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 결의 (3) (66/85)


66. 결의 (3)
2023.04.15.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지하로 수없이 뻗은 길을 올라가기도 전에, 표리는 그들의 존재를 느꼈다.

괴물들.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악의가 지하 깊은 곳까지 흘러내려 왔다.

흠칫, 몸을 떨며 보이지 않는 지상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인왕산과 가까운 이곳에 이토록 많은 괴물이 모여 있는 걸까?

‘내 착각인가?’

표리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조심스럽게 지상으로 올라왔다.

표리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기민한 괴물들은 곧바로 표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살아온 두두리 일족인 표리는, 기척을 죽이고 움직이는 법을 알았다.

인왕산 초입.

겨울이라 앙상한 나무만 남은 갈색 산이 눈에 들어왔다.

괴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표리는 괴물들이 인왕산 부근 어딘가에서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다 이 근처에 모여 있는 거지?’

범이 인왕산에서 내려온 후, 인간들은 인왕산을 찾지 않게 되었다.

초반에는 범 사냥꾼들이 범을 잡으러 인왕산에 오르긴 했지만, 인왕산보다는 사람이 많은 도심에 범들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인왕산을 찾는 범 사냥꾼조차 없었다.

‘괴물은 인간을 잡아먹는 게 아니었나?’

오가는 사람도 없는 인왕산에 괴물들이 모여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마치 인왕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막으려는 듯이…….

‘아, 설마…… 괴물들도 그림자의 세계에 대해 아는 건가? 그 정도의 지능이 있단 말이야? 아니, 아니지. 이건 지능의 문제가 아냐. 이건 우리 두두리 일족 사이에 전해지는 전설인데……. 인간들조차 잊은 기억인데……. 어떻게 저 괴물들이 그걸 아는 거지?’

의문이 혼란스럽게 밀어닥치는 통에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착호와 화해를 한 후, 착호가 마련해준 휴대폰이었다.

지하 깊은 곳에 있을 때는 터지지 않는 휴대폰에, 하필이면 지상으로 올라온 지금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드으으으으-

드으으으으-

작은 진동일 뿐인데도.

휘익-

스윽-

괴물들이 반응했다.

어딘가에 숨어 있던 괴물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한 개인 놈도, 두 개인 놈도, 다섯 개인 놈도, 열 개인 놈도, 모두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표리가 있는 쪽이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표리는 돌아서서 달렸다.

지하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저들이 따라와서, 두두리 일족이 다니는 길을 발견하면 큰일이었다.

수아아아악-

스아아-

괴물들이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숨어 살면서 도망 다니던 두두리 일족은 다리가 빨랐기 때문에, 쉽게 괴물에게 잡히지는 않았다.

괴물과의 간격은 좁아지지 않았지만, 괴물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짙은 살의가 표리의 목을 조여왔다.

끈적한 악의가 발목을 붙들어,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표리는 멈추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도망칠 때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뒤를 돌아보고 놈들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확인하는 순간, 낚아채이고 만다.

그래서 표리는 앞만 보고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폐가 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계속 달렸다.

어느 순간, 발목을 붙들던 악의가 옅어지고 스사아아아, 들려오던 소리도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달리고 또 달리던 표리는.

터억-!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부딪친 후에야 달리기를 멈췄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터라, 부딪치는 반동에 뒤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고 서서, 나뒹구는 표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추스르며 상대를 확인한 표리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인간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노란 눈동자는 범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상대는 냄새를 한 번 킁킁 맡더니, 표리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제하를 찾는 건가?’

불티를 고문해서 죽이는 동영상은 표리도 봤다.

그 때문에 숨어서 지낼 거라는 연락도 받았다.

‘아까 그 전화도 착호에게서 온 거겠지.’

표리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착호 일행밖에 없었다. 어쩌면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표리는 서둘러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후 휴대폰을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휴대폰이 진동했다.

예상대로 제하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표리, 지금 바빠?]

다행히 휴대폰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둡지 않았다.

큰일이 터진 건 아닌 모양이다.

“아니, 괜찮아. 할 얘기가 있는데…….”

[그래? 마침 나도 너랑 만나고 싶던 참이야. 지금 범 사냥꾼들이랑 같이 있거든.]

“범 사냥꾼들?”

[응. 얘기하자면 좀 긴데…… 앞으로 함께 행동하기로 했어.]

“아…….”

[이 사람들에게 널 소개시켜주고 싶어.]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나를?”

[너도 함께 싸울 거잖아.]

“나는…… 나는 그냥 무기를 만들 뿐이야.”

[그게 함께 싸우는 거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친구의 원수를 갚고, 두두리 일족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은데, 싸울 능력이 없으니 비겁하게 뒤에 숨어서 무기나 만들어 줄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무기를 만드는 게 함께 싸우는 거라는 제하의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나는 너희와 같은 인간이 아니야.”

[……표리.]

“너희 착호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과연 다른 인간들이 내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람……이라고 생각해.]

“뭐?”

[범족도, 곰족도, 두두리족도, 조금 다른 모습으로 진화했지만…… 사람이라고 생각해.]

제하가 장소를 이동하는지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다시 제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표리. 나는 혼혈이야. 네 말대로라면 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못할 존재야.]

“하지만 너는…… 너는 인간이잖아. 눈동자 색깔만 좀 다를 뿐, 누가 봐도 인간이라고.”

[너도 그래, 표리.]

“다들 나를 끔찍하게 여길 거야. 너까지 이상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어.”

[그럼 한번 받아봐.]

“뭐?”

[아직 끔찍한 취급을 받아본 적 없잖아. 그러니까 일단 한번 와서 받아봐.]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만약 여기 모인 사람들이 널 끔찍하게 생각한다면, 네가 만드는 그 굉장한 무기를 그 사람들은 못 쓰게 하면 되잖아.]

“…….”

[그리고 우리랑 같이 뒤에서 좋은 무기를 쓸 기회를 놓친, 그 멍청한 놈들 욕이나 실컷 해주자고. 그러면 되는 거 아냐?]

제하의 음성은 한없이 가벼웠지만, 그 말에 담긴 무게는 무거웠다.

주도권은 네게 있어, 표리.

제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상을 지배한 인간들의 눈을 피해서 살아온 표리에게, 제하의 말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

“알겠어. 어디로 가면 돼?”

+++

호랑나비 본부 지하.

마치 기자회견장처럼 긴 테이블이 맨 앞에 하나 놓여 있고, 그 테이블에 착호가 일렬로 앉아 있었다.

나머지 범 사냥꾼들은 앞을 향해 놓인 의자에 앉아서 착호를 보고 있었다.

착호만 특별 대우를 해주는 것 같은 상황이지만, 누구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 자리에 온 범 사냥꾼 중 몇 명은 괴물을 목격했다.

괴물이 인간을 와그작 씹어먹는 걸 멀리서 지켜보다가, 다른 범 사냥꾼이 괴물과 싸우는 걸 보다가, 도망쳤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괴물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저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이라고 볼 수 없는 기괴한 생김새와 짙게 흘러나오는 악의, 불쾌한 독기.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도 괴물이 내뿜는 독기에 짓무를 것만 같은데, 착호는 그 괴물과 싸워서 이겼다고 들었다. 그것도 여러 번.

범을 상대했을 때부터 착호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이 신시에 정체 모를 것이 돌아다니는 지금, 그들은 착호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범 사냥꾼들은 착호를 보며 생각했다.

‘제하랑 호수라는 놈은 왜 눈동자가 노랗지? 렌즈라도 낀 건가?’

‘하루는 아무리 봐도 특이해. 옷차림이 왜 저래? 어린 녀석이…….’

‘도건이란 놈이 입은 코트, 탐나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범 사냥꾼들은 뒷목이 당길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이 신시에 진짜로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들의 심장을 죄였기 때문이다.

범이 주적이었을 때는 이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았다. 범들을 상대할 힘을 갖고 있기도 했고, 범은 그나마 인간처럼 생겼다. 이 세상에 존재할 만한 생물로 보였다.

하지만 괴물은 아니다.

힘을 갖지 못한 인간들이 범에게 느꼈던 그 공포를, 이제 범 사냥꾼들이 느끼게 되었다.

‘아무 힘 없는 녀석들이 이런 기분이었나?’

범 사냥꾼 몇 명은 그동안 힘 좀 가졌다고 해서 콧대를 세우고 다닌 걸 후회하던 차였다.

그럴 때, 착호의 등장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착호가 괴물과 싸우는 걸 실제로 본 것도 아닌데, 왜인지 착호와 함께하면 괴물을 상대로도 이길 수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범 사냥꾼들의 기민한 감각은, 착호가 가진 힘이 자신들보다 강하다는 걸 간파했다.

착호 중에 마치 범처럼 싸우는 멤버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범처럼 싸우든, 곰처럼 싸우든, 늑대처럼 싸우든, 괴물을 상대할 힘을 가진 녀석들이 같은 편이라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제하가 입을 열었다.

“숨어서 지내는 동안, 몇 가지 실험을 해봤어.”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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