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머나먼 과거에서 이어진 의지
(25/85)
25. 머나먼 과거에서 이어진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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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머나먼 과거에서 이어진 의지
2022.07.02.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타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제하는 머릿속이 찡하고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다들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범과 곰이 사는 세상. 범과 곰의 혼혈.
예전이었다면 믿지 못할 이야기겠지만, 범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이때에 믿지 못할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싶다.
“그리고 나는 그 흑범을 후포라고 부르지.”
세인의 말에 제하는 눈을 크게 떴다.
반사적으로 하루 쪽을 돌아보니, 하루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동안에도 세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후포는 그 세상, 여기랑 똑같이 신시라고 부르는, 그곳의 수호자야. 우리는 같이 신시를 평화롭게 만들기로 했는데…… 후포가 날 배신했어. 범들이 신시에서 곰들을 밀어내기 위해, 몰래 곰들을 죽이고 다니기 시작한 거야.”
“갑자기 왜? 사이 좋던 범들이 곰들을 신시에서 쫓아내야 할 이유라도 생긴 거야?”
도건의 질문에 세인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확실하게는 몰라. 이게 막 자세하게 보여주는 건 아니거든. 분명한 건, 범이 곰이랑 다른 종족들을 끔찍한 방법으로 죽이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신시의 모든 종족이 범족을 미워하게 됐다는 거야.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지. 나는 곰의 편에 섰어. 범이 선을 넘은 거니까. 그리고…….”
세인의 눈이 제하의 침대 옆에 세워져 있는 검으로 향하자, 모두 세인의 시선을 따라서 눈을 움직였다.
세인이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딱 저렇게 생긴 검을 들고 말해. 내가 선두에 서서 이 땅에 평화를 갖고 오겠다고.”
지끈-
제하는 두통을 느꼈다.
박물관에서 검을 손에 쥐는 순간, 그 검의 이름과 함께 흘러들어온 기억.
그때는 그저 이상한 걸 봤다고 생각하며 넘겼는데, 이번에는 좀 더 또렷한 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후포, 자네는 수호자의 자격이 없어.”
새까만 검이 후포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후포는 심하게 다쳤지만, 그의 눈동자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제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기가 시작한 일인데 왜 그런 눈빛을 하는 거지?’
후포의 노란 눈동자 안에 담긴 건, 증오. 그리고…….
‘왜 그렇게 슬픈 눈빛인 거지?’
이해 못 할 슬픔.
“야, 제하. 왜 그래?”
환이 제하의 어깨를 흔들어서, 제하는 환각에서 벗어났다.
“세인의 말은 사실이야.”
“당연히 사실이지! 지금까지 내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냐?”
세인이 볼멘소리를 냈다.
제하는 침대 옆에 가서 척살검을 갖고 돌아와 앉았다.
“박물관에서 이 검을 쥐었을 때, 나도 세인이가 본 거랑 비슷한 걸 봤어. 아니, 들었다고 해야 하나? 전쟁 전에 이 검을 쥐고, 수많은 곰과 이종족 앞에서 이 땅에 평화를 갖고 오겠다고 선포해.”
“나도…….”
호수가 입을 열었다.
“나도 봤어. 범을 먹었을 때, 본 것 같아. 세인이가 말한 거랑 비슷한 거. 마치 내 기억인 것처럼, 뭔가가 흘러들어왔어.”
모두 묵묵히 제하의 척살검을 응시한 채 생각에 잠겼다.
믿기 어렵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
“잠깐만. 그러면 뭔가 이상하잖아.”
도건이 침묵을 깼다.
“만약 우리가 전생에 타배였다면…… 어떻게 그게 가능해? 전생이 있다는 건, 영혼이 있어서 그 영혼이 다시 태어난다는 건데……. 이상하잖아. 어떻게 우리 모두가 타배일 수 있는 거지?”
“나는 아니다.”
하루가 손을 들었다.
“나는 범바위다. 전생에 그 무엇도 아니었지.”
“아, 그러네. 그럼 넌 타배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아무렇지도 않았냐? 난 세인이가 타배라는 이름을 꺼냈을 때, 머리가 지끈거렸거든.”
“흐음. 그건 좀 이상하구나.”
하루가 있지도 않은 턱수염을 쓰다듬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나도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머리가 살짝 아팠으니……. 내게 전생이 있을 리 없는데도…….”
“전생에 타배였다가 바위가 된 건 아니고?”
주안의 질문에 하루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나는 인왕산의 위대한 범바위. 수천, 수만, 수억 년 전부터 존재해온 유일무이하고 고귀하며 경이롭고…….”
“아무튼.”
하루의 헛소리가 시작되기 전, 제하가 얼른 끼어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세인이가 본 게 전생이든 뭐든, 우리 사이에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거야. 그리고…… 우린 비슷한 목표가 있지.”
“이 세상에서 범을 없애는 거.”
호수가 제하의 말을 받으며, 제하와 눈을 맞췄다.
어젯밤 둘 사이에 존재했던 서글픈 원망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주안이 말했다.
“불티는 상급 범일 텐데, 놈을 이기지는 못했어도 큰 상처를 입혔어. 우리가 힘을 합치면 상급 범도 상대할 수 있는 거야.”
“후포를 찾아야 해. 그놈이 아직 살아서 이 신시로 나온 거라면.”
세인의 말에, 제하는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서 봉인을 깨게 만든 것이 후포라고 말해주었다.
도건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는 건, 상급 범은…… 적어도 후포는 최면술 같은 걸 쓸 수 있다는 거네. 조심해야겠어.”
“응, 그래도 그 후포라는 범이 대장이라면, 그 범을 찾아내서 죽이든, 설득하든, 이 싸움을 끝내도록 하는 게 우선이겠지. 우리끼리 신시에 있는 범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을 테니까.”
환이 중얼거리며 모두를 돌아봤다.
그들의 시선이 가운데에 놓아둔 척살검으로 향했다.
제하가 척살검 손잡이를 쥐며 말했다.
“타배는 범을 베고,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겠다고 했어.”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귀에 타배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굵고 강한 음성.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범들과 각자의 사연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제하가 척살검을 세로로 세우고,
“우리가 이 땅에 평화를 가져와야 해.”
라고 말하는 순간, 오래전 타배가 가졌던 의무감이 사심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채웠다.
그들은 범의 눈썹이 없이도 자신을 응시하는 여러 종족의 신뢰에 찬 눈빛을 보았으며, 척살검이 없이도 그들의 환호성을 들었다.
그 순간 그들은 타배의 자리에 서서, 수만 년 이 땅에 존재했던 무수한 이들의 신뢰와 소망을 전해 받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삶을 살던 평범한 청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신시에서 평범함은 사라졌고, 사라진 평범함을 되찾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무거운 의무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들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여러 감정을 억누르며, 그들은 조용히 척살검을 응시했다.
“그런데.”
침묵을 깬 건 도건이었다.
“우리 팀 이름은 뭐로 하지?”
제하가 웃음을 터뜨리자, 도건이 미간을 좁혔다.
“왜? 내가 뭐 웃긴 말 했냐?”
“아니, 형 덕분에 긴장이 확 풀려서.”
“응, 정말…… 숨 막힐 뻔했는데.”
주안도 미소 띤 얼굴로 제하의 말에 동의했다.
도건이 머쓱한 듯 시선을 피했다.
“아니, 뭐. 호랑나비처럼 팀 이름이 있어야 활동하기 편할 거 아냐.”
“타배, 어때?”
세인의 말에 환이 고개를 저었다.
“만약 후포가 신시에 있다면, 우리가 타배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걸 그냥 두고 볼까?”
“아, 그러네. 취소, 취소. 타배는 안 돼.”
“착호갑사.”라고 말한 건, 하루였다.
다들 생경한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하루를 쳐다보자, 하루가 우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모르느냐? 예전에는 범을 잡는 병사들을 착호갑사라 불렀었지.”
“오, 그래? 넌 별걸 다 안다?”
놀라는 도건과 달리, 제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이야? 확실한 단어 맞아? 어디 하나 틀린 건 아니고?”
지금껏 하루는 속담을 제대로 말한 게 손가락에 꼽았다.
“아가야. 점점 버르장머리가 없어지는구나. 몇 번이나 말한 걸 또 말하게 하지 말거라.”
“네가 뭘 몇 번이나 말했는데?”
“나는 수억 년 전부터 존재해온 위대하고 고귀하며…….”
“착호갑사. 진짜로 있네.”
휴대폰으로 검색해본 환이 하루의 말을 끊었다.
하루가 그것 보라는 듯 제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너는 날 좀 더 믿을 필요가 있다.”
“네가 해온 게 있는데, 믿음이 가겠냐? 아무튼 그럼 우리 팀명은 착호갑사로 가는 거야?”
“착호갑사까지는 좀 긴 것 같은데, 깔끔하게 착호 어때? 착호. 착호가 입에 착 붙잖아.”
그들은 환의 말대로 착호로 할지, 착호갑사로 할지 의견을 나누다가 결국 ‘착호’로 팀을 등록하기로 결정했다.
범 사냥꾼 착호.
머나먼 과거에서 시작된 의지가 신시의 어느 작은 병원에서 조용히 싹을 틔웠다.
+++
19구의 A 백화점에서 벌어진 사건은, 한동안 신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미 범들에게 습격당해서, 범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살인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지만, A 백화점 지하에 갇혀 있던 생존자들의 증언은 다시 한번 사람들을 공포로 밀어 넣었다.
범들이 인간을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끔찍한 고문까지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혼돈에 빠졌다.
돈 많은 사람들은 큰돈을 주고서라도 개인적으로 범 사냥꾼을 고용해 곁에 두려고 했고, 그럴 돈이 없는 소시민은 여러 명이 함께 다니며 생활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범 사냥꾼들에게는 좋은 현상이었다.
최근 사람들이 범의 공포에 익숙해지면서, 범 사냥꾼들을 전처럼 대우해주지 않는 데다가, 몇몇 범 사냥꾼들의 만행 때문에 일부에서는 범 사냥꾼을 군대처럼 정부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에 대한 공포가 다시 한번 부각되자, 사람들은 자기들 근처에 범 사냥꾼이 살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느 아파트에서 범 사냥꾼을 위해 가장 전망이 좋은 집과 생활비 일체, 자동차를 지원해준다며 범 사냥꾼을 찾자, 다른 곳들도 비슷한 지원을 해준다고 하며 범 사냥꾼이 들어와 살기를 바랐다.
돈 많은 사람들은 개인 보디가드로 활동해줄 범 사냥꾼을 찾았다.
그럴 때에, A 백화점 지하에 갇혀 있던 생존자들이 치료와 회복을 끝내고 퇴원했다.
그동안은 경찰을 통해서만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므로, 그들이 퇴원하는 날 생생한 증언을 얻기 위한 방송국 차가 병원 앞에 모였다.
생존자 대부분은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었기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서기 좋아하는 몇 명이 카메라 앞에 섰다.
많은 질문과 많은 대답이 이어지고, 대학생이라고 밝힌 젊은 남자가 앞으로 파장을 불러일으킬 증언을 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