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잿빛 도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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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잿빛 도시 (1)
2023.07.08.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도건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제야 다른 일행도 정신을 차렸다.
“이게…… 대체……?”
“뭐야? 왜 온통 회색이지?”
호수와 세인의 말에 조용히 도시를 내려다보던 하루가 입을 열었다.
“신시다.”
“신시? 저게 신시라고?”
“그래, 제하. 저게 신시다. 내 기억 속의 신시.”
“아……!”
제하는 자신이 보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꿈에서 저런 도시를 보았던 것 같다.
꿈에서 본 도시는 천연색으로 찬란하게 빛났지만.
“고대의 신시…….”
하루가 훌쩍 뛰어내리며 말했다.
“가보자꾸나.”
착호는 하루를 따라서 산을 내려갔다.
힘을 얻게 된 후 빠르게 달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분 달리지 않았는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제하가 헐떡거리며 하루를 불렀다.
“자, 잠깐. 하루야.”
날 듯이 달리던 하루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건이 상체를 구부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왜 이렇게…… 헉…… 힘들지?”
“으아…… 헉…… 죽겠다…… 으아…….”
세인이 털썩 주저앉는 걸 의아한 듯 지켜보던 하루가 아, 하고 주먹을 손바닥에 쳤다.
“이곳은 시간의 흐름이 멈춘 곳이지. 그래서…….”
하루가 그들의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도끼로 벤 것 같은 나무둥치가 여러 개 있었다.
“자라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하루가 강 쪽을 가리켰다.
“흐르지도 않지. 그저 존재할 뿐. 아마 공기도 그러한가 보다.”
“공기가…… 부족한 건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몰아쉬는 환을 보며 하루가 쓸쓸하게 답했다.
“그래, 이 세계도 곧 사라지겠지.”
“사라진다니…….”
호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도시를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범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신시에 내려온 범들과 달리 무해해 보였다.
멀리서 보면 그저 평범한 인간들이 사는 곳 같았다.
세인이 물었다.
“일단…… 여기가 네가 말한 그 그림자 세계? 결계? 거기인 거지?”
“그래.”
“그럼 저 사람들은 그 고대 신시에서 벌어진 전쟁 때부터 쭉 여기에 갇혀 있었던 거네? 그 전쟁을 경험했고?”
“그래.”
“그럼…… 괜찮을까? 처음에 신시에 내려온 범들이 우릴 얼마나 증오했는지 잊었어? 지금이야 그놈들이 인간을 공격하지는 않지만……. 저들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잖아. 만약 저 사람들이 우릴 공격하면 어떡해? 난 지금 걷는 것도 힘든데.”
세인의 지적은 옳았다.
이 세계에 시간이 흐름을 멈췄다면 증오 역시 수천 년 전 그대로 저 도시 전체에 고여 있지 않을까?
1년 전 인왕산을 내려오던 범들의 가슴이 증오로 새까맣게 물들었듯이, 지금 이 안에 있는 범들도 그렇지 않을까?
“그 증오가 아직 이곳을 채우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루가 잿빛 도시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제야 일행은 하루 역시 이 도시처럼 잿빛이라는 걸 깨달았다.
회색 머리칼과 잿빛 눈동자를 가진 하루는 마치 이곳에서 나고 자란 것처럼 보였다.
하루가 일행을 돌아봤다.
“하지만 모두가 전사는 아니다. 인간들이 그러한 것처럼.”
모두가 전사는 아니다.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곧 그 의미를 깨달았다.
소수의 전사와 다수의 민간인.
지금껏 인간 사회에서 있어 온 전쟁도 그랬고, 이번에 범과의 전쟁에서도 그랬다.
싸움을 위해 무기를 든 전사는 일부이고 대부분은 그저 평화롭기를 바라며 두려움에 떠는 민간인일 뿐이었다.
하루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느린 속도였다.
그들은 20분쯤 걸어서 잿빛 도시의 거리에 서게 되었다.
도시는 멀리에서 볼 때와 다르게 많은 곳이 상해 있었다.
균열이 생긴 건물들과 부서진 길, 도시 전체를 채운 삭막한 공기.
도시는 마치 회색 모래로 세운 것처럼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사라져 가는구나…….”
제하는 신시에 내려온 범들이 왜 그리도 조급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루의 말대로 이 세계는 이제 그 역할을 다했다.
조만간 모든 것이 부서져서 모래처럼 흩어질 것이다.
제하가 옆에 있는 초가집으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초가집의 문이 열리며 10대로 보이는 소녀가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힘드니까 멀리 가지 말고…….”
동생에게 주의를 주며 나오던 소녀가 뒤늦게 착호를 발견하고 우뚝 멈췄다.
범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착호는 소녀가 비명을 지를 거라고 예상했지만, 소녀는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 물었다.
“누구세요?”
“아…… 저기, 우리는…… 어, 뭐라고 해야 하지?”
세인도 소녀만큼이나 놀라서 더듬더듬 말을 잇다가 도건을 돌아봤다.
그때 소녀의 남동생이 검지를 쭉 뻗으며 말했다.
“인간.”
“인간? 정말?”
“응, 인간. 나래 누나가 그랬잖아. 곰족은 인간이 돼서 귀도 없고 꼬리도 없고 몸도 작아졌다고.”
‘나래’라는 말에 주안이 반응했다.
주안은 들고 있던 창을 옆에 내려놓고 두 아이에게 다가갔다.
“너희들, 나래를 알아?”
“네, 나래 언니는 저기, 저 집에 살거든요.”
소녀가 옆옆 집을 가리키다가 뭔가 깨달은 듯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혹시…… 나래 언니 애인이세요?”
주안이 미소 지었다.
“응, 내가 나래 남자친구야.”
“우와, 우와. 나래 언니가 매일 얘기했어요. 되게 쪼꼬맣고 귀엽다고. 그래서 요만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크네요.”
소녀가 손바닥으로 무릎 높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안이 웃었지만, 착호의 눈에는 주안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표현하지 않았을 뿐, 나래를 잃은 슬픔은 여전히 주안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래 언니는 같이 안 왔어요?”
밖의 일을 모르는 소녀는 착호 뒤쪽을 힐끔거리며 나래를 찾았다.
주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응, 그렇게 됐어.”
“같이 왔으면 나래 언니가 여기저기 구경시켜줬을 텐데. 그런데 저 밖에는 굉장하다면서요? 나래 언니가 항상 그랬어요. 굉장하다고.”
“응, 맞아. 굉장해. 너희도 보여주고 싶다.”
“저희는 못 나가요. 나가려면 힘이 필요한데 저희는 그만한 힘이 없거든요. 그래도 이번에 후포 님이 모두가 다 나갈 수 있도록 뭔가를 하고 돌아오실 거라고 했어요.”
“아저씨, 마로 형 만났어요? 마로 형 엄청 센데!”
소년이 끼어들었다.
착호는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연인을 잃은 주안은 다정하게 말했다.
“응, 엄청 세더라.”
소년이 씩 웃자 작고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마로 형이 제일 세요.”
“아니야. 허서 오라버니가 훨씬 세거든!”
“마로 형이 더 세!”
티격태격하는 아이들을 보며 착호 일행은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저 밖에서는 서로가 증오에 허우적거리며 목숨을 걸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지만, 이곳은 가슴이 아릴 만큼 평화로웠다.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도 이 세계가 서서히 부서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텐데, 아이들은 순수하고 순진하게 이 잿빛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저 밖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았던 신시의 아이들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잿빛 신시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겹쳐졌다.
그리고 이 아이들을 보며 후포를 비롯한 그의 일행들이 느꼈을 감정도.
우리의 아이들은 곧 부서질 세계를 아등바등 살아가는데, 너희의 아이들은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행복하게도 살아가는구나.
우리의 세계는 부서지기 직전인데, 우리를 이곳에 몰아넣은 너희는 참으로 찬란한 도시를 살아가는구나.
질투와 배신감과 뼈 아픈 패배감이 긴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여 다른 감정을 모조리 밀어냈을 것이다.
이제야 인간을 향한 후포 일행의 증오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오라버니, 우리 신단수 구경할래요?”
소녀가 주안의 옷자락을 잡았다.
“신단수를?”
“저 나무요. 옛날에는 저 나무가 우리에게 힘을 줬어요.”
주안이 일행을 돌아보자, 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소녀와 소년을 따라서 신단수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은 저 나무가 너희에게 힘을 안 주니?”
“네, 옛날에 타배 님이랑 후포 님이랑 크게 싸웠거든요. 후포 님 말씀으로는 진짜 신단수는 그때 부서졌대요. 타배 님이 신단수를 부쉈대요.”
후포와 달리 소녀는 자신들을 이곳에 몰아넣은 타배를 미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제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타배 때문에 이곳에 갇힌 건데 그 사람이 밉지 않아?”
“음…… 뭔가 일이 있었나 봐요. 우리 범족 누군가가 곰족이랑 다른 종족을 죽였다고 하던데. 후포 님 말씀으로는 오해가 있을 거라고 했어요. 오해를 풀면 된다고…….”
도건이 옆에 있던 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포는 증오를 아이들에게까지 전하지는 않았나 봐.”
“……생각보다는 괜찮은 놈인가 보네.”
“그러니까 애들이 저렇게 따르겠지.”
“우리한테는 무시무시한 적인데.”
사람에게는 여러 모습이 있는 것처럼 후포 또한 그랬다.
착호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후포와 아이들이 아는 후포를 도통 같은 인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걷다가 신단수 앞의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가까이에서 보는 신단수는 가짜인데도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고개를 아무리 들어도 그 끝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착호가 말로만 듣던 신단수를 올려다보는데, 뒤에서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놈들이 왜 이곳에 있지?”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