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참을 수 없는 것 (2)
(57/85)
57. 참을 수 없는 것 (2)
(57/85)
57. 참을 수 없는 것 (2)
2023.02.11.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쿠웅-!
마로가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크윽…….”
마로는 작게 신음하며 제 등을 무릎으로 찍어누른 인물을 확인하려 했다.
돌아보지 않아도, 냄새만으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허서…….”
“마로, 이 새끼.”
허서가 마로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휙 잡아당겼다.
“아주 잘도 숨어다니더군.”
마로는 빠져나오기 위해 힘을 썼지만, 허서가 무게를 실어서 등을 찍어누른 상태라서 쉽지 않았다.
마로의 손톱이 길어지는 걸 본 허서가 기막힌 듯 코웃음을 쳤다.
“동족을 죽이고 다니더니, 나까지 죽이려고?”
길어지던 손톱이 멈칫했다.
그걸 본 허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 진짜였군! 멍청한 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분노한 허서의 손에서 잠깐 힘이 풀린 틈을 타, 마로는 머리를 빼내고 두 손으로 땅을 강하게 밀어냈다.
파앗-!
몸을 튕겨 올리듯 일어나며, 한쪽 팔로 허서를 후려쳤다.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허리를 강타당한 허서가 옆으로 밀려났다.
그 순간을 틈타 마로가 도망치려고 돌아서는데, 뒤에 서 있던 옥엽이 마로의 가슴팍을 발로 찼다.
“쿨럭…….”
발에 걷어차인 마로가 뒤로 밀려나며 비틀거렸다.
“정말이야? 마로, 너 정말로 동족을 죽인 거야?”
옥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진짜냐고, 이 새끼야!”
마로가 대답하지 않자, 옥엽이 달려들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마로는 싸우려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분노와 슬픔에 젖은 옥엽의 눈빛이 마로를 족쇄처럼 옭아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동족을 죽였다.
내 손으로 동족을 죽였다.
이런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항변할 수 없는 죄를 범했다.
“그래.”
마로가 쉰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동족을 죽였다.”
“이 미친 새끼!”
옥엽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녀의 왼손 손톱이 순식간에 길어졌다.
덥썩-
허서가 옥엽의 손목을 잡았다.
옥엽이 충혈된 눈으로 허서를 돌아봤다.
허서가 살짝 고개를 젓자, 옥엽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콧등을 찡그렸다가 손톱을 집어넣었다.
허서가 말했다.
“주군이 찾으신다.”
“그래.”
“불티는 어디 있지?”
“몰라.”
“그래? 처맞으면 알게 되나?”
“쳐 때려봐. 그 녀석이 요새 뭘 하고 다니는지, 나야말로 알고 싶으니까.”
+++
불티는 어두운 골목에 서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달 전, 불티는 이곳에서 나래를 죽였다.
-“이러지 마, 불티. 이러면 안 돼.”
불티의 손톱을 막으며, 나래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돼. 이러지 마.”
나래는 강한 범이었다.
하지만 주안을 알게 된 후로 인간을 먹지 않았기에, 불티를 이길 수 없었다.
설령 나래가 강했더라도, 나래는 진짜로 불티를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불티는 무자비하게 그녀를 죽였다.
-“불티, 나 이번에 꼬맹이랑 영화라는 걸 봤어. 와, 진짜 대단하더라. 커다란 네모 속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는 거 있지?”
-“불티, 신시는 환웅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돌아가는 거래. 너도 들어봤어? 저번에 꼬맹이랑 갔던 영화관도 환웅 거라더라. 어떻게 한 사람이 그런 걸 다 갖고 있지?”
-“불티, 버스 타봤어? 인간들은 신기해. 옛 힘은 다 잊었는데 그걸 보완할 만한 뭔가를 만들어냈잖아.”
죽이는 순간에는, 나래가 얼마나 예쁘게 웃는지, 얼마나 즐거운 듯 이야기하는지, 그리고 또 오랜 옛날의 그 전쟁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불티와 함께 싸웠었는지, 하나도 떠올리지 못했다.
이 찬 바닥에 쓰러졌던 나래의 모습을 떠올리자 눈가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사과하기에는…….”
중얼거리던 불티가 갑자기 긴장하며 손톱을 끄집어내고, 골목 저편의 어둠을 노려봤다.
어둠 속에 무언가 있다.
아주 불길한 무언가가.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지도 못했건만, 불티의 털이 곤두섰다.
심장이 두쿵, 두쿵, 불안하게 뛰었다.
불티는 순식간에 검은 안개를 끄집어내 주위를 어둠에 물들였다.
안개 속에서 상대는 이쪽을 볼 수 없으나, 불티는 상대를 볼 수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여자가 뭔가를 중얼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백십일……. 백십일……. 백십일…….”
단발머리에 눈꼬리가 내려간,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인간……?’
불티는 당황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인간이다.
좋게 봐줘도 고작해야 범 사냥꾼일 뿐이리라.
그런데 왜 이렇게 섬뜩한 기분이 드는 걸까?
어째서 그 괴물을 보았을 때처럼 공포라는 감정이 찾아오는 걸까?
아니, 그 괴물과는 다르다.
훨씬 더 농도 짙고, 훨씬 더 악취 나는 악의가 그녀로부터 번져 나오고 있었다.
근육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목이 뻣뻣해졌다.
‘인간이…… 아니군.’
파악을 끝낸 불티는 땅을 박차 올라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손톱 끝이 여자의 심장을 노리며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다.
상대가 범이라도 피하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
하지만 여자는 슬쩍 옆으로 몸을 피하더니, 주먹으로 불티의 머리를 내리쳤다.
빠악-!
두개골에 금이 갈 정도로 강한 타격.
불티는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빠르게 자세를 수습하고 뒤로 물러선 후, 마구잡이로 손톱을 휘둘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목적도 없이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하나가 급소를 노린 공격이었다.
돌풍이 부는 것처럼 보일 만큼 빠른 속도인데, 그중 여자의 몸에 맞는 건 얼마 되지 않았고 그조차도 얕게 들어갔다.
하지만 운 좋게도 오른손 손톱 하나가.
푸욱-!
여자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
‘됐다!’
불티는 쾌재를 외쳤다.
심장이 찔렸는데도 아무렇지 않을 생명체는 없다.
저것이 인간이 아니라서 죽지는 않는다 해도,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왼손으로 치명타를 입히려던 불티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입술을 귀 아래까지 찢고, 아주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불티를 보고 있었다.
오싹-
불티는 섬뜩함을 느끼며 손톱을 빼내려 했지만, 여자가 불티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뿌리칠 수가 없었다.
만약 불티가 그동안 꾸준히 인간을 먹어왔다면, 조금 애를 먹기는 했어도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달 넘게 인간을 먹지 못한 불티는, 평소보다 체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여자의 손톱이 불티의 피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나는 이름이 있지. 지귀.”
“이름 없는 놈도 있나?”
불티는 지귀의 급소를 알아내기 위해 눈에 힘을 주며 대꾸했다.
“이름이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니?”
불티는 지귀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급소, 급소가 어디지? 왜…… 왜 안 보여?’
생물의 급소는 보통 뇌가 있는 머리 아니면 심장이다.
그런데 지귀의 급소는 머리에도, 가슴에도 없었다.
‘대체 어디……?’
우둑-!
지귀가 불티의 손목뼈를 부숴버렸다.
“으아아아아악!”
격렬한 통증에 불티의 눈에서 힘이 빠졌다.
지귀가 우후후, 웃었다.
“이름이 있다는 건.”
불티는 포기하지 않았다.
‘닥치고 찌르다 보면 어딘가에는 있겠지.’
부서지지 않은 왼손 손톱을 지귀의 옆구리에 박아넣고, 발로 지귀의 배를 걷어찼다.
지귀가 비틀거리는 순간에 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는데, 지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무척이나.”
지귀는 단조로운 어조로 말하며, 제 옆구리를 파고든 불티의 왼쪽 손목도 잡았다.
“강하다는.”
우두두둑-!
“크윽…….”
신음하는 불티와 눈을 맞추며, 지귀가 말했다.
“뜻이란다.”
“미친.”
불티는 아무리 봐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지귀의 눈빛에 섬뜩함을 느꼈다.
‘이길 수 없어.’
혼자서는 안 된다.
불티는 이제 도망쳐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살아남는 게 우선이니까.
판단을 내린 불티는 부서진 손목에 느껴지는 고통을 무시하고, 팔에 힘을 줬다.
어떻게 해서든 지귀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단단히 움켜쥔 지귀의 손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퍼억-! 퍽-!
불티는 발로 지귀의 배를 걷어차고 정강이를 후려쳤지만, 지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애가 앙탈 부리는 것을 보듯, 신기하다고 즐겁다는 눈으로 불티가 하는 짓을 지켜볼 뿐이었다.
한쪽 팔이라도 자유로우면, 붙잡힌 쪽 팔을 끊어내고 도망칠 텐데, 양쪽 다 잡혀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도 이길 수가 없다. 도망칠 수도 없다.
생전 처음 보는 괴물을 앞에 두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절망이 불티를 잠식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서서히 잦아들자, 지귀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벌써 끝이니?”
“넌 대체…… 뭐냐?”
“말했잖아. 지귀.”
“이름 말고, 정체가 뭐냐고!”
“나는 아버지의 자식이지.”
“이 세상에 아버지의 자식이 아닌 것도 있나? 대체……!”
“너, 시끄러워.”
지귀가 불티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풀었다.
불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도망치려 했지만.
빠악-!
지귀의 주먹이 불티의 안면을 강타했다.
얼굴 뼈가 부서질 정도의 위력에, 불티의 눈이 뒤로 돌아갔다.
축 늘어진 불티를 보며, 지귀가 입맛을 다셨다.
“먹고 싶은데. 먹으면 안 되지. 아버지가 산 채로 잡아 오랬거든.”
지귀는 쓰러진 불티의 손목을 잡은 채, 그대로 질질 끌고 가며 중얼거렸다.
“백십일…… 백십일…….”
+++
동철은 커피를 타려다가 커피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경태가 죽은 후, 동철은 한동안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우울함에 빠져서 지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렸더니, 아주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범들의 습격이 눈에 띄게 줄어서, 범 사냥꾼을 찾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범 사냥꾼에 대한 대우도 달라졌다.
전에는 아무 가게나 들어가도 다들 굽실거리며 공짜로 밥이나 차를 내왔는데, 이제는 평범한 손님처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아무 마트에나 들어가서 원하는 걸 골라 그냥 나오면 됐었는데, 이제는 일일이 계산대에 줄을 서서 계산해야 한다.
그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범 사냥꾼의 수가 줄어들었다.
500명에 달하던 호랑나비의 사냥꾼은, 이제 50명도 남지 않았다.
“1년인가?”
범이 인왕산에서 내려온 게 작년 1월.
그리고 해가 바뀌어 1월이 되었다.
“1년 천하였군.”
동철은 쓰게 웃었다.
고작 1년.
세상을 발아래 둘 힘을 갖게 된 줄 알았는데, 고작 1년으로 끝났다.
1년이면 끝날 것에 뭘 그리 집착했는지.
이럴 줄 알았으면 조용히 사냥이나 해서 돈이나 모아둘걸.
그동안 동철이 벌어들인 돈은 전부 무기를 사들이는 데에 썼다.
범 사냥꾼들이 하나둘씩 사냥을 관두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때, 그 무기들을 내다 팔 곳도 없었다.
사냥꾼의 힘마저 사라진 건 아니니, 이 힘으로 옛날처럼 범죄를 저지르며 살 수도 있겠지만, 왜인지 내키지 않았다.
이걸로 끝이 아니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