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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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무언가
2022.12.10.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어, 깨어났네.”
도건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 뒤를 따라서 호수와 환, 세인도 제하의 침대 옆으로 걸어왔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말도 마라. 3일 전에 너희가 병원에 입원한 게, 뉴스에 얼마나 크게 났는데.”
“뉴스에……? 왜? 범 사냥꾼이 싸우다가 다쳐서 입원하는 게 뉴스거리가 되나?”
제하의 물음에 도건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인류의 희망, 착호도 무너지는가? 착호를 쓰러뜨린 범은 누구인가? 그런 거?”
이상하다고, 제하는 생각했다.
요새 착호가 이름을 날리고 있기는 해도, 범과 싸우다가 다쳐서 입원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갑자기 뉴스거리가 되다니. 마치 다른 뉴스거리를 덮으려는 것처럼.
최근 의문이 생길 때마다 그랬듯, 또 빛 한 줄기가 제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전보다 굵은 빛이었지만, 너무 빨라서 잡을 수가 없었다.
저걸 잡아야 하는데, 그래야 이 모든 의문이 해결될 텐데.
“제하야.”
호수의 나직한 부름에, 제하는 빛을 떠나보내고 호수의 호박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비슷한 색의 눈동자가 서로를 담았다.
그저 시선을 마주했을 뿐인데도, 제하는 호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나는 괜찮아.”
그래서 제하는 호수가 사과하기 전에 말했다.
“정말 괜찮아.”
호수의 눈썹 끝이 내려갔다.
미안한 듯, 안쓰러운 듯,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하도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쑥스러워서 시선을 피하며 코를 훌쩍거렸다.
“호랑나비가 함정을 파서 우리를 쳤어.”
그 이야기를 꺼낸 건 세인이었다.
제하가 괴물과 싸우고 있던 그때에, 그들은 호랑나비와 싸웠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경태가 죽었다.
제하는 어리숙해 보이던 경태를 떠올렸다.
“호랑나비 총대장인지 뭔지 하는 사람은? 이름이 동철이랬나? 그 사람은 그 후로 반응 없어? 경태라는 사람 복수하겠다고 덤벼들진 않았어?”
제하의 질문에 환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는 조용해.”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조심해야 해. 우리가 포수 눌러서 우리를 불러낸 사람을 찾아냈거든. 일반인이더라고.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했는지 알아? 그거 도와주면 앞으로 수고비 안 받고서 지켜주겠다고 했대.”
세인의 말에 제하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수고비라니?”
“요새 포수 눌러서 도와주러 온 사냥꾼들이 따로 수고비 요청한다더라. 미쳐 돌아가는 거지.”
도건의 대답에 제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원인 모를 불길함이 뱃속에서 꿈틀거렸다.
영혼 깊은 곳에 각인된, 기분 나쁜 기억이 개화하지 못하고 애꿎은 제하의 속만 뒤집어놨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허억!”
그때, 주안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안 돼, 안 돼, 후포. 그놈을…… 그놈을 상대하지 마……. 도망쳐…….”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주안이 흔들리는 눈으로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후포의 이름에, 세인과 환이 이상하다는 듯 시선을 교환했다.
후포는 제하의 원수이자 범족의 대장일 뿐, 주안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인물이었다.
“주안이 형!”
하지만 짚이는 구석이 있는 제하는 주안의 침대로 달려가,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형도 봤어?”
주안은 혼란스러운 듯 제하를 올려다보다가,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윽…….”
두통을 참으려는 듯 신음하던 주안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린 후에야 침착함을 되찾았다.
“설마…… 너도? 그 괴물……. 그리고…… 그거…… 타배…… 그 타배는 뭐였지?”
주안이 신음처럼 느릿하게 내뱉는 말에, 호수 일행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주안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무슨 얘기들을 하는 거야?”
세인이 답답한 듯 물었다.
제하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하루 쪽을 흘끗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이상한 꿈을 꿨어. 아니, 이것보다는 우선 그전에 만난 괴물을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괴물 얘기라면 우리도 도건이한테 들었어.”
환의 말에 제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 괴물 말고, 또 다른 괴물을 만났어.”
제하는 그곳에서 벌어진 싸움을 천천히 설명했다.
포획한 갈색 범, 갑자기 등장한 송충이 몸통의 괴물, 도저히 이길 수 없겠다 싶을 때 나타나서 도와준 상급 범들.
“그 범들이 괴물이랑 싸우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나도 기절한 것 같아. 그리고 꿈을 꿨는데…… 그 꿈에서 나는 타배였어. 왜인지 모르겠지만, 신단수에 묶여 있었지.”
제하는 타배가 되었을 때 흘러들어온 기억을 이야기했다.
“신시는 평화로운 곳이었어. 곰족과 범족이 수가 많기는 하지만, 다른 종족들도 다 어우러져서 살고 있던 곳이야. 큰 문제 같은 거 없이 다들 잘 지내고 있었는데, 왜인지 갑자기 범족이 타 종족을 죽이고 다니기 시작했어.”
타배는 범족의 대장이자 신시의 수호자인 후포를 만나서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려 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후포를 만날 수가 없는 거야. 다른 문제가 터지든가, 후포가 자리를 비우든가. 그래서 후포와 대화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렀고, 범족들은 점점 잔인해지기 시작했어.”
곰족 일가족이 저녁 식사를 하다가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부모와 어린아이 두 명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죽었다.
“목격자가 있었어. 범 두 명이 몰래 숨어들어 갔다가 몰래 빠져나가는 걸 봤대. 그래서 타배는 다시 후포를 만나려 했는데, 이번에도 후포는 타배를 피했지. 그때, 설이 말해.”
곰족의 영웅 설이 말했다.
후포는 아무래도 신시를 범족만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모양이라고.
-“더 이상의 대화 시도는 무의미하지요. 이대로 대화만 하려고 들다가는 더 많은 희생이 나올 겁니다. 타배, 당신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요? 범족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에요.”
타배는 차게 식은 어린아이를 떠올렸다.
그저 부모님과 맛있는 저녁을 먹을 생각만 하고 있다가 죽임당한 어린아이.
그 아이를 지키는 자세로 죽어간 아이의 부모.
그리하여 타배는 각오를 굳혔다.
“타배는 그저 범들을 수세에 몰고 나서, 후포에게 왜 이런 짓을 한 건지 묻고 싶을 뿐이었어. 그렇게 모조리 다 죽이려고 한 게 아니거든. 그런데, 타배가. 가짜 타배가.”
모두를 학살했다.
차게 웃으며 죄 없는 아이와 힘없는 노인들까지 모두 죽였다.
“그 장면만 보면…… 범족이 왜 그렇게 곰족이라면 치를 떠는지 이해가 될 정도야. 그만큼 잔인하게, 범족을 죽였어. 나는, 그러니까 진짜 타배는 저걸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결박을 풀기 위해 힘을 끌어모으다가, 그걸 봐.”
“괴물.”
주안이 덧붙였다.
“괴물…….”
호수와 도건, 세인과 환은 아직 괴물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어야 하는데, 왜인지 그 괴물이 무얼 말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걸 보는 순간, 잠에서 깼어.”
제하의 말을 마지막으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각자 조용히 바닥을 보며, 지금 들은 이야기에 대해 고민했다.
평범한 꿈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확신했다.
그것은 타배의 기억.
그들이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에 진짜로 벌어진 일.
그것을 꿈으로 꾼 건 제하와 주안뿐인데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광경을 눈앞에서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단수에 묶인 채, 범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걸 지켜보아야 했던 타배의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의문, 혼란 같은 것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짜 타배는 뭘까?”
세인이 작게 꺼낸 질문에 제하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아직 기억이 완전하지 않아. 뭔가…… 뭔가가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질 않아.”
“……그 괴물은 뭐지? 그 괴물이 그렇게 옛날부터 존재했다면, 어떻게 지금껏 잘 숨어 있었던 거지? 왜 이제 와서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지?”
혼란에 젖은 호수가 중얼거렸다.
답을 원하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환이 말했다.
“싸움의 원인은 범족이 다른 종족을 죽이고 다닌 것 때문이라고 했지? 그거…… 정말일까?”
“목격자가 있었어.”
“그 목격자가 한 증언이 진짜일까?”
이제 와서 물어볼 수도 없는 문제였다.
“알겠어. 좋아. 한번 하나하나 따져보자.”
세인이 검지를 들며 말했다.
“우선, 범족이 타 종족을 죽이고 다녔다. 후포는 그런 범족을 눈감아줬다. 왜냐하면 타 종족을 전부 몰아내고 신시를 차지하고 싶었으니까. 이게 진짜라면, 이상한 점이 있어.”
“어떤 점?”
“현재 이 신시에 있는 범 중에, 인간에게 좋은 감정을 품은 범들이 있다는 거. 만약 범들이 후포의 방침을 두 손 들고 환영했다면, 그래서 곰족을 살해하고 다녔다면……. 왜 그들은 신시를 차지한 인간에게 좋은 감정을 갖는 거지? 미워해야 마땅할 텐데.”
“……그리움 때문일까? 사이가 좋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호수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더 이상해. 범들은 모두를 몰아내려고 했어. 그런데 그때를 좋았던 시절이라고 생각하고, 그리움을 느낀다고? 그럼 애초에 왜 곰족을 몰아내려고 했겠어?”
“모두가 후포의 방침에 동의한 건 아니었겠지.”
주안의 말에 세인이 검지로 주안을 가리켰다.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러면 네가 만났다는 허서라는 범의 태도가 이상해.”
“뭐?”
“허서가 불티라는 놈이 한 짓을 믿기 어려워한다고 했지? 그렇다는 건 둘이 다른 방침을 따른다는 거야. 불티는 사람을 죽이고, 허서는 아무나 죽이지 않지. 그리고…….”
세인이 제하를 돌아봤다.
“제하가 만난 후포는 인간을 구하느라 크게 다치기까지 했어. 너무 이상하지 않아? 후포가 타 종족을 전부 없애려고 계획했던 거라면, 왜 인제 와서 인간을 구하는 걸까? 그것도 자기 목숨을 걸고.”
“…….”
“후포가 대장이랬지? 허서가 따르는 방침은 아마도 후포의 방침이겠지. 그렇다면 후포는 왜 아무 인간이나 죽이지 말라는 방침을 세웠을까?”
“곰족을 미워하지 않았으니까.”
대답은 그들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깨어난 하루가 침대에 앉아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세인이 눈썹 끝을 내리고, 이제 모두가 답을 알 질문을 던졌다.
“이게 뭘 뜻하는 것 같아?”
하루가 쓴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있다. 아마도 괴물을 부리는 존재겠지.”
제하의 한숨 섞인 음성이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진짜 적은 범이 아닌 것 같아. 무언가가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더 잔혹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어.”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