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용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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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용서 (1)
2023.01.14.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누구든 반대해주기를 바랐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연희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연우의 목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우린 몹시 배가 고프거든? 그런데 이건 너무 작잖아. 좀 더 큰 거로 골라봐.”
“그럼 그 여자애도 같이 드시면 되잖아요.”
남자 옆에 있던 여자가 말했다.
남자의 부인이었다.
“그러라는데, 어쩔까?”
“배가 찰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 먹어볼까?”
잿빛 범과 노란 범이 서로를 마주 보며 히죽 웃었을 때였다.
덜컹-!
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회색에 갈색 줄무늬가 있는 범이 들어왔다.
철창 안에 갇힌 사람들은 그 범의 이름이 ‘마로’이며, 이 무시무시한 범들의 대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장 잔혹하게 인간을 괴롭히는 범이기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졌다.
마로가 두 범의 뒤통수를 때리며 성질을 낸 것이다.
“내가 상황을 지켜보라고 했지?”
“아, 그냥 상황을 지켜보려고 온 거라고요.”
마로의 콧등에 주름이 생기며, 크르르르, 하고 무서운 목 울림이 흘러나오자, 잿빛 범과 노란 범이 철창을 잡았던 손을 놓고 뒷걸음질을 쳤다.
“우린 나가볼게요.”
“상황을 지켜보겠습니다.”
두 범이 도망치듯 지하 감옥을 나갔다.
마로는 한숨을 삼키며 지하 감옥 안을 둘러봤다.
50명이 넘는 인간이 철창 안에 갇혀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전에는 유쾌했던 그 모습이, 이제는 유쾌하지 않다.
-“범들을 엄호해!”
약해 빠진 주제에, 겁도 없이 괴물을 향해 총을 쏘아대던 범 사냥꾼 윤미가 떠올랐다.
괴물에게 당해 처참하게 죽은 마지막 모습과 제발 이러지 말라며 애원하던 나래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러면 심장 부근이 끔찍이도 저려서 욕지기가 치밀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어떻게 불티가 나래를 죽이는 걸 보고만 있었지? 나래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웃어넘길 수 있었지? 내 머리가 어떻게 됐던 거지?
그런 의문과 함께, 자후도 떠올랐다.
오랜 옛날 그 싸움에서, 자후는 든든하게 마로의 뒤를 지켜주던 동료였다.
인간을 향한 증오가 눈앞을 까맣게 가려서, 제 살을 뜯어먹히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이 손으로 죽인 범이 몇인가.
단지 인간에게 친절하다는 이유로, 한때는 친구였던 자들을 얼마나 많이 찢어 죽였는가.
내가 배신자 타배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인간 친화적인 범들을 배신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 배신자는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먼저 마로에게 손톱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마로가 철창의 자물쇠에 손을 댔을 때, 뒤에서 불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형?”
“인간들을 풀어주려고.”
“아.”
이번에도 불티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 뭐. 이런 짓은 우리랑 안 어울리긴 하지. 그냥 한 놈, 한 놈 도망치는 걸 잡아서 먹는 편이 더 재미있잖아.”
불티는 저렇게 말하면서도, 최근에는 인간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마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고, 철창의 자물쇠를 손톱으로 베어버렸다.
철그렁-
자물쇠가 바닥에 떨어지고 철창문이 열렸지만, 인간들은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최대한 마로와 불티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
마로와 불티는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다른 철창의 자물쇠도 베어버렸다.
그러다가 “우와아아아아!”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아까 열어준 철창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도망쳐 나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자, 오랜 옛날의 일이 떠올랐다.
그 끔찍한 전쟁.
싸울 의도가 없어서 도망치는 범들의 뒤를 따라가며, 모조리 베어 죽이던 타배.
그 기억이 떠오르자, 잊고 있던 증오가 다시 꺼멓게 피어올랐다.
“크르르르르.”
불티도 마찬가지인지, 송곳니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근처를 지나가는 인간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싶은 듯, 불티의 손등이 움찔 떨렸을 때였다.
“저기…….”
작은 목소리에, 눈앞을 새까맣게 가리려던 어둠이 챙그랑 깨져나갔다.
마로와 불티가 고개를 숙이자,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더 작은 남자아이의 손을 꼭 잡고 서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마로와 불티는 무시무시한 범이지만, 철창에서 사람들에게 치이던 연희에게 그들은 감사한 존재였다.
그전에 마로와 불티가 어떻게 행동했든, 지금 당장의 위험에서 두 아이를 도와준 것은 두 범이었기에, 연희의 눈에는 그들이 영웅으로 보였다.
그 사실을 알 길 없는 마로와 불티는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연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연우야, 너도 인사드려.”
“가, 감사합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두 아이의 영문 모를 감사 인사가 두 범의 가슴에 꽃을 피웠다는 점이었다.
윤미가 심은 씨앗이 싹터, 두 아이로 인해 피어올랐다.
아직 작지만 분명하게 꽃잎을 펼친 그 꽃의 이름은.
용서.
+++
표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자신을 환대하는 착호를 응시했다.
특히 제하.
“잘 왔어, 표리.”
그런 말을 들었으면서도, 제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었다.
그릇이 다르다고, 표리는 생각했다.
본부로 들어가자마자, 표리는 친구에게 받은 카메라를 꺼냈다.
“먼저 이걸 봐.”
표리의 말에 다들 말없이 카메라 안에서 재생되는 영상에 집중했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영상에 집중하는 모습이 조금 우습다고, 표리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나…… 안심하고 있구나.’
저들을 믿을 수 없다고, 특히 제하 같은 잡종은 믿을 수 없다고 퍼부은 주제에, 이곳에 오자마자 웃긴다는 감정을 느낄 만큼 저들을 믿는다.
타배와 같은 혼혈인 제하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자신이 한심했다.
동영상이 끝날 무렵, 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으악! 이게 뭐야? 말도 안 돼. 으…….”
도건과 호수도 경악했다.
“진짜 징그럽네. 와, 어떻게 이런 게 있다는 걸 몰랐지?”
“제하, 네가 상대한 게 이런 거였어?”
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랑 똑같지는 않아. 완전히 다른데, 분위기만 비슷해.”
“미치겠네.”
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루가 표리를 돌아봤다.
“이건 어디서 났느냐?”
“내 친구가 가져왔어. 인간들이 멍청하게 그걸 찍고 잡아먹혔다더라.”
“그 친구는……?”
“죽었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하루가 위로의 말을 건네려 하기에, 표리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
“아니. 지금은 됐어. 일단…… 사과할게.”
표리는 제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황해서 말리려는 제하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잡종이라고 몰아붙여서 미안해. 그런 주제에 도움을 받으러 찾아와서 더 미안하고. 달리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서…….”
“아니, 아니. 됐어. 무릎까지 꿇을 일은 아니야. 왜 그랬는지 짐작이 가기도 하고…… 그러니까, 됐어.”
제하가 황급히 표리의 팔을 잡아서 일으켰다.
좀 더 제대로 사과를 받아도 될 텐데, 당혹감만 가득한 제하의 눈빛에 표리는 쓴웃음이 나왔다.
이런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전해 내려온 전설만 믿고 그렇게 몰아붙였을까.
제하와 달리, 도건은 여전히 표리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래서, 찾아온 이유가 뭔데?”
도건이 퉁명스럽게 물었지만, 표리는 저런 태도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일족은 고대에도 손재주가 좋았어. 그래서 무기나 방어구, 농기구나 건축 같은 걸 담당했었지. 그 척살검도, 우리의 먼 조상이 만든 거라고 전해져.”
표리가 제하의 옆구리에 찬 척살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재주 좋은 걸 자랑하려고…….”
“형. 나, 진짜로 괜찮아.”
비아냥거리는 도건의 팔뚝을 잡으며, 제하가 부드럽게 말했다.
도건이 한 손을 살짝 들어서 항복 표시를 하고는 입을 다물자, 표리가 말을 이었다.
“범들이 등장하면서 고대의 힘도 깨어나기 시작했고, 인간들이 고대의 힘을 되찾아 범 사냥꾼이 된 것처럼, 우리 일족 중에도 고대의 힘을 되찾은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건, 저번에 말했지?”
“말하다 말았지. 우리 제하가 잡종이라서.”
도건의 지적에 표리는 어깨를 움찔했지만,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일족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에게 신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신시? 이 신시에 대한 거?”
환의 질문에 표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멀고 먼 옛날, 이 자리에 존재했던 신시. 아주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신시에 관한 이야기.”
신시가 있었다.
넓고 풍요로우며 평화로웠던 신시.
범신을 섬기는 범족과 곰신을 섬기는 곰족, 그리고 또 다른 신을 섬기는 여러 종족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고 발전시킨 신시.
“그 신시에는 전설이 하나 있어.”
무릇 섞인 자와 함께 멸망이 찾아오리라.
“그래서 타종족이 정을 통해 아이를 낳는 것을 금지했지. 하지만 사이가 나쁜 게 아니니, 그렇게 지내다가 남들 몰래 정을 통하는 이들이 생기고, 그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기도 하는 거야. 그러면 신시에 살던 사람들은 그렇게 태어난 아이를 경계하고 멸시하고 핍박했어. 잡종이라고 부르면서.”
그런 곳에서 타배가 태어났다.
“보통 잡…… 아니, 혼혈은 어느 한쪽의 힘만 물려받곤 했대. 그것도 아주 약간만.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물이랑 우유를 컵 하나에 부었는데, 그거 두 개가 섞인 게 아니라 우유 한쪽만 남는다는 거 아냐? 컵 하나 분량이 남아야 하는데, 반 컵만 남고.”
세인의 비유에 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거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반편이가 되는 거야. 그러니 핍박을 받아도 대처할 수가 없지. 그런데 타배는 달랐대. 곰의 힘도, 범의 힘도 온전히 받았는데, 심지어 양쪽 다 상급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었대. 한마디로, 신시의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했던 거지.”
착호 일행이 서로를 돌아봤다.
상급 곰 이상, 상급 범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었던 타배.
만약 자신들이 타배의 힘을 온전히 되찾을 수 있다면…….
희망이 싹텄다.
착호 사이에 오가는 희망을 눈치채지 못한 표리는 계속해서 말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