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 쓰고 버릴 패 (46/85)


46. 쓰고 버릴 패
2022.11.26.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타배 같지만 타배가 아니라는 것을, 허서는 곧바로 깨달았다.

풍래의 아들.

후포가 죽이려 했으나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인간.

‘제하.’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제하의 몸이 솟구쳤다.

상급 범들의 눈으로도 좇기 힘들 정도의 속도였다.

상급 범들은 저런 움직임을 가진 사내를 알고 있었다.

곰과 같은 힘을 가지고, 범과 같은 속도 또한 가진 사내.

그저 한 번의 도약으로 괴물의 머리보다 높은 곳까지 올라간 제하가, 아래쪽에 있는 괴물의 머리를 향해 검을 찍어누르듯 내리꽂았다.

쩌억-!

도무지 갈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단단한 두개골이 쪼개지며, 괴물의 몸통이 반으로 갈렸다.

상급 범들은 쪼개진 괴물에게서 터져 나오는 체액을 피해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제하는 그러지 못했다.

그대로 떨어져 괴물의 질퍽한 체액에 파묻혔다.

체액이 흐른 땅이 검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멍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던 허서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제하를 체액 속에서 끄집어냈다.

그 과정에서 허서의 팔과 다리에도 독이 묻었다.

허서는 상처 치유를 사용하며, 제하의 상태를 살폈다.

독액에 파묻힌 것 치고는 멀쩡했다.

‘기절했군.’

이 자리에 제하가 있는 줄은 몰랐다. 괴물의 존재감이 너무 강력했다.

인제 와서 돌아보니 갈색 범 외에도 몇 명이 더 쓰러져 있었다.

하루와 주안, 그리고 한때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뼛조각만 남은 누군가.

상황이 종료되었는데도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놈, 제하라는 놈 아냐?”

옥엽이 바닥에 눕혀 놓은 제하를 발로 툭 차며 물었다.

“그냥 둬라.”

“이 검, 그 잡종 새끼 검이잖아.”

지추가 척살검을 험악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이 자식도 그 잡종 새끼처럼 움직이던데…….”

지추가 제하의 멱살을 잡아 올리려 하기에, 허서는 다시 말했다.

“그냥 둬라.”

제하도 제하지만, 그의 동료인 주안과는 안면을 튼 사이였다.

“나래 애인의 친구다. 아, 거기 그 녀석이 나래 애인이고.”

“오, 얘가?”

지추가 제하에게서 관심을 끊고 주안을 요리조리 살펴봤다.

“정말이네. 범이 되다 말았네. 나래 냄새도 나고…….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 자식은 뭘까? 인간 같지도 않고, 범 같지도 않은데.”

옥엽이 하루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쿡쿡 찔러보며 말했다.

괴물 근처에 있던 하라가 손을 들었다.

“여기서 이 미친 괴물이 뭔지 궁금한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거야?”

그제야 범들은 괴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괴물이 뿜어낸 체액은 땅에 거의 스며들었다.

허서는 터벅터벅 걸어가서, 두 쪽으로 갈라진 괴물의 머리 한쪽을 집어 들었다.

“주군이라면 아실지도 모르지. 저걸 다 가져갈 수는 없으니, 이거라도 챙겨 가라.”

허서가 지추에게 머리를 던졌다.

지추가 가볍게 받아들면서 물었다.

“주군이 어디 계시는데?”

“……글쎄. 요새 통 안 보이시는군.”

“설마 인간 놈들한테 당하신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없지. 훌쩍 떠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니 조만간 나타나실 거다. 가봐.”

“넌 어디 가게?”

허서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하와 주안, 하루를 돌아봤다.

지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설마 이 자식들을 도와주려는 건 아니겠지? 이 자식들은 범 사냥꾼이야! 게다가 이 새끼는 잡종이고! 야, 너희도 허서 좀 말려.”

지추가 길길이 날뛰며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옥엽은 곤죽이 된 갈색 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놈, 살아 있는데 어쩔까?”

“그놈도 데려가라.”

“귀찮네. 옷, 새로 산 건데.”

옥엽이 툴툴거리며, 갈색 범을 무자비하게 들어서 어깨에 짊어졌다.

“끄으으으…….”

“시끄러, 이 새끼야. 니들이 요새 무슨 짓 하고 다니는지 모르는 줄 알아? 처맞기 싫으면 입 딱 다물고 있어.”

갈색 범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동안 허서가 제하와 주안을 양쪽 어깨에 짊어지고, 하라가 하루를 안아 들었다.

“진짜로 도와주게?”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우리끼리도 충분했다고.”

허서가 괴물의 사체를 흘끔 본 후, 어깨에 걸쳐져 축 늘어진 제하를 돌아봤다.

“싸움이 쉬워진 건 사실이지.”

허서는 척살검을 발로 툭 차서 올려 손에 쥐고, 그 자리를 떠났다.

+++

동철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피칠갑을 한 두 남자가 동철의 앞에 서 있었다.

전투 후라서 엉망이지만, 동철은 그들을 알아보았다.

환과 도건.

그리고…….

‘경태가 왜……?’

환이 안고 있는 경태는 마치 생이 다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환과 도건은 자신을 둘러싼 호랑나비 사냥꾼들의 흉흉한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저 지친 기색뿐이었다.

환은 저벅저벅 걸어와, 동철의 긴 책상 위에 경태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날 도와주다가 이렇게 됐어.”

“…….”

“그래서 이 사람만큼은 살리고 싶더라고. 아직 숨은 쉬어.”

숨은 쉰다.

그 말을 듣자마자 동철이 외쳤다.

“이 새끼들아! 뭐 하고 있어? 빨리 의사 불러와! 의사!”

바보처럼 서 있던 동철의 부하들이 후다닥 달려나갔다.

환은 그런 동철을 흘끔 보다가 쓰게 웃으며 돌아섰다.

“개새X…….”

환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동철의 폐부에 깊이 박혔다.

동철은 눈을 꿈뻑거리며 경태를 내려다봤다.

미련하고 아둔한 경태는, 동철에게 있어서 그저 쓰고 버리는 패였다. 바보처럼 순진하게 남을 믿는 녀석만큼 이용하기 좋은 놈도 없었다.

경태가 위험한 임무를 하다가 크게 다쳐도, 성진의 말에 반박하다가 뺨을 맞을 때도, 딱히 안타깝거나 가슴 아프지는 않았다.

경태는 그저 쓰고 버리는 패니까. 그런 짓을 당해도 동철을 향해 신뢰와 존경이 담은 눈빛을 보낼 테니까.

위험한 임무 때문에 크게 다쳐서 돌아와도, 형님께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하다며 울먹거리기나 할 테니까.

그럴 때, 아니다, 잘했다 위로해주면, 또 바보처럼 웃으면서 형님을 따르기를 잘했다고 주절거릴 테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아무렇지도 않아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왜……?’

동철은 하얗게 질린 경태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환의 말대로 경태는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동철은 이런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다. 범 사냥꾼을 하기 전에도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봐왔다.

경태는 살지 못한다. 실력 좋은 의사를 불러와도, 경태는 살지 못할 것이다.

뭔가가 가슴에 콱 박혔다. 동철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멍청해서 이용당하기 좋은 놈은 앞으로도 평생 멍청해서 이용당하기 좋은 놈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왜 이놈은 죽어가는 걸까?

“흐…….”

경태가 흘린 긴 신음에 동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경태, 이놈아! 정신 차려!”

“……형님…… 죄송해요…….”

경태가 힘겹게 눈을 뜨고 동철을 보며 말했다.

“이 멍청한 자식. 왜 죽이라는 놈을 도와줘서 이 꼴이 됐냐? 엉?”

“제가요…… 모난 놈이라서…… 죄송해요…….”

“인마, 이 자식아. 모난 게 좀 어때서?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일단 정신 단단히 붙들고 있어. 알겠냐? 곧 의사가 올 거니까…….”

“형님……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의사가 올 거다, 경태야. 말은 나중에 하고 일단…….”

“불길해요……. 그러니까…… 형님…… 제발…… 제발 그저…… 살아남을 생각만…… 하세요…….”

“알겠다, 알겠으니까 아무 말 말고 정신이나 단단히 붙들고 있어. 곧 의사가 올 거야. 알겠지? 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경태의 눈동자는 여전히 동철을 향해 있지만, 빛은 없었다.

“경태야.”

쓰고 버릴 패였다.

“경태야?”

여차하면 방패처럼 적들 손에 던져줄 생각도 있었다.

“야, 인마. 정신 단단히 붙들라니까?”

딱 그 정도의 멍청한 녀석인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아둔한 녀석인데.

그런 녀석이 명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굴다가 죽었을 뿐인데.

왜?

왜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송두리째 잃은 기분이 드는 걸까?

유일한 하나를 잃어버린 기분이 드는 걸까?

+++

청명한 하늘 아래에 녹음이 짙은 계절이었다.

지금껏 쭉 살아온 곳인데 어째서인지 그립다는 느낌이 들었다.

후포는 거대한 신단수 앞에 서서, 그 앞에 펼쳐진 정경을 눈에 담았다.

넓은 길을 사이에 두고 늘어선 건물들과 길 위에서 뛰노는 아이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곰족과 범족, 그 외 다른 종족들도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평화로운 광경을 보는데도, 왜인지 가슴이 미어졌다.

사람들 사이로 큰 체구의 사내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언제나 봐도 좋은 반가운 친구의 모습을 보는 건데, 왜 눈물이 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후포. 또 여기에 있을 줄 알았어.”

사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갈색 피부와 곰처럼 커다란 체구를 가진 사내의 눈 아래에는, 호랑이의 줄무늬 같은 것이 여러 개 새겨져 있었다.

범과 곰의 혼혈.

신시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예언이 있었다.

‘무릇 섞인 자와 함께 멸망이 찾아오리라.’

그 예언 때문에 혼혈은 불길하다고 하여 무시받고 배척당했지만, 타배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타배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수모를 당하며 자랐음에도, 여전히 온화하고 다정하며 고운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혼혈은 강한 힘을 갖지 못한다.

서로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인 탓에 힘이 옅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배는 곰의 힘도, 범의 힘도 완벽하게 가지고 태어났다.

그렇게 강하면서도, 불길하다는 이유로 자신을 타박하는 사람들에게 언성을 높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였던가, 큰비가 내려서 뒷산의 토사가 흘러 내려와 마을을 덮쳤을 때.

타배는 목숨을 걸고 달려가 어마어마한 힘으로 토사를 밀어내고, 그 아래쪽 집에 살던 사람들을 구했다.

그들은 타배만 보면 욕을 하고 침을 뱉던 자들이었으나, 타배에게 도움을 받은 후로는 누구보다도 타배를 기꺼워하게 되었다.

그렇게 타배는 자신을 향한 편견 어린 시선을, 조용히 받아내며 온화한 방식으로 바꿔나갔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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