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인왕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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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인왕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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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인왕산 (1)
2023.06.24.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성희의 질문에 환이 미간을 모았다.
“그것까지는 우리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 신시에 우리 인간만 있는 줄 알았는데 범도 있고, 표리 같은 두두리도 있었잖아.”
“환웅이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어쩌면. 아마도.”
“미치겠네.”
성희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제하는 범 사냥꾼들이 난처해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신시의 모든 공권력이 환웅의 발아래에 있었다.
잘 훈련받은 특수부대라고 해서 범 사냥꾼들을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인간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답답하겠지.”
조용히 앉아 있던 하루가 말했다.
“그러나 지금껏 답답하지 않은 순간이 언제 있었나. 우리의 적은 명확해졌으니 그 뒤에 평화가 있다는 것 또한 명확할 터.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하는 건 희생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는 것…….”
콰앙-!
하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회의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모두 깜짝 놀라 무기를 쥐고 일어났다.
표리였다.
범 사냥꾼들은 표리의 상태를 보고서 더 놀랐다.
그가 뒤집어쓰고 다니는 망토가 이리저리 찢기고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표리!”
제하가 날 듯이 달려가 표리를 부축했다.
표리가 헐떡거리며 제하를 올려다봤다.
“괴물……. 우리가 사는 지하에…… 괴물이…….”
표리는 크게 다친 건 아닌지 제하에게서 벗어나 손등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한참을 달려오느라 숨이 찰 뿐이었다.
표리의 얼굴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도건이 물었다.
“괴물이 너희를 습격한 거냐? 너희 사는 곳은 찾기 힘든 거 아니었어?”
“그놈들이…… 지하를 기어 다니고 있어. 그러다가 찾아냈겠지. 어쩌면 우리 동족의 뒤를 밟았을지도…….”
주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희 동족은……?”
“반은 죽었어.”
표리가 짓씹듯이 대답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썹 아래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반은…… 도망쳤고.”
“어디로? 안전한 곳이 있어?”
표리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인왕산.”
하루가 어깨를 움찔했다.
“인왕산? 거기에 안전한 곳이 있는 게냐?”
“그건 우리도 몰라. 다만 그곳에서 우리의 힘이 시작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표리는 손목으로 눈물을 닦았다.
“나도 인왕산으로 갈 거야. 그전에 너희한테는 말해둬야 할 것 같아서…….”
“데려다줄게.”
제하의 말에 표리는 사양하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제하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좋겠어.”
“괴물이 너희 뒤를 쫓고 있었어?”
“우리는 미로처럼 뻗은 길로 흩어져서 움직였어. 모두를 쫓아가진 못했을 거야. 몇 명은…….”
표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살아서 도착했겠지.”
제하가 범 사냥꾼들을 돌아봤다.
“괴물들과 싸워야 할지도 몰라. 우리는 표리랑 인왕산에 다녀올게.”
“우리도 같이…….”
“아니. 위험할지도 몰라.”
“위험하니까 더더욱 같이 가야지!”
“싸워야 할 상대가 누군지 명확해졌잖아. 그걸 아는 건 당신들뿐이야.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환웅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주시해줘.”
범 사냥꾼들은 이 이상 착호를 따라가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착호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발목을 잡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착호에게 표리를 내버려 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두두리 일족 덕분에 범 사냥꾼들은 이제까지 중 가장 좋은 무기를 하나씩 손에 넣게 되었다.
뒤에서 조용히 도와준 그들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다.
제하는 동철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표리와 함께 회의실을 나왔다.
인왕산까지는 지하 통로로 이동하기로 했다.
제하에게 현상금이 걸린 상황에서 검문하는 군인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
지하 통로는 미로처럼 복잡했고 계속 여러 갈래의 길이 나타났다. 하지만 표리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표리, 인왕산에 뭐가 있는 거야?”
제하는 아까 표리가 ‘그곳에서 우리의 힘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라고 말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장로님한테 들은 건데 거기서 제를 올리면 우리의 힘이 강해진다는 얘기가 있대.”
그러면서 표리는 장로에게 들었던 신단수와 고대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범바위 뒤의 결계라는 대목에 이르자 착호는 하루를 돌아봤다.
하루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어서 그들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전에 한 번 갔었는데 그 근처에 괴물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어. 그곳에 뭔가 있는 게 확실해. 그래서 다들 그쪽으로 도망친 거고.”
“하지만 거기 괴물이 많다면…….”
세인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너무 가혹한 결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리는 주먹을 꽉 쥐었을 뿐 곧은 눈으로 어둠을 노려봤다.
“우리 일족은 만드는 재주가 있을 뿐 싸우는 재주는 없으니 괴물 한 마리를 이기지 못하고 모두 죽겠지. 하지만…… 오래전에도 우리는 살아남았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살아남을 거야.”
+++
신시에 내려온 모든 범이 후포의 앞에 기립해 있었다.
후포는 조용히 제 동족들의 수를 세었다.
67명.
200명이 넘는 범이 신시에 내려왔었는데 대부분이 죽고 67명이 남았다.
이 중 대부분은 범 사냥꾼들에게 죽었을 것이다.
범 사냥꾼들이 동족의 머리를 들고 킬킬거리는 걸 생각하면 속이 쓰리지만.
‘인간도 많이 죽었지.’
뼈아픈 패배였다.
신시의 모든 인간을 죽이는 데 200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결계가 깨지며 힘이 흘러나와 인간 중에도 고대의 힘을 되찾는 사람들이 생길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하지만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실패한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만약 인간을 모조리 죽였다면 신시의 어둠 속을 돌아다니는 괴물을 상대하는 건 오롯이 범의 몫이 될 터였다.
‘아직 결계 안에 남아 있는 동족을 위해서라도…….’
신시의 괴물을 모조리 처리해야만 한다.
인간은?
글쎄,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요한 건 괴물이다.
그리고 환웅.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환웅을 찾아가 그 교활한 얼굴을 떼어내고 싶지만, 왜인지 그래서는 안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괴물을 부리는 자다.
범 여럿이 달라붙어도 이기기 힘든 괴물의 주인이다.
분명 드러내지 않은 힘이 있을 터.
놈의 팔다리인 괴물들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다.
“신시에 괴물이 있다.”
후포의 선언에 범들은 놀라지 않았다.
그들도 괴물을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정체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동족을 죽였다는 건 알지.”
크르르르-
여기저기서 분노에 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우리는 괴물을 죽이는 걸 최우선으로 한다.”
“괴물을 어디서 찾습니까?”
누군가 물었다.
후포가 마로를 힐끗 보고는 검지로 땅을 가리켰다.
“지하.”
+++
이살 타워의 꼭대기 층에서 환웅은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환웅은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그의 검지가 계속 팔뚝을 두드린다는 걸 그 자신도 눈치채지 못했다.
‘왜지?’
무언가 이상하다.
제하의 목에 막대한 현상금을 걸면 범 사냥이 시작되었을 때처럼 너도나도 제하를 잡으려고 나설 줄 알았다.
하지만 제하를 잡기 위해 눈을 빛내는 인간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심지어 군인과 경찰들까지도 제하를 잡고 싶지 않다는 듯 미적거렸다.
‘어째서?’
인간은 아주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존재다.
제 뱃속을 불리기 위해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사기를 치기도 하고, 빵 한 조각 때문에 남을 죽이기도 한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걸까?
‘내가 너무 여유를 부렸나?’
아이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환웅의 살과 피, 그리고 힘이 필요했다.
잉태하여 새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닌, 제 몸의 일부를 나눠주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 순간을 위해 꾸준히 ‘아이’를 만들어 온 환웅은 오래 살아온 것치고는 많은 성장을 하지 못했다.
아이를 만들 때마다 살과 힘, 기억 같은 것들을 나눠주어야 하기에, 오랜 삶을 산 존재들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지혜와 여유가 부족한 편이었다.
그래서 일이 어긋나자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아이들이 많았다.
그 아이들을 만들어내느라 너무 많은 힘을 소모했다.
인간과 범을 싸움 붙여서 그들이 예전처럼 자멸하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증오하는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기도 했다.
어쩌면 완벽한 순간만을 바라다가 너무 늦게 움직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너무 늦은 건 없지.’
척살검을 가진 제하는 아주 거슬리는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제아무리 척살검을 갖고 있다 해도 제하가 타배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고, 타배가 아닌 자는 환웅을 이기지 못한다.
아니, 타배조차도.
‘나는 그 타배를 이겼지.’
환웅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발작적으로 움직이던 손가락도 멈췄다.
타배가 마지막으로 지었던 그 멍청한 표정을 떠올리면 아직도 웃음이 나왔다.
돌아서는 환웅의 눈에 커다란 화면이 들어왔다.
화면에는 어느 유명 커뮤니티의 게시판이 비치고 있었다.
[제하 지킴이 구합니다.]
[착호를 지키는 모임]
[착호를 구하는 모임 구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하한테 현상금을 거는 건 너무해.]
[환웅, 정신질환인가?]
게시판의 글들을 보자 다시금 속이 뒤집혔다.
착호를, 제하를 칭송하는 멍청한 인간들과 고대에 타배를 따르던 범과 곰들이 겹쳐졌다.
멈췄던 손가락이 다시 빠르게 팔뚝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초조감에 환웅이 침잠했다.
오래전 타배의 어깨에 올라타 신시에 들어온 순간부터 모든 것이 환웅의 안배 하에 움직였다.
지금처럼 예측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환웅은 처음 느끼는 불안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조금.”
환웅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앞당겨볼까?”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