 잃은 도건.
범에게 부모를 잃고, 친동생의 죽음까지 확인한 환.
범이 연인이었는데, 그 연인이 죽은 주안.
고된 고문을 당하다가 범을 뜯어먹고 살아남은 호수.
세인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저들을 앞에 두니 자기 문제는 대수롭지도 않게 여겨졌다.
그런 상황에서 팔자 좋게 범 눈썹으로 전생이나 보고 다니다가,
“야, 이걸로 전생을 봤는데, 우리 전생이 다 똑같더라.”
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다들 배고프지 않느냐?”
침묵을 깬 건 놀랍게도 하루였다.
병실 창문 앞에 앉아서 내내 창밖을 응시하던 하루가 어느새 병실 가운데 서서 일행을 돌아보고 있었다.
“넌 바위라며? 바위도 배가 고파?”
세인이 퉁명스레 묻자, 하루가 대답했다.
“당연히 나는 배고프지 않다. 그래서 묻지 않았느냐, 아가야. 배고프지 않느냐고.”
“어, 배고프다.”
대답한 건, 도건이었다.
도건도 이 무거운 침묵이 숨 막히는지, 아직 상태가 안 좋은데도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병원 밥은 싫은데, 배달이나 시키자. 제하야, 넌 뭐 먹을래?”
제하는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서 이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하 역시 어젯밤부터 쭉 저 상태였다.
호수는 제하를 놔두고 자기 침대로 돌아갔고, 남은 일행은 제하에게,
“그래,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네 탓이라고 생각 안 해.”
라며 달래주었지만, 제하는 저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하야말로 바위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이번에도 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건이 세인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울적해하는 사람을 달래주는 법 따위, 세인은 알지 못했다.
도건과 하루, 세인이 떠들자, 누워 있던 환과 주안도 몸을 일으켰다.
환은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용기 있게도 제하의 침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제하 옆쪽을 쾅, 내리쳤다.
그제야 제하가 반응했다.
“……왜?”
“난 내 눈앞에서 범이 부모님을 죽이는 걸 봤어.”
“미안해…….”
“내 동생도 범에게 납치당해서 죽었어.”
“미안해…….”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는 말만 하염없이 내뱉는 제하의 뺨을, 환이 양손으로 감싸 눌러,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미안…….”
“범이 했다고.”
“…….”
“범이 한 거야. 네가 한 게 아니라.”
“하지만 내가 결계를…….”
“그것도 범이 한 거야. 네 정신에 무슨 짓을 해서. 과연 여기서 범이 작정하고 뭔가를 하는데, 그걸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네 탓 아니야.”
제하가 눈물을 참으려는 듯 눈을 감았다.
“남의 탓 하다 보면 끝이 없어. 내 탓이라고 자책해도 끝이 없고. 뭐든 그렇더라고. 후회하고, 남 탓하고, 자책하고……. 아, 그래. 그것도 좋지. 좋은데…… 그런데 우리, 그렇게 낭비해야 할 만큼 시간이 많아? 지금 이 순간에도.”
환이 검지로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거야. 그중에는 우리 엄마 아빠 같은 사람도 있을 거고, 내 동생 같은 어린애도 있겠지. 우리는 여기서 우울하다고 바닥 긁고 있는데, 저기는 치열하다고.”
환이 손으로 제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범이 아버지라고? 그래서? 잘된 거 아냐? 넌 범의 힘도 쓸 수 있잖아. 그리고 너, 호수라고 했지?”
환이 어느새 이불을 걷고 일어난 호수를 돌아봤다.
“괴물이 됐다고? 잘됐잖아. 너, 진짜로 강하더라. 괴물이든, 뭐든, 강해서 살아남을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지금 이 신시에, 너처럼 강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나만 해도…….”
환은 호수처럼 강했더라면 구할 수 있었을 가족이 떠올라, 잠시 말을 멈췄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환이 말했다.
“우리, 살아남았고, 지금 여기 있잖아.”
환의 말이 끝나자, 병실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각자 다른 표정으로 환이 지금 한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였다.
짝. 짝. 짝.
병실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도건이었다.
모두 도건을 돌아보자, 도건이 말했다.
“왜? 열정적인 연설이었잖아. 박수 쳐줘야지. 멋지다, 환.”
환이 피식 웃었다.
“박수는 됐고. 배고픈데 얼른 밥이나 먹자.”

+++
이런 때에도 배달을 할까 싶었지만, 이런 세상에서도 자기가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고마운 분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하시니까, 세상이 망하는 일은 없을 거야.”
환이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쪼개서 호수에게 주며 말했다.
동생을 찾아다닐 때의 환은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보였지만, 동생의 죽음을 알고 나자 오히려 모든 걸 딛고 일어난 사람처럼 명랑해졌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알았다.
딛고 일어난 게 아니라, 그러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는걸.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슬픔에 짓눌려 숨이 막혀 죽을 것이기에, 복수를 끝낼 때까지만이라도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슬픔은 잠시 접어두고 평소처럼 지내기로 했다는걸.
가족을 모두 잃은 환이 그렇게 노력하니, 다른 사람들도 울적함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젓가락을 움직였고, 아무 슬픔도 모르는 사람처럼 담소를 나눴다.
제하와 호수가 아직 어색하기는 해도, 호수는 어제처럼 금방이라도 죽일 것 같은 눈으로 제하를 노려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세인은 고민했다.
‘어떡하지? 얘기를 해야 하나? 갑자기 전생 얘기를 꺼내고 그러면, 미친놈 취급받는 거 아냐? 거기다…… 내가 전생에서 본 건, 인간도 아니고…….’
세인이 갈등하고 있는데, 주안이 물었다.
“세인아, 그건 뭐야?”
그거?
세인이 주안의 시선을 따라가자, 왼손에 꼭 쥔 범 눈썹이 있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습관처럼 꺼내서 쥐고 있었나 보다.
“아, 이거.”
마침 잘됐다 싶었다.
“범의 눈썹이야.”
“범의 눈썹?”
“응. 사실은 내가 범한테 잡아먹혔었거든.”
세인은 담담히 말했지만, 아직도 그날이 생생했다.
늦은 저녁.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
집 근처 골목에서 가족과 마주쳤다.
부모님, 그리고 형.
세인이 없어도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걸어오던 그들은, 세인을 발견하자 일순 조용해졌다.
-“세인이, 수업 끝나고 오는 길이니?”
이윽고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어왔지만, 세인은 그 안에 담긴 어색함을 느꼈다.
-“마침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자.”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같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읽었다.
어릴 때라면 눈치 없이 신나서 끼었을 것이다.
“내가, 뭐…… 가족이랑 딱히 사이가 나쁜 건 아닌데, 살짝 어색한 사이야.”
어머니는 형을 낳고 육아를 하다가 복직하려던 참에, 세인을 임신했다.
둘째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날, 어머니는 많이 울었다고 했다.
기뻐서가 아니라 낳기 싫어서.
아이는 형 하나로도 충분해서.
“나는 형이 못 간 의대도 들어갔는데……. 아,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지. 아무튼!”
평범한 직장인인 부모님은 형을 의사로 만들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형은 실패했고, 아무 지원받지 못한 세인이 성공했다.
세인이 의대 합격을 알리던 날, 부모님은 형의 눈치를 보다가 어색하게 말했다.
-“아, 그러니?”
잘했구나. 고생했다.
노력한 아들에게 응당 해주어야 하는 칭찬의 파편조차 없었다.
“골목에 가족이랑 있다가 범을 마주쳤는데. 그때, 먹혔어.”
범에게 먹히기 직전, 세인은 똑똑히 보았다.
어머니가 형의 손목을 잡아 자기 뒤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그 순간, 세인은 부정하려고 했던 진실을 깨달았다.
부모님에게 아들은 형 한 명뿐이라는 것.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에 절망하기도 전에, 범이 세인을 삼켰다.
“뭔가 좀 이상하더라고. 아그작아그작 씹어먹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통째로 삼키더라. 꿀꺽. 뭐, 범들마다 식사하시는 법이 다르겠지.”
범의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쿵, 떨어진 곳은 이상할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위라는 게 말이야. 굉장히 잘 늘어나는 부위라서, 먹는 만큼 늘어나기는 해. 그런데…… 그건 그 수준을 넘어섰어. 그냥, 되게, 음. 넓었어. 마치 넓은 방에 들어간 기분이었어.”
넓고 어두운 공간에, 꽤 오랜 시간을 갇혀 있었다.
꿀렁, 꿀렁, 움직이는 느낌에 범의 위장이 확실하긴 한 것 같다고 짐작했다.
어떻게 나가야지, 하고 고민할 무렵, 세인이 떨어졌던 곳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산산조각 난 인간의 시체였다.
“범이 삼킨 사람 시체가 떨어져서 정말 놀랐어. 그거야말로 아그작아그작 씹어서 먹은 것 같은 시체였거든. 하, 너네도 그걸 봐야 해. 난 진짜…….”
공포에 질렸다.
그제야 범에게 잡아먹혔다는 걸 실감했다.
그전까지는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미친 듯이 부르짖고, 위벽처럼 보이는 곳을 두드리고, 제자리에서 뛰어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또 몇 시간 후.
후드득, 후드득, 인간의 시체가 떨어졌다.
“아직도 그걸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 물론 난 토하지 않았지.”
사실은 토했다.
주저앉아서 한참 토하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웅얼웅얼 들려오는 범의 목소리.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