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인왕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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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인왕산 (2)
2023.07.01.
77. 인왕산 (2)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인왕산 부근에 괴물이 많다는 표리의 말 때문에 긴장한 게 민망할 정도로 인왕산은 조용했다.
인왕산 앞의 맨홀 뚜껑을 조금 열고 밖을 살피던 도건이 말했다.
“아무것도 안 보여. 들리지도 않고. 범도 없고 괴물도 없는 것 같긴 한데…….”
“내가 한번 볼게.”
도건보다 감각이 예민한 호수가 나섰다.
그도 한참 바깥을 주시하다가 말했다.
“아무도 없어.”
그제야 착호는 표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인왕산에서 범이 내려왔다는 게 알려진 후 인왕산을 찾는 사람은 없어졌다.
인적이 끊겼음에도 인왕산은 여전히 아름다운 정취를 자랑하며 그곳에 존재했다.
신시에서 벌어지는 일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고요히 자리를 지켰다.
제하는 고개를 들어 인왕산 정상을 올려다봤다.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알기 위해 인왕산을 올랐던 일이 어제처럼 생생했다.
그때만 해도 제하는 평범한 20대 초반의 청년일 뿐이었다.
조금 외롭고 조금 고독하고 조금 쓸쓸하게 자랐을 뿐인 평범한 청년.
신묘한 힘을 얻어서 범과 싸우고 나아가 괴물과 환웅을 상대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중학생 때 가족끼리 인왕산에 올라간 적 있는데.”
환이 그립다는 듯 중얼거렸다.
“동생이 너무 힘들어서 올라가기 싫다고 떼쓰는 바람에 내가 걔 엎고 정상까지 올라가느라 죽을 뻔했었어. 지금이라면…….”
환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백번이라도 엎고 올라가 줄 텐데.
작년 1월부터 지금까지 너무 많은 것이 사라지고 변했다.
이제 두 번 다시는 그때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괴물을 죽이고 환웅을 죽여도 소중한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그럼에도 착호는 이 모든 것을 끝내야만 한다는 걸 알았다.
나의 일상은 되찾지 못해도 누군가의 일상은 되돌려줄 수 있을 테니까.
단지 그 이유를 위해 착호는 말없이 인왕산을 올랐다.
인왕산까지는 표리가 앞장섰지만, 인왕산에 들어온 후부터는 하루가 앞장섰다.
하루는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하루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주안이 하루의 어깨를 살짝 치면서 물었다.
평소라면 이상한 말투로 대답을 해줄 텐데, 하루의 입술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안이 슬쩍 제하를 돌아보자 제하가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세인이 옆에 있던 호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루는 왜 저렇게 폼을 잡는 거야?”
“하루가 인왕산 범바위라고 하지 않았어? 하루한테는 고향에 돌아온 기분 아닐까?”
“그런데 쟤가 정말로 범바위일까? 바위는 그냥 돌일 뿐인데…….”
“뭐, 옛날이야기에 보면 빗자루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변신도 하고 그런다잖아. 하루도 그런 거 아니겠어?”
두 사람이 작게 떠들기는 했지만 하루에게 충분히 들릴 만한 목소리였는데도 하루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 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표리가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표리, 같이 가!”
제하가 놀라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조금씩 싹이 올라오기 시작한 나무들을 헤치고 달려간 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살아남은 두두리 일족이었다.
“표리!”
표리를 알아본 사람이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왔다.
다른 이들도 다가와서 표리의 등을 두드리고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그러는 동안 착호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지켜봤다.
20명이 조금 넘을까?
이렇게 많은 두두리 일족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표리에게는 그 수가 너무 적게 느껴질 것이다.
“장로님은?”
표리의 질문에 옆에 있던 두두리들이 고개를 숙였다.
표리도 눈을 질끈 감았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저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어때? 이곳에 오니까 뭔가 달라지는 게 느껴져?”
두두리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절도 해보고 빌어도 보고 피도 좀 떨어뜨려 보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표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장로에게 들은 인왕산의 결계 이야기는 표리와 두두리 일족에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고대의 힘이 돌아오면 지금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무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앞으로의 싸움에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니.
표리는 눈을 뜨고 착호를 돌아봤다.
표리를 믿고 이곳까지 함께 온 착호는 그저 슬픈 눈으로 표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 많은 동족을 잃은 표리를 향한 안쓰러움 때문이라는 걸 알자, 표리는 더 가슴이 먹먹해졌다.
“얘들아, 나는…….”
표리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여기다, 제하!”
뒤쪽에서 하루의 외침이 들려왔다.
착호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무기를 움켜쥐고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달렸다.
“여기가!”
하루가 허공에 대고 무언가를 비틀어 열려는 것처럼 힘을 주고 있었다.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균열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루의 손이 그 안으로 사라져 있었다.
“그림자의 세계다!”
그 순간.
공간이 비틀어지는 것과 동시에 착호가 두두리 일족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
착호가 사라졌을 때, 후포는 허서를 비롯한 1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지하 통로를 헤매는 중이었다.
나머지 부하들에게는 지상을 돌아다니는 괴물을 맡겼다.
대부분 중급 이하 범이기는 하지만, 여러 명이 함께 공격한다면 괴물 한 마리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상급 범들과 함께 지하로 내려온 건, 마로의 증언 때문이었다.
마로는 인간과 범들이 흘린 피가 땅으로 스며든다며 지하에 무언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허서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마로, 진짜로 이런 데에 뭐가 있을 것 같냐?”
“있다.”
“지하로 피가 흘러들었다고 치자. 지하에서 다시 지상 어딘가로 끌어올려서 사용할 수도 있는 거잖아.”
“이것들.”
마로가 지하 통로 위로 얼기설기 얽혀서 지나가는 관을 가리켰다.
“이상하지 않냐?”
“뭐가 이상해? 그냥 물 빠지는 거 아냐? 아, 전선. 인간들은 전선이라는 걸 땅에 묻는댔어.”
“전선은 이렇게 굵지도 않고 징그럽지도 않고…….”
“피 냄새가 나는군.”
후포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들고 킁킁거리던 후포가 손톱을 길게 빼내서 기분 나쁜 관을 푹 찔렀다가 얼른 손을 뒤로 빼냈다.
범의 힘으로 찌른 건데도 관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후포가 입술을 비틀었다.
“아무래도 마로 말이 맞는 것 같다. 이 관, 그 괴물을 찌를 때랑 비슷한 느낌이군.”
“오, 그래요? 어디 봐요.”
허서도 후포처럼 손톱으로 관을 찔렀다가 “으악!” 하며 손을 빼냈다.
“기분 나빠.”
옥엽이 관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어디가 됐든 이 관이 향하는 곳에 뭔가가 있겠군요.”
“그래, 늦기 전에.”
거기까지 말하고 후포가 고개를 들었다.
다들 후포를 따라서 고개를 들었지만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이끼가 잔뜩 낀 지하 통로의 천장뿐이었다.
이윽고 허서가 귀를 쫑긋하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주군, 위에서 인간 아닌 것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수가 많아요.”
그 말에 범들의 손톱이 길어졌다.
그들은 후포의 명령만 떨어진다면 당장 지상에 올라가서 괴물을 베어 죽일 준비를 했다.
후포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지상의 일은 지상에 남은 녀석들에게 맡긴다. 너희는 여기에 집중해.”
“하지만 주군. 그 녀석들은 고작해야 괴물 몇 마리만 상대할 수 있을 거예요.”
“정 안 되면 도망치라고 일러뒀으니 목숨은 부지하고 있을 거다. 이곳의 일을 빨리 처리하면 올라가는 것도 빨라지겠지. 아니면 허서, 너라도 올라가 볼 테냐?”
후포의 말에 허서는 씩 웃었다.
“제가 가면 주군은 누가 돌봅니까?”
“……나는 돌봄이 필요 없다, 허서.”
“필요 없으시긴요. 우리 주군, 마음이 터무니없이 약하셔서 제가 안 보이면 훌쩍거리시는 거 다 아는데요.”
타악-
마로가 허서의 뒤통수를 때렸다.
“주군께 못 하는 말이 없다, 허서.”
“너는 못 하는 짓이 없었지, 마로. 주군의 명을 따르지 않고 인간 놈이랑 붙어서 미친 짓거리를 했던 게 누구더라?”
“주군께서 용서하신 일로 네가 떠들 건 없지.”
“그렇다고 해서 네가 그렇게 기세등등할 것도…….”
퍼억-!
퍽-!
둘의 뒤에 서 있던 옥엽이 주먹으로 허서와 마로의 등을 갈겼다.
“닥치고 집중해. 이 어린애 같은 놈들아.”
++++
고대 도시가 있었다.
고풍스럽지만 아름다운 영조물들이 빽빽이 들어찬, 촌락이라 하기에는 무척이나 넓은 지역이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었다.
거미줄처럼 뻗은 길가에 초가집, 기와집들이 조화롭게 자리했고 그 사이사이에 자라는 나무들은 풍성한 잎사귀를 자랑했다.
구름 몇 점이 떠다니는 하늘이 있고, 도시 중앙을 따라 흐르는 넓은 강줄기가 있었다.
강가에는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고, 뭔가를 하며 노는 아이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집을 고치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지게에 뭔가를 잔뜩 짊어지고 걸어갔다.
도시 중앙에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었다.
그곳은 마치 그림 같았다.
회색 물감으로 그린 그림.
그 도시는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