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 결의 (2) (65/85)


65. 결의 (2)
2023.04.08.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장로님. 저는 이 위험이 그저 인간들만을 향한 위험이 아닐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괴물들은 인간을 모조리 죽이고 나면 그다음에는 이곳, 지하에 있는 우리 일족을 죽이려 할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무원을 죽일 때, 그 괴물은 망설이지도,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왜……?”

“그 괴물들은 인간들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커다랗고 이상한 게 신시에 있는데도, 인간들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그 괴물들에게 인간의 눈을 피해 다녀야 한다는 지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우리 일족이 다르다는 걸 알아볼 지능도 있을 겁니다.”

그제야 장로는 표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장로님. 그 괴물은 인간과 다르게 생긴 무원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죽였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의 목적이 이 신시에 있는 생명, 그놈들과 같은 괴물이 아닌 생명 모두를 죽이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기를 만들겠다고 지상으로 올라간 두두리 일족이 하나둘씩 실종될 때, 장로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이 신시에 인간과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게 진화한 두두리 일족이 존재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아마도 그 사람은 두두리 일족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왜 그 사람은 두두리 일족의 존재를 인간 모두에게 알리고, 학살 명령을 내리지 않는가?

인간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배척하는 경향이 있으니, 두두리 일족에 대해 알린다면 범 사냥꾼 같은 놈들이 두두리 일족을 모조리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인간들은 여전히 두두리 일족이 신시 지하에서 살아간다는 걸 모른다.

그렇다는 건.

‘무시하는 거겠지. 큰 위협이 되지 않으니, 더 중요한 문제를 끝낼 때까지는 내버려 두려는 거겠지.’

그리고 그 중요한 문제가 끝났을 때.

그 사람의 기분에 따라 두두리 일족의 처우가 결정되리라.

그 처우가 두두리 일족에게 좋은 쪽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동족에게 알리지 않은 건, 아직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동족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두두리 일족의 정체를 아는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고, 그저 이 모든 게 신시를 스치고 지나가는 혼돈일 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화로워질지도 모른다.

그런 헛된 희망을 품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무시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표리가 장로를 현실로 끄집어냈다.

더는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장로는 깨달았다.

“꼭 해야겠느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인간들을 돕는다 해도, 인간들은 알아주지 않을 게다. 모든 게 잘 끝나더라도 우리가 지상에서 살아갈 일은 없을 게야.”

“장로님, 저는…….”

표리의 눈에 여러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는 지상을 꿈꾸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갈 곳이 지상이든, 지하든, 그저 지금까지처럼 살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양초의 불이 일렁, 흔들렸다.

이윽고 눈을 뜬 장로가 말했다.

“무릇 섞인 자와 함께 멸망이 찾아오리라. 이런 예언이 전해졌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네, 그런데 그건 왜……?”

장로가 길쭉하고 뒤틀린 손가락을 들어 표리의 말을 막았다.

“섞인 자, 타배가 신시를 어떻게 멸망시켰는지는 아느냐?”

표리는 장로가 왜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지는 알 수 없어서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범족과의 전쟁을 끝내고 다른 종족들을 배신해서…….”

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다고 신시가 멸망하지는 않지.”

“그럼……?”

“신시의 멸망은 힘의 종말과 함께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힘의…… 종말이요?”

장로는 장로에게만 전해지는, 더 깊은 전설에 대해 설명했다.

“고대의 신시에 섞인 자와 함께 멸망이 찾아온다는 예언이 있었기에, 그 예언이 이뤄지는 순간을 위한 대비책 역시 준비해왔다고 한다.”

그 대비책은 멸망이 찾아올 때, 신시의 주민 모두가 몸을 숨길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멸망이 어떤 식으로 찾아올지는 모르지만, 만약 불덩어리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큰 지진 같은 게 일어났을 때, 그 피해를 받지 않을 공간.

“고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힘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그들은 공간을 비틀어,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세계에 이름을 붙였지.”

그림자의 세계.

시간도, 공간도 뒤틀린 곳.

“인왕산 범바위 뒤, 한곳을 비틀어 그런 세계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범과의 전쟁이 벌어진 고대 신시의 신시보다도 더 오래 전에 살아가던 선조들이 만들어낸 공간이지. 아주 많은 힘을 쏟아부어서 만든 공간.”

거기까지는 표리도 아는 이야기였다.

표리는 장로가 왜 두두리 일족이라면 다들 아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장로님, 저도 그런 이야기는…….”

“표리. 여기에는 너희에게 알려주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예?”

“일단 듣거라.”

표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원래대로라면 범들은 그림자의 세계에서 원할 때 빠져나올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려고 만든 곳이니까.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타배가 범바위에 결계를 만들어서, 나올 길을 막아버렸거든.”

그 결계가 완벽하지 않아서, 범들은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손님 오는 날.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결계가 다시 작동하며, 범들은 그림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시간과 공간을 비틀어 만든 곳이니, 그 안에 오래 있는 게 좋지는 않았을 게다. 아마도 그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범들의 생명력을 계속 빼앗아갔겠지. 그래서 범들도 일 년에 한 번은 밖에 나와서 인간들을 먹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그랬겠죠…….”

“하지만 충분하지 않았을 게다. 인간들 또한 힘을 잃은 건 마찬가지니까.”

“…….”

“표리, 그 전쟁 후, 타배는 신시를 지탱하던 신단수를 베어내고 불태워버렸다.”

신단수가 쓰러지고 불타자, 고대 신시의 주민들이 갖고 있던 힘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신단수로부터 흘러나오던 생명력이 멈추며, 고대의 주민들이 갖고 있던 다양한 재능과 힘도 흩어졌다.

“그렇게 신시가 멸망했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장로는 침묵을 지켰다.

표리는 도대체 장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타배가 신단수를 베어냈다는 건, 표리도 몰랐던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게 왜? 어차피 배신자 놈인데 신단수 좀 벤 게 어때서?

신단수를 베어낸 게, 그놈을 도와준 다른 종족들을 다 쫓아낸 것보다 나쁜 일인가?

아니, 나쁜 일이라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얘기인데.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닦달할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표리는 입이 열리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이윽고 장로가 표리와 눈을 맞췄다.

“표리,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느냐?”

“예?”

전혀요.

“신단수가 불타고 곰족도, 우리도 힘을 잃었지.”

“……그렇죠?”

“그런데 범족은 어떠하냐?”

“……아!”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고대의 힘이 남아 있지. 물론 그때보다 약해지기는 했으나, 그들은 여전히 범족이야.”

“그림자의 세계 안에는…….”

“그래, 고대의 힘이 갇혀 있다.”

고대를 살아가던 선조 중 재능 있는 자들이 공간을 비틀어 그림자의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가 유지되도록 힘을 보냈다.

그곳에 범족이 쫓겨 들어갔고, 그림자의 세계는 범족의 힘을 흡수하며 지금까지 유지되어왔다.

“그래서 결계가 깨졌을 때, 그 안에 고여 있던 힘이 흘러나와서 인간 중에도, 우리 중에도 고대의 힘을 되찾은 이들이 생기기 시작한 거지.”

“그럼…… 그림자의 세계를 완전히 부숴버리면……!”

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우리의 힘으로는 그곳을 부수는 게 불가능할 게다. 다만, 표리. 우리 일족 사이에는 예로부터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왔다. 인왕산 범바위에 제를 지내면, 지킬 힘을 얻게 된다.”

“인왕산 범바위…….”

“아마도 결계가 있는 곳이기에, 가까이에 가면 미약하게나마 흘러나오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런 얘기가 전해진 거겠지.”

“왜 그런 얘기가 장로님들 사이에서만 전해진 거죠?”

“위험하니까. 그 세계는 범족이 마지막으로 쫓겨 들어간 세계. 행여나 범족이 갑자기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혹은 우리가 결계를 잘못 건드려서 범족을 세상에 풀어놓을 수도 있으니.”

장로는 기대감에 부푼 표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표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인왕산에 달려가고 싶은 것 같았다.

두두리 일족은 수가 많지 않기에, 장로에게 그들은 모두 자식 같은 존재들이었다.

벌써 몇 명이나 잃었기에, 표리까지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의에 찬 표리를 말릴 수 없다는 걸, 장로는 알 수 있었다.

“결계가 깨졌으니, 예전보다 더 많은 힘이 흘러나오고 있을 게다. 가까이 가면 지금보다 더 많은 힘을 되찾게 되겠지. 하지만 표리, 조심해야 한다. 응?”

장로의 당부를 뒤로하고, 표리는 인왕산으로 향했다.

장로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본 후, 그게 사실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릴 계획이었다.

동족들이 힘을 되찾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무기를 만들 수 있으리라.

그리고 착호. 그들도 힘을 되찾으면 그 괴물을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겠지.

하지만 인왕산 가까이에 접근했을 때, 표리의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져내렸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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