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용서 (3)
(55/85)
55. 용서 (3)
(55/85)
55. 용서 (3)
2023.01.28.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범이 수시로 인간을 공격할 때는 바삐 움직여야 하고 돌아왔을 때는 지쳐 쓰러졌기에, 잡생각이 끼어들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범의 습격이 멈추며 시간이 많아지자, 그동안 미뤄뒀던 여러 가지 생각이 착호 일행을 덮쳐 왔다.
도건은 자신을 기다리다가 죽은 동생들을 떠올렸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갔더라면…….’
아니. 더 빨리 도착했더라도 그들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죽었겠지.’
도건은 쓴웃음을 흘리며, 탁자 위에 올려놓은 총을 응시했다.
예전에 하루가 표리에게서 받아온 총.
그때는 표리의 태도 때문에 그가 준 총 따위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직도 표리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정작 그런 수모를 당했던 제하가 용서했으니 자신도 그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야. 나는 별로 도움이 안 돼.’
서포트를 해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힘을 가진 제하와 하루, 주안과 호수가 주 전투원이었다.
도건은 언제나 앞장서서 남들을 이끄는 위치였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가장 앞에서 동생들을 보호하며 싸우는 게 도건의 일이었다.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뒤에서 보호를 받는 이 상황이 익숙해지질 않았다.
‘제하는 안 그래도 진 짐이 많은데, 나까지 짐 덩어리가 될 수는 없어.’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그 고대의 힘인지, 뭔지가 깨어나는 거지? 다들 죽기 직전까지 가서야 깨어났으니, 나도 한번 죽어볼까? 괴물을 만나서 싸워야 강해지려나? 아, 그러다가 진짜로 죽으면 안 되는데. 제하한테…… 아씨, 또 제하한테 도움을 받을 생각만 하네. 이 멍충이.’
도건이 제 머리를 때리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환은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서, 깨끗한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원래 살던 집에서는 벽이 이렇게 깨끗하지 않았다.
환의 목표라든가, 계획표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오빠. 엄마가 만날 그런 거 쓸 시간에 공부나 하래.”
동생 주희의 목소리를, 아주 오랜만에 떠올렸다.
-“오빠, 나 이 과자 먹어도 돼?”
-“안 돼.”
-“우웅……. 알게써어…….”
실망한 기색을 잔뜩 드러내며 돌아서던 자그마한 뒷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농담이야. 먹어도 돼.”
-“오빠, 사랑해!”
과자 하나 먹으라 했다고, 냅다 달려와 안기던 체온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환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늘 이 시간에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빈둥거리다 보면, 어김없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희야. 가서 오빠한테 밥 먹으라고 해. 아빠한테도.”
그러면 주희는 도도도 달려와서 환을 부르고, 또 도도도 달려가서 아빠를 불렀다.
그렇게 불려 나가는 게 귀찮을 때도 있었다.
만화를 보거나 게임을 할 때면, 조금 성가셔서 “안 먹는다고 해.”라고 했다가 혼나기도 했었다.
“만화가 뭐라고……. 게임이 뭐라고…….”
그 소중한 시간을 놓쳤을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딱 한 번만…… 정말 딱 몇 분이라도 좋으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가족이 둘러앉아서 저녁을 먹던, 그 식탁에 앉아 있고 싶다.
그러면 말할 것이다.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이 시간이 정말정말 소중하다고.
몇 번이라도 말할 것이다.
“보고 싶어요, 엄마. 보고 싶어요, 아빠. 보고 싶다, 주희야.”
소리 내서 말하자, 그리움이 더 진해졌다.
환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더는 참지 못한 흐느낌이 새어 나오려고 할 때.
똑똑-
노크 소리에, 환은 눈을 뜨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환아, 들어간다.”
대답도 듣지 않고 들어온 이는 세인이었다.
“야, 너무 심심……. 헉!”
가까이 오던 세인이 당황한 듯 걸음을 멈췄다.
“너…… 울었어?”
“그냥 못 본 척 좀 해주지.”
“아, 미안. 어…… 정말 미안. 나갈게.”
“아냐, 괜찮아.”
세인이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다가와 침대 끝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물었다.
“가족 생각나서 울었어?”
환은 잠시 세인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웃었다.
“왜, 왜 웃어?”
“아니. 너의 그 돌려 말하지 않는 부분이 참 좋구나 싶어서.”
“아, 모르는 척해주길 바랐어?”
“아냐. 정말로. 돌려 말하지 않아서 좋아.”
내 동생도 그랬거든. 언제나 그렇게 직선적으로 얘기했지.
환은 두 손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문지르고 말했다.
“나는 그냥 좀 걱정이야.”
“뭐가?”
“범이 인간을 공격하지 않게 됐잖아. 아마 그 괴물 때문이겠지. 그놈들도 괴물이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된 걸 거야.”
“……그렇겠지?”
“제하랑 주안이랑 하루가 같이 싸웠는데도, 괴물 하나를 제대로 잡기 어려웠대. 후포? 그 범들의 대장이라는 놈도 괴물을 못 이겼고.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세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진짜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거겠지. 전보다 더.”
“응. 너나, 나나, 도건이는 그런 힘이 없잖아. 그나마 지금 믿을 만한 건, 표리야. 표리가 그쪽 장로한테서 뭔가 알아 온다면, 우리도 제하처럼 강해질 수 있겠지.”
“응.”
“하지만 그 장로도 모른다면…….”
“우리는 언젠가 범이랑 힘을 합쳐야겠지.”
환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어.”
“환아…….”
“알아. 세상에 나쁜 범만 있는 게 아닌 것도 알고, 범들도 사정이 있다는 것도 알고, 인간 중에도 죽일 놈 많다는 것도 알아. 아는데…… 아는데, 나는…… 내 동생은…….”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내 동생은 정말로 아무 죄도 없잖아.”
“응, 그렇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정말 그냥 그런 어린애였다고…….”
환은 잠시 흐느끼다가 간신히 울음을 삼켰다.
“세인아. 내가…… 범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세인은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별로 없었다.
범이 나타나기 전, 세인은 가족 사이에서 겉돌 듯,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겉돌았다.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본 것이 처음이었다.
환은 언제나 ‘다 괜찮아.’라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가족을 잃은 슬픔을 극복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 감정 또한, 세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족이라는 게 저렇게나 절절할 정도로 좋은 존재인 걸까?
저렇게나 애절하게 그리울 수 있는 존재인 걸까?
하지만 세인은 단 하나만큼은 알았다.
이런 순간에, 입에 발린 위로 따위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거.
그래서 세인은 환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환이 고개를 돌려 세인을 쳐다봤다.
세인은 환의 갈색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환아.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래.”
“…….”
“그런데 난 그거 다 개소리라고 생각해.”
“……!”
“범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받아들이지 마. 미우면 계속 미워해. 남들이 뭐라고 해도 걱정하지 마. 내가 너랑 같이 미워해 줄 테니까.”
+++
하루는 환의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복도로 나갔다.
‘다들 혼란에 빠져 있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원래 ‘범’이라는 증오의 대상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적이 있을 때, 그들은 다른 고민 없이 범을 사냥하는 데 열중했다.
범을 잡는 순간만큼은, 슬픈 과거라든가, 자신의 출생, 가족 같은 것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증오하던 대상이 사실은 진짜 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쩌면 같은 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같은 적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뭘 하려는 건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게다가 지금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할 만큼 너무 강하다.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다.
‘적어도 우리가 상대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왜 기억이 이렇게까지 안 돌아오는 거지?’
이건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희미해진 게 아니라,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기억을 빼간 것만 같다.
옥상에 도착한 하루는, 난간 위에 서서 먼 곳을 응시하는 제하를 발견했다.
“제하야.”
여러 문제에 대해 의논할 생각으로 다가가서 제하 옆에 섰다.
“요새…….”
“하루야.”
제하가 시선을 멀리 둔 채 하루의 말을 끊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무엇을?”
“내가…… 범이랑 협력할 수 있을까?”
하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제하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조각 같은 그의 얼굴에는, 다른 일행과 함께 있을 때는 드러내지 않는 수심이 가득했다.
“참 이상해. 타배의 기억을 엿볼 때마다, 우습게도 부모님과 함께했던 시절의 기억도 돌아와. 나, 그거 새까맣게 잊고 있었거든. 그런데 마치 잊은 적 없다는 듯이, 내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어느새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어.”
제하의 음성이 밤공기를 쓸쓸하게 적셨다.
“이제야 비로소 아빠 얼굴이 어땠는지 떠올라. 이제야 비로소 엄마가 어떤 방식으로 날 안아줬는지 떠올라. 이제야 비로소 내가 그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시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떠올라.”
제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하루의 눈에는 그가 온몸으로 우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야 비로소…… 떠올라. 내 부모님이 얼마나 절박하게 날 지키려고 했는지.”
제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세상에 괴물이 있어. 지금 내가 이러는 순간에도, 그 괴물들은 사람을 죽이고 있겠지. 나도 알아.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라는 거. 그래서 정말로 노력하고 있거든. 이런 생각 버리려고 정말로 노력하는데…… 그런데, 하루야.”
제하가 천천히 하루를 돌아봤다.
“그런데, 정말로. 하루야.”
제하는 하루보다 훨씬 큰데, 어째서인지 그 순간 하루의 눈에 제하는 자그마한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볕 좋은 날 인왕산 범바위 앞에서,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재잘재잘 떠들던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난 모르겠어. 내가…… 후포를 용서할 수 있을까?”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