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증오의 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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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증오의 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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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증오의 끝 (1)
2023.05.27.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호프집을 나설 때만 해도 후포는 옥엽과 함께 주둔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다른 때보다 빠르게 괴물을 처치하기는 했으나 상처를 입지 않은 건 아니었다.
허서는 팔이 잘려서 먼저 돌아갔고, 후포와 옥엽은 괴물에게 당한 상처에서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얕은 상처는 금방 회복되지만 깊은 상처가 두어 개 생긴 게 문제였다.
게다가 괴물이 흩뿌린 검은 피에는 독성이 있는지 피에 닿은 부분이 쓰리고 화끈거렸다.
그건 범이 가진 고유의 능력인 ‘상처 회복’으로도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냄새를 맡았다.
비릿하고 역겨운 괴물 냄새에 미미하게 섞인 냄새.
잊을 수 없는 냄새.
“제하.”
냄새의 방향을 알자마자 후포는 총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리하여 제하를 찾아냈다.
제하를 찾자마자 죽일 생각은 없었다.
후포는 자신이 이미 몇 번이나 제하에게 상처를 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풍래를 죽였고 인왕산에서는 제하를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그럼에도 제하는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후포를 죽이지 않았다.
그것은 후포에게 마음의 빚이었다.
불티가 고문당해서 죽어가는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그래도 제하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붙잡아서 얘기를 들어볼 생각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잔혹하게 불티를 죽인 건지, 복수하려는 마음은 알지만 그걸 굳이 영상으로 퍼뜨린 이유가 무엇인지.
하지만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제하를 보는 순간, 터무니없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동료들과 함께인 제하는 마치 타배 같았다.
혼혈이면서도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던 타배.
언제나 주위에 친구가 끊이지 않았던 타배.
그리하여 후포도 참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타배.
타배를 좋아하는 만큼 믿었다. 믿었던 만큼 배신감에서 비롯된 증오가 커졌다.
모든 것이 멈춘 그림자의 세계에서 보낸 까마득한 시간이 겹쳐졌다.
“죽어라.”
후포는 망설임 없이 제하의 왼쪽 가슴을 향해 긴 손톱을 찔러넣었다.
째앵-!
하지만 손톱은 제하의 가슴을 뚫지 못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낫이 손톱에 얽혔다.
고개를 돌리자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는 호수가 보였다.
후포가 손톱을 거두며 콧등을 찡그렸다.
“너도 잡종인가?”
“그놈의 잡종 타령!”
날카로운 외침은 호수에게서가 아니라 후포의 반대쪽에서 들려왔다.
살기를 느낀 후포가 몸을 비틀었다.
하나의 단검은 피했지만 시간 차를 두고 찔러오는 또 하나의 단검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날카로운 단검이 후포의 옆구리를 베었다.
싸늘한 통증이 퍼졌지만, 친우에게 배신당해 긴긴 세월 그림자의 세계에서 살던 아픔과는 비할 바는 아니었다.
후포의 시선은 오롯이 제하에게 향해 있었다.
분노에 점철된 후포는 제하의 눈동자에 담긴 슬픔과 고통, 분노를 읽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후포에게 있어서 제하는 ‘타배’일 뿐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황금빛 눈동자와 척살검, 그리고 미미하게 흘러나오는 묘한 기운.
제하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타배의 것과 몹시도 비슷했다.
“왜…….”
제하의 붉은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후포는 그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타배도 그러했으니까.
아무리 대화를 시도해도 들어주지 않고 범들을 학살했으니까.
탕-!
파열음과 함께 허벅지에 뜨거운 통증이 일었다.
아무리 후포라도 그 통증을 이기기 힘들어 비틀거렸다.
제하의 목을 노렸던 손톱이 목적지에 닿지 못했다.
“제하야, 피해!”
환이 활을 후포의 이마에 겨누며 외쳤다.
하루의 오랏줄이 후포의 가슴팍을 세게 쳐올리고 돌아갔다가 다시 쏘아져 후포의 턱을 갈겼다.
뇌가 울리는 고통에 후포가 다시 비틀거렸다.
후포는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여기서 멈춘다면 그때 죽어간 내 동족의 설움은, 불티의 고통은 누가 갚아준단 말인가?
“주군!”
뒤에서 옥엽의 외침이 들려왔다.
“오지 마라!”
후포는 외쳤다.
이곳에 오면 옥엽도 죽는다.
자신의 증오에 옥엽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후포의 어깨에서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퍼지며 증오가 공기를 까맣게 물들였다.
후포는 자신에게 승산이 없음을 알면서도 몇 번이나 더 공격을 가했다. 제하만을 노린 공격은 제하의 동료들에게 번번이 막혔다.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옥엽이 후포를 도와주려 했지만, 범 사냥꾼들이 앞을 막아섰다.
옥엽이 이빨을 드러냈다.
“네놈들이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적어도 저 녀석들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는 있겠지.”
죽음을 각오한 인간들의 태도에 옥엽이 움찔했다.
동족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던, 오래전의 동료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후포의 외로운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후포는 점점 더 화가 났다.
차라리 제하가 척살검을 들고 잔인한 미소를 띠며 공격이라도 해온다면 이처럼 답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하는 척살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조용히 후포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제하의 동료들 역시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음에도 후포의 급소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허벅지, 손목, 종아리 등 큰 타격이 없을 부분만 공격했을 뿐.
그래서 후포는 더욱 속이 끓었다.
마치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슬픔과 고통, 그 이상의 증오가 담긴 목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왜 가만히 서 있는 거냐! 검을 들어라, 제하!”
“어머니랑 아버지가 죽었어.”
낮고 작은 목소리가 격노를 가르고 후포의 귀에 닿았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몰랐어. 나한테 아버지는 그냥…… 그냥 아버지였어. 엄할 때는 엄하지만 대부분은 다정했거든. 나를 이렇게…….”
제하가 두 손을 어깨 쪽으로 들어 올렸다.
후포의 공격은 계속되고 착호 일행은 격렬하게 움직이며 후포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제하만이 마치 외딴곳에 떨어져 있는 듯 담담히 이야기했다.
“이렇게 목말을 태워주곤 하셨지. 어머니는…….”
이때, 제하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 음성에 담긴 슬픔에 후포의 분노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옛날 얘기를 자주 해주셨지. 아, 그래…… 이제 기억난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사이좋게 지내던 호랑이와 곰에 대한 이야기였어.”
범 사냥꾼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옥엽의 송곳니가 점점 짧아졌다.
“그 이야기의 끝을 알지는 못해. 나는 어머니 목소리를 정말 좋아해서, 아주 많이 좋아해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잠이 들었거든.”
제하가 눈을 들었다.
그 눈동자에서 증오나 분노는 찾아볼 수 없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채운 건 그저 그리움뿐.
“그냥. 그랬어. 그렇게. 평범했어. 나한테는 그냥 그렇게. 정말 그냥. 그냥. 그렇게. 엄마. 아빠였어.”
한 단어, 한 단어를, 제하는 곱씹듯이 말했다.
그 단어와 단어 사이에 스민 눈물이 후포의 증오를 깨뜨렸다.
-“언젠가는 말이야. 나도 애가 생기겠지?”
아주 오래전, 신시가 아직 평화로웠던 어느 날.
비가 많이 내려서 무너진 뚝방을 고치며 풍래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후포,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그냥 노는 걸 좋아하잖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저 나무 위에서 잠을 자는 거거든.”
-“자네 게으름은 세상이 알아주지.”
-“그러니까, 그게 문제야. 보백을 보면 애가 하나인데도 아주 죽을 것 같아 하더라고.”
보백에게는 어린 아들이 한 명 있었다.
-“애가 진짜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은데, 보백, 그 성격 더러운 놈이 애를 혼내지도 않고 안아주더라니까. 나는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아. 자신이 없어.”
후포는 그때 자신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풍래가 그 대화의 끝에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래도 날 닮은 아이면 진짜 귀엽겠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줘야지.”
쨍강-!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깨졌다.
후포는 그게 자신을 둘러싼 증오, 분노, 혹은 아집, 그 비슷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후포가 두 팔을 늘어뜨렸다.
길게 자라났던 손톱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제하는 그런 후포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제하는 울지 않았고 덩치도 후포만큼 컸지만, 후포의 눈에는 그가 웅크리고 앉아 훌쩍거리는 어린아이로 보였다.
“왜…… 죽였어?”
제하의 입술 사이로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이 흘러나왔다.
“그냥. 우선은. 얘기를 해볼 수도 있었잖아. 친구…… 아니었어?”
제하의 음성은 부드럽게 느껴질 만큼 담담했지만, 그 내용은 송곳이 되어 후포의 심장을 찔렀다.
친구.
그랬다. 친구였다.
풍래는 아이를 키우는 일에 자신 없어 했지만, 그래도 아이를 아주 많이 사랑해줄 거라고 했었다.
그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구였다.
“배신……자였다…….”
후포는 창피했다.
친구의 아들 앞에서 제 잘못을 덮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는 자신이 처참했다.
“네 아비는 우리를 배신하고 곰족인 네 어미와 연을 맺었지.”
후포는 주먹을 쥐었다.
변명을 늘어놓는 지금에 와서야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풍래를 죽이기 직전, 그의 슬픈 눈빛과 안타까운 중얼거림.
-“후포…… 조금만 더…… 방법이…….”
증오에 지배당했던 그때는 풍래의 말을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발악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인제 와서는 정말 그랬던 건지 의문이 들었다.
후포가 아는 풍래라면 자기 혼자만 자유를 되찾아서 좋다고 즐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풍래가 무녀인 제하 어머니를 설득해서 함께 결계를 완전히 깨뜨릴 방법을 찾고 있었다면?
누구도 죽지 않도록 안전한 방법으로 그림자 세계를 구원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면?
실제로 후포가 제하를 이용해서 결계를 깨뜨린 방법은 완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림자 세계에는 미처 밖으로 나오지 못한 범족이 많이 남아 있었다.
후포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다리가 꺾였다.
피를 흘리며 너무 많이 움직인 탓이다.
후포를 지탱하고 있던 투지가 사라지자 더는 버틸 재간이 없어서 무너지고 말았다.
“주군!”
옥엽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후포는 정신을 잃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