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 환멸 (45/85)


45. 환멸
2022.11.19.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괴물의 독 안개와 독 가시가 무한하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괴물은 독 안개의 분사를 멈추고, 수백 개의 다리를 꿀렁꿀렁 움직이며, 갈색 범의 정강이를 씹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크허어어어엉!”

갈색 범이 한 번 더 효후했다.

“뭔가…… 올 거야…… 누구든…… 오겠지…….”

제하가 헐떡거리며 말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형은 일단…… 도망쳐…… 그래서…….”

주안이 제하의 어깨를 잡고 말을 멈추게 했다.

타는 듯한 주안의 눈동자는 괴물을 향해 있었다.

“한 번 더…… 해보자…… 내가 한 번 더…… 바람 이동을 사용해서…… 저놈 위로 갈 수 있어…… 널 데려다줄게…….”

제하는 주안이 그렇게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안의 손톱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전투 상태를 유지할 힘이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형…… 부탁해…….”

한 번도 척살검의 무게를 느낀 적이 없는데, 지금은 척살검이 몹시 무겁게 느껴졌다.

몇 번이나 떨어뜨릴 뻔한 검을 움켜쥐며, 주안이 자신을 데리고 뛰어오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풀썩-

주안이 쓰러졌다.

“큭!”

신음에 돌아보자, 길어진 손톱 열 개를 전부 괴물의 몸통에 박아넣었던 주안이 손톱이 잘린 채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갈색 범을 거의 다 삼킨 괴물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짧고 북슬거리던 송충이의 다리들이 점점 길어져서, 그 길어진 다리로 주안의 손톱을 잘라내고 후려친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수백 개나 되는 다리는, 마치 강철처럼 강해 보였다.

‘저걸…… 어떻게 상대해……?’

제하의 시야 끝이 까맣게 물들었다.

제하는 자신이 기절하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어디선가 시작된 검은 안개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

검은 안개가 걷히자, 환은 자기 옆에 쓰러진 경태를 볼 수 있었다.

경태는 어깨와 배에 깊은 상처를 입어서 위험한 상태였다.

경태의 손목에 호랑나비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지만, 환은 이 남자가 자신을 도왔다는 걸 알았다.

적의 검이 환의 목을 찌르려는 순간, 환은 솜털이 바짝 서는 걸 느꼈다.

하지만 호수의 근처에 접근하는 적에게 활을 쏘느라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 공격을, 경태가 대신 맞아준 것이다.

함정까지 파서 우리를 죽이려 했으면서, 인제 와서 도와준 경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 덕분에 살았다.

환은 허리를 굽혀, 경태를 번쩍 들어 짊어지고 아래로 내려갔다.

도건은 상황이 종료되자마자 세인을 향해 달려갔다.

호수는 이미 세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상의를 걷어내고 상처를 살피는 중이었다.

“이것 봐.”

호수가 돌아보지도 않고, 세인의 상처를 가리켰다.

“상처가 거의 아물어가고 있어. 피도 생각보다 적게 흘렸고.”

“하씨. 엄청 걱정했는데.”

도건이 세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호수가 도건을 돌아봤다.

“너, 많이 다쳤다.”

“너도.”

피한다고 피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총알들이 도건과 호수의 몸 곳곳에 상처를 입혔다.

하필이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 총알 때문에, 도건의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도건이 손등으로 이마를 슥 닦아내자, 호수가 미간을 좁혔다.

“네 상처도 아물었어.”

“뭐? 내 상처가?”

‘난 평범한 인간인데?’라는 말을, 도건은 꿀꺽 삼켰다.

“으으…….”

그때, 세인이 깨어났다.

세인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배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아파……. 다 죽여버릴 거야…….”

“다 끝났어.”

“뭐?”

도건의 말에 세인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골목 안쪽이라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멀리 쓰러진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저 새끼들 대체 뭐야? 뭔데 왜 우리를 공격한 거야? 범은 아니지? 인간 맞지?”

“어, 인간 맞아.”

도건은 별 생각 없이 한 대답인데, 호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아니, 대체 왜? 왜 우리를 공격한 건데? 우리가 뭘 어쨌다고? 우린 그냥…… 그냥 범이나 잡으러 다닐 뿐인데…….”

아무도 세인의 말에 답해주지 못했다.

그들 역시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도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강한 자를 견제해서 벌인 짓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렇게 함정까지 파서 진짜 죽이려고 드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 같이 힘을 합쳐야 하는 상황에서, 누구도 힘을 합치려 하지 않았다.

“옛날에 말이야. 좀비 영화 같은 거, 아포칼립스물 있잖아. 그런 거 보면, 좀비도 좀비인데, 같은 인간들끼리 막 싸우고 그러잖아. 먹을 거 두고 싸우고, 무기 두고 싸우고, 괜히 싸우고…….”

세인이 구부정하게 앉아서 말했다.

“진짜 이해가 안 됐거든. 설마 저럴까 싶었거든.”

세인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그 뒤에 따라올 문장이 무엇인지 알았다.

‘정말 그러네.’

저벅-

발소리에 돌아보자, 환이 한 남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골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환이 세인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보인다, 너. 푹 잤냐?”

“야, 나 엄청 다쳤거든. 그런데 그놈은 뭐야?”

“호랑나비 쪽 사냥꾼이야.”

“뭐? 그걸 왜 데려와? 죽여버려야지!”

“날 도와줬거든.”

“그래도, 그놈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고.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 거야. 죽은 척하고 있는 거 아냐? 아니면 도와주는 척하고 뒤통수치려는 거 아냐?”

세인이 날을 세우며 말했지만, 환은 경태를 내려놓지 않았다.

“이 사람, 호랑나비 본부에 데려다주고 오려고.”

“아니, 왜? 네가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애초에 그놈들 아니었으면 네가 죽을 뻔할 일도 없었어.”

“그래, 맞아. 그렇긴 한데…….”

환의 뒤로 번진 가로등 불빛 때문에, 세인은 그의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난 그냥…… 이제 그만 좀 싸우고 싶어…….”

지친 듯 말하고 돌아서는 환을, 세인은 잡을 수 없었다.

도건이 끙차 몸을 일으키더니 세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병원에 가 있어. 난 환이랑 같이 갔다가 갈게.”

멀어지던 환과 도건의 뒷모습을, 호수는 말없이 응시했다.

아까는 싸우느라 생각할 시간이 없었지만, 싸움이 끝나자 오만 가지 생각이 밀려들어 호수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아, 진짜…….”

세인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인간들한테 환멸이 난다.”

호수도 그랬다.

 
+++

허서는 동족의 포효를 들었다.

그리하여 달려온 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범을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었다.

수백 개의 이빨에 씹히지 않은 갈색 범의 얼굴을, 허서는 알고 있었다.

불티를 따르는 녀석이다.

“저게…….”

허서를 따라온 범 중 은빛 털을 가진 지추가 경악 섞인 음성을 흘렸다.

허서는 대답 없이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괴물은 제하 일행과의 싸움에서 독 안개를 거의 다 뿜어냈지만, 아직도 공기 중에는 독이 미미하게 섞여 있었다.

범들의 기민한 후각은 공기에 섞인 불길한 것의 냄새를 알아챘다.

한 호흡이 끝나기 전에 처리해야만 한다.

허서의 명령이 없이도, 상급 범들은 각자가 담당할 것을 파악했다.

허서와 하라가 괴물의 양쪽을 치받는 순간, 지추가 괴물의 배를, 옥엽이 괴물의 등을 치받았다.

상급 범 넷의 격돌에 굉음이 울렸다.

꿀렁-

그 무슨 짓을 해도 꿈쩍 않을 것 같은 거대한 괴물의 송충이 같은 몸뚱이가 꿀렁 움직이더니, 괴물이 씹고 있던 범을 내뱉었다.

씹혀서 엉망이 되었음에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갈색 범이 끄으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다친 동족을 돌봐줄 여유는 없었다.

대부분의 생물은 무언가를 먹고 있을 때가 가장 무방비하다. 입에 넣고 씹던 것을 뱉어냈으니, 괴물이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빠르게 간파한 상급 범들은 자신이 가진 힘을 모조리 끌어냈다.

옥엽이 괴물의 등을 타고 올라가, 괴물의 단단한 머리에 두 손을 붙이고 강력하게 착시 최면을 걸었다.

괴물의 뇌를 향해 강하게 쏘아붙인 힘이,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최면이 안 통해? 이렇게 강하게 썼는데도?’

당황은 길지 않았다.

허서의 길어진 손톱이 괴물의 몸통에 파고들자, 괴물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괴물의 긴 다리가 절컥절컥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움직였다.

상급 범들은 재빠르게 다리를 피하며, 가장 약해 보이는 몸뚱이를 위주로 공격했다.

머리 쪽에 있던 옥엽도 도로 등을 타고 내려와, 한 번 공중으로 도약했다가, 괴물의 등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공기를 디딤돌처럼 걷어찬 옥엽의 육체가 화살처럼 괴물을 향해 떨어졌다.

옥엽의 긴 손톱이 괴물의 피부를 찢고, 쭉 뻗은 두 팔이 괴물의 몸 안까지 들어갔다.

“크흑!”

괴물의 몸뚱이 안에는 피가 아닌 독이 흐르고 있었다.

팔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옥엽은 공격에 쓰던 힘의 일부를 상처를 회복시키는 데 돌리며, 괴물의 피부 속에 들어간 손을 헤집어 살덩어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는 동안, 배 쪽에서 공격한 지추 역시 옥엽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아!”

등과 배 쪽의 속살을 쥐어뜯긴 괴물이 괴성을 질러댔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리였지만, 누구도 귀를 막지 않았다.

허서가 날아올라 무릎으로 괴물의 머리 바로 아래를 찍어누르며, 옥엽이 상처 냈던 부위에 두 손을 집어넣었다.

강한 독이 허서의 팔을 타고 올라왔지만, 허서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괴물의 뇌 쪽을 향해 손을 더 깊이 집어넣었다.

이변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대지가 진동했다.

공기 중을 떠돌던 강력한 힘이 어딘가를 향해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인데도, 상급 범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기이한 힘이 모여드는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둠 속에,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검은색 검을 한 손에 쥐어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허서가 중얼거렸다.

“타배…….”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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