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 사람 (40/85)


40. 사람
2022.10.15.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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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감이 교차했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래도 참 좋았던 느낌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후포가 미웠다.

그 좋았던 나날을 망가뜨리고, 인제 와서 또 한 번 제하의 삶을 망가뜨린 후포를 증오했다.

그를 보면 그저 죽이겠노라고,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 목을 베어버리겠노라고, 언제나 생각해왔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후포를 앞에 둔 지금, 제하는 어째서인지 그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을 수가 없었다.

‘죽여야 해. 이놈이 신시에서 벌어진 모든 불행의 근원이야.’

제하는 허물어질 것 같은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이놈 때문에 우리 가족이 엉망이 됐고, 내 동료들의 삶도 망가졌고, 신시 전체가 불행에 빠졌어. 이놈만 아니었다면, 이놈이 나에게 최면을 걸어서 결계를 풀지만 않았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그래, 후포는 ‘악’이다.

제하는 검 손잡이를 쥐고 천천히 끄집어냈다.

“아, 안 돼요.”

그때, 아이 아빠의 목소리가 제하의 움직임을 막았다.

제하가 돌아보자, 아이 아빠가 다가왔다.

“그, 그분이 우리를 도와줬어요.”

“……도와줬다고요? 잡아먹으려고 했던 게 아니고?”

질문한 건, 주안이었다.

아이 엄마도 아이를 안고 가까이 왔다.

“네, 도와줬어요. 목숨을 걸고……. 우리만 아니었다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우리를 지키느라 그렇게 된 거예요.”

“착한 아저씨예요. 날 안아줬어요.”

아이까지 후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하는 검을 쥔 채 멍하니 아이의 가족들을 올려다봤다.

저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생명의 은인을 죽이려고 하는 악당으로 보일까?

하지만 진짜 악당은 후포인데?

그런데 정말? 아이 가족을 살리려고 목숨을 건 후포가 악당일까?

하지만 후포는 내 부모님을 죽였어. 나한테 최면을 걸었고, 결계를 깨게 했고, 신시를 이 지경에 몰아넣었어.

그런데 내가 악당이야? 후포가 은인이고?

“제하야.”

혼란에서 오는 분노가 제하를 휘감기 전, 하루가 제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자꾸나.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없는 것 같다.”

하루의 깊고도 지혜로운 잿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술렁거리던 감정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응.”

제하는 도로 검을 집어넣고 일어났다.

“병원에, 데려다줄게요.”

제하의 제안에 아이 엄마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고…… 저희는 일단 저 사람을 좀 치료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사람.

저들은 후포가 범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이라고 했다.

제하는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

제하 일행은 본부에 도착할 때까지 말없이 걸었다.

이윽고 도착한 본부에는, 도건이 와 있었다.

도건은 호수를 따라서 나갔지만, 종종 제하를 찾아오곤 했다.

“왜들 그렇게 심각해?”

“그렇게 됐어.”

주안이 힘없이 대답하며, 거실 구석에 부러진 창을 세워뒀다.

“창 부러졌네? 어디서 심한 싸움이라도 한 거야?”

“응, 좀…….”

주안이 제하를 걱정스레 응시했다.

주안은 불티에게 연인을 잃었지만, 후포에게는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후포가 제하의 부모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제하를 어떤 식으로 이용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제하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낄지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혼란스럽겠지. 내 부모를 죽인 남자가 어떤 가족에게는 영웅이라는 사실이 절망스럽겠지.

제하는 심성이 착하고 순진한 면이 있었다.

남을 구했다는 사실 따위 무시하고 개인적인 복수를 해도 될 텐데,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일가족을 구했다는 이유로 후포를 놔두고 돌아왔다.

그래서 더 괴로울 것이다.

제하가 죽이고 싶은 ‘범’을, 그 가족이 ‘사람’이라고 해서.

“형, 호수는 좀 어때?”

제하는 이런 와중에도, 호수를 걱정했다.

“그냥저냥…… 뭐, 그렇지. 그나저나 대체 어떤 놈이랑 싸웠기에, 너희가 이 지경이 된 거야? 내가 마주쳤으면 난 한 방에 갔겠다.”

도건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돌렸다.

“그게…… 좀 이상해.”

제하가 식탁에 앉자, 모두 식탁에 둘러앉았다.

다 함께 쓰기 위해 마련한 8인용 식탁인데, 이제 이 자리를 채운 건 네 명뿐이다.

“포수 알람이 울려서 갔는데…… 거기에 뭔가 이상한 게 있었어.”

“이상한 거? 뭐?”

제하가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주물렀다.

“괴물.”

“……범?”

“괴물.”

“몬스터?”

“비슷해.”

제하는 자신이 그곳에서 본 것을 설명했다.

심각하게 듣던 도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꿈…… 아닐까?”

제하가 한숨을 쉬며 주안을 돌아보자, 주안이 말했다.

“꿈 아니야. 그 자리에 나랑 하루도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범을 잡으러 갔는데 괴물이 있었다, 그거지?”

“응.”

도건이 두 팔을 앞으로 쭉 뻗고 탁자에 엎어졌다.

“으아, 괴물이라니. 범도 상대하기 힘든데, 또 뭔 일이라냐?”

“그건 평범한 괴물이 아니야. 상급 범을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했어. 만약 그 괴물이 한 마리면 다행이지만, 그런 게 여러 마리 있다면…….”

제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시는 멸망할 거야.”

+++

도건은 울적한 기분으로 호수와 세인, 환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돌연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두두리처럼 그 당시에 살아남은 일족 중 무언가가 그런 식으로 진화한 거라면…… 아니, 아니야. 그 무엇도 그런 식으로 진화할 수는 없어.”

제하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떠올랐다.

-“만약, 정말 만약에 말이야.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그런 걸 키우는 거라면…… 아니, 그럴 리도 없겠지.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하겠어?”

결국, 답은 나오지 않은 채, 도건은 그 집에서 나왔다.

1년 전 이맘때만 해도, 동생들과 함께 지내던 집에 돌아올 때마다 가슴이 아릿해졌다.

도건은 허름한 판잣집의 지붕을 올려다보다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표정을 바꿨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울적하지 않다는 듯.

그렇게 집 안에 들어가자, 우울한 분위기가 도건을 맞이했다.

좁은 단칸방 여기저기에 드러누워 있는 호수와 환, 그리고 세인.

“너희들 말이야. 계속 이렇게 우울해할 거면, 그냥 착호 본부로 돌아가는 게 어때?”

“난 안 우울해!”

세인이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그런 것 치고는 죽상인데.”

“난 원래 좀 진지한 편이라서 잘 안 웃거든?”

“그리고 환이 너, 착호 본부에 있을 때는 장난도 잘 치고 그러더니 요새는 입 꾹 다물고 한마디도 안 하더라.”

“난 원래 과묵해.”

“아, 그러셔.”

도건은 마지막으로 호수를 돌아봤다.

도건이 뭐라 하기 전, 호수가 오른손을 슬쩍 들었다.

“통하지도 않을 개그 할 거라면 관둬. 설교도 관두고. 들을 기분 아니니까.”

“폼 잡기는.”

도건이 툴툴거리며 코트를 벗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주안이, 창 부러졌더라.”

“헐. 진짜? 그거 저번부터 간당간당하더니, 결국 맛탱이가 갔네. 어쩐대? 사러 간대? 걔들끼리 가면 또 사기당할 텐데.”

세인이 바짝 다가앉아서 관심을 보이다가, 도건이 지그시 응시하자 시선을 피했다.

“아니, 뭐. 우리가 뜻이 안 맞아서 나온 거지, 죽일 듯 미워해서 나온 건가?”

“오늘 괴물을 만났대.”

도건은 누운 채로 느릿하게 제하 일행에게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어느새 환과 호수도 도건의 옆에 바짝 붙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다친 데는 없대?”

환의 질문에 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상처야 뭐, 항상 생기는 거고.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다. 다만, 후포라는 놈이 심하게 다쳤나 봐.”

“후포……라면, 그…… 제하를 이용한 놈?”

세인이 경악한 듯 묻자, 도건이 말했다.

“거기 있던 인간 가족들을 지키다가 다쳤대. 그 사람들이 후포가 목숨을 걸고 지켜줬다고 했대. 자기들만 없었어도 후포가 그렇게 다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쾅-!

호수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런 말로 날 설득하려는 거라면 관둬.”

“호수야. 지금 내 말의 어느 부분에서 설득을 느꼈냐? 나는 애초에 설득이라는 걸 할 만큼 똑똑한 놈이 아니야.”

“범은 모두 죽어야 해.”

도건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호수를 마주 보고 앉았다.

“호수야. 우리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지 말자.”

“이것 봐, 설득하네.”

“그래, 뭐. 알겠어. 관둘게. 역시 난 설득에 재능이 없다니까. 하지만 이거 하나는 말하자. 제하랑 주안이가 미워서 나온 게 아니라면, 일단 돌아가자. 거기가 여기보다 안전하고, 우리끼리 싸우는 것보다 다 함께 싸우는 게 더 승률이 높아. 만약 제하와 주안이가 범을 살려주자고 하면, 그건 그때 가서…….”

“도건아.”

호수가 도건의 말을 끊었다.

“나는 제하가 무서워.”

처음으로 흘러나온 호수의 속마음에, 일행은 입을 다물었다.

“제하의 눈동자를 마주칠 때마다, 소름이 끼쳐. 제하가 착한 거 알거든. 좋은 녀석인 거 알아. 그래, 나도 걔가 좋아. 그런데…… 무섭고 소름 끼쳐. 나도 걔랑 똑같은 눈동자를 가졌다는 걸 아니까. 나도 이제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어버리니까.”

“…….”

“그래서…… 그래서 미안해. 미안해서 제하를 보기 힘들어. 그런데 제하는 그것도 모르고 나한테 잘해줘. 그런데도 나는 걜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쳐. 마치…….”

호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철창에 갇혀서 고문당했던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도건은 호수와 제하가 잘 지낸다고 생각했었다.

호수와 제하는 원래부터 친구였던 것처럼 사심 없이 농담도 하고, 장난도 쳤다.

그래서 호수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못 가겠어, 도건아. 나는 제하를 볼 때마다 소름 끼칠 거고, 제하가 범을 살려주자고 하면 역시 범의 피가 흐르는 놈이라서 그런다는 생각을 할 거야.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놈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괴감에 빠지겠지. 그런데 도건아. 아무리 노력해도, 안 그러려고 해도, 나한테 범은 그런 존재야. 무섭고 소름 끼치는 존재.”

호수의 눈꺼풀이 올라가며, 달처럼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수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도건을 보며 물었다.

“이래도 내가 그곳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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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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