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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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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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흉터
2022.12.24.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본부 건물의 옥상에, 제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11월의 차가운 바람이 제하의 검은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타배의 기억을 엿보고 나서 일주일이 흘렀다. 이제야 제하는 간신히 체력을 회복한 터였다.
‘나는 강해졌어.’
송충이 같은 괴물을 상대한 이후, 제하의 육체 안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들끓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지친 몸으로 억누르는 것만도 힘들었다.
그건 주안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타배의 힘 아닐까? 너희가 타배의 꿈을 꾸면서 잠들어 있던 힘이 눈을 뜬 거지.”
세인의 말에, 호수는 웃었다.
-“세인이 너는 그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되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라.”
-“내가 언제!”
진지한 대화를 하다가도 티격태격하는 익숙한 광경은, 제하의 소란스러운 마음을 조금쯤 진정시켜주었다.
괴물. 후포. 타배. 그리고 가짜 타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빛줄기들은 실타래처럼 엉켜서 제하의 머릿속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잡아볼 테면 잡아봐. 넌 평생 날 못 잡을걸.
그렇게 놀리는 것만 같았다.
제하는 빛의 실타래를 쫓는 걸 관두고, 자신의 힘으로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지금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면, 그 괴물을 혼자서도 이길 수 있을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힘을 가졌고, 주안이 형도 가졌다면…… 타배의 전생이 보인다는 우리들 전부 이런 힘을 갖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만약 착호 전부가 이 힘을 자각하게 된다면, 괴물이 나타나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야. 우리 같은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겠지.’
제하는 송충이 괴물의 독액 때문에 썩어서 흘러내리던 남녀를 떠올렸다.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제하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도건은 목욕을 하고 나오는 길인지 바지만 입고 있었다.
물기 젖은 탄탄한 상체 여기저기에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형. 상처 좀 보자.”
“어? 갑자기?”
제하는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상의를 위로 올렸다.
제하의 엉뚱한 행동에 도건이 뒷걸음질을 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역시 나는 흉터가 없어. 그렇게 다쳤는데도…… 주안이 형은 어땠지?’
“도건이 형.”
“어, 어?”
“주안이 형 몸에 난 상처 봤어?”
도건은 의아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 그건 왜?”
“아, 얼른. 주안이 형 몸을 확인해야 된다고.”
“내 몸은 왜?”
방에서 나오던 주안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제하는 달려가 주안의 상의를 휙 걷어 올렸다.
“흡!”
도건이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지만, 정작 주안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응, 나 흉터 없어.”
“나도 그래, 형. 하지만 도건이 형 몸에는 아직 흉터가 남아 있어.”
그제야 도건은 오해를 풀었지만, 그래도 경계심을 거두지 않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흉터가 왜?”
“범의 힘 중에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거든. 나도 그렇고, 주안이 형이나 호수도 그렇고, 그 능력 덕분에 상처를 입어도 빨리 낫는단 말이야.”
“그렇지?”
“그렇다고 해서 흉터가 사라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 난 흉터가 없어. 다 사라졌어. 봐봐.”
제하가 다시 자기 상의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도건은 허리를 굽히고 제하의 복부나 가슴 쪽을 자세하게 살펴봤다.
다른 곳은 몰라도 제하의 가슴에는 후포가 남긴 흉터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사라졌다.
“그러네. 진짜 없네.”
“만약에 말이야…….”
“으학! 너네 뭐해?”
호수와 함께 장을 봐서 들어오던 세인이 바락 외쳤다.
도건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짓했다.
“이리 와서 제하 몸 좀 봐봐.”
“엑, 왜?”
제하는 상의를 내리며 방금 도건에게 했던 설명을 반복했다.
그 말에 호수가 자신의 상의를 걷어 올렸다.
“난 흉터가 있어. 범의 힘은 아니야.”
“그럼 흉터까지 싹 사라지는 힘은 곰의 힘이라는 거네.”
“인간은 곰족의 후손이니까, 잘만 하면 다들 이런 능력을 얻을 수도 있다는 건가?”
동료들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제하는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힘을 좀 더 제대로 알 필요가 있어. 범의 힘이 뭔지, 곰의 힘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잖아. 그걸 알고 나서, 우리가 가진 힘을 좀 더 끌어올려야 해.”
세인이 제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그걸 무슨 수로 알아내지? 범을 사로잡아서 물어봐야 하나? 그러고 보니, 요새 범들도 좀 조용한 것 같던데.”
“그런 괴물을 봤으니 함부로 날뛸 수 없겠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제하야?”
호수가 제하를 돌아봤다.
제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괴물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지금보다 더 큰 혼돈에 빠질 거야. 우선 범 사냥꾼들에게 괴물의 존재를 알리자. 그리고…… 만약 우호적인 범을 만난다면, 괴물 문제에 대해서 의논을 해보자고 전하자. 그리고…… 음. 하루가 오는 대로 표리를 찾아가 보자. 전설이 이어져 온 두두리 일족이라면, 곰과 범의 능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지도 몰라.”
+++
표리는 지하수로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두두리 일족만이 아는 길을 통해 빈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를 부여잡고 구역질을 했다.
“웩. 우웩!”
방금 본 장면이 눈앞에 선했다.
하지만 욕지기가 치미는 이유는 자신의 비겁함 때문이었다.
표리처럼 고대의 힘이 깨어난 동족들은 특별한 힘을 가진 무기를 만들어 시장에 풀었다.
그 동족 중 한 명이 표리를 찾아왔다.
-“신시에 이상한 게 있어.”
어느 폐교에 쓸 만한 물건이 없는지 찾으러 갔다가 보았다고 했다.
동족은 그곳에서 주운 인간의 기계를 넘겨주며 말했다.
-“우리 동족이 사라지는 이유가 범 때문이 아니라 그거 때문일지도 몰라.”
표리는 카메라 안에서 악의로 가득한 괴물을 보았다.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괴물.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 같지 않은 괴물.
실제로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 괴물이 발현하는 독기가 아프도록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거 알아? 우리가 만들어서 파는 무기들, 아무래도…….”
거기까지 말했을 때, 키힉, 키힉,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표리가 벌떡 일어나 비밀 통로로 숨어든 건,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두두리 일족은 언제나 그랬다.
수천, 수만 년 전, 신시에서 쫓겨나서 몰래 숨어들어와 살게 된 후, 곰족의 눈에,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작은 소리에도 반응하며 숨어야만 했다.
‘두고 도망칠 생각이 아니었어.’
아니, 그렇지 않다.
갑자기 나타난 기괴한 괴물. 영상에 찍힌 것과는 다르지만, 그것과 같은 악의를 뿜어내는 괴물.
그 괴물에게 짓이겨지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충분히 나설 수 있었다.
원숭이처럼 생겼지만 코에 뿔이 있고, 손가락이 팔뚝만큼 길고, 겨드랑이와 몸통 사이에 얇은 막이 이어져 있는, 그 끔찍한 괴물에게 꿰여 씹히며, 친구는 표리가 도망친 쪽을 돌아봤다.
그 눈동자에 원망은 없었다. 경악과 걱정뿐.
‘아니, 아니야. 그런 건 보지 못했어. 내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잖아, 지금.’
비겁하다.
친구는 구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괴물에게 씹히면서도 한동안 살아 있었으니까.
그 간절한 시선이 닿는 게 두려워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런 표리의 눈에 들어온 건, 바닥으로 뚜욱뚜욱 떨어지는 친구의 피. 새빨간 선혈.
고여 있어야 할 피가 아주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장면.
-“끄…….”
친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듣자마자, 표리는 돌아서서 도망쳤다.
혹여 괴물이 내 존재를 눈치챌까 두려워서.
친구의 시선이 닿은 곳에 내가 있는 걸 알게 될까 두려워서.
그렇게 비겁하게, 친구를 등지고 도망쳤다.
“우웨엑!”
또 한차례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서 도망쳤다는 말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만약 그였다면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잡종. 혼혈. 착호. 제하.
표리가 잡종이라고 비난을 퍼붓는데도, 흔들림 없이 선연하던 황금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를 비겁한 배신자와 같은 잡종이라 비난했는데.
‘더 비겁한 건 누구지?’
제하는 비겁한 적이 없었다.
그들을 만난 후로, 표리는 착호가 무슨 일을 해내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위험에 빠진 이들을 모르는 척한 적도 없었다.
공포에 질린 인간들 사이에서 그들의 이름은 찬란하게 빛났고, 그리하여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되었다.
어쩌면 이 신시가 예전처럼 안전해질지도 몰라.
그저 범을 상대하는 것만 신경 쓰는 착호는 모르겠지만, 인간들은 착호의 활약을 보며 그러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 희망이 이루어진 듯, 범의 습격이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갑자기 머리가 차게 식었다.
‘목격담은 줄었고, 실종자는 늘었어.’
표리는 변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카메라를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카메라를 전해주던 친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괴물에게 씹히며 표리를 돌아보던 친구의 눈빛도.
‘원망이 아니야.’
머릿속을 뒤흔들던 온갖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표리는 비로소 친구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동족을 구해.’
표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 속의 어둠에 떠오르는 두 개의 태양.
제하의 눈동자.
표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은 각오로 빛나고 있었다.
‘도움을 청해야 해.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