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잿빛 도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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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잿빛 도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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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잿빛 도시 (2)
2023.07.15.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깜짝 놀란 착호가 뒤를 돌아보자, 회색과 검은색 줄무늬를 가진 범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왔다.
하루와 비슷한 도포를 걸친 그는 길고 날씬한 장검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의 노란 눈동자가 슬쩍 움직여 제하가 허리에 차고 있는 척살검으로 향했다.
“척살검인가?”
그가 검 손잡이를 쥐자 소녀가 외쳤다.
“유수!”
유수라고 불린 이가 소녀의 외침에 움찔하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싱긋 웃었다.
“운로, 금몽. 애들은 어른들 일에 끼어들지 말고 가라.”
운로라는 소녀가 주안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손님이야. 나래 언니 애인이래.”
“아하. 나래의?”
유수가 주안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히죽 웃었다.
“나래는 어디에 두고?”
주안은 대답하는 대신 아이들을 슬쩍 쳐다본 후 다시 유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유수의 입가에서 미소가 가셨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주안을 응시하다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제 내 손님이다. 너희는 가라.”
“우리가 가면 싸울 거잖아. 유수 오라버니는 싸움을 좋아하니까.”
“……안 좋아해.”
“좋아하잖아. 마로랑 불티가 싸우면 만날 거기에 끼어들면서.”
“그건 말리려고…… 하아. 가라.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까.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유수가 채근하자 주안이 아이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이랑 얘기 좀 할게. 나중에 같이 놀까?”
“유수는 싸움꾼이에요. 괜찮겠어요?”
“응, 괜찮아.”
주안이 다정하게 미소지었지만 운로와 금몽은 불안한 듯 몇 번이나 유수를 힐끔거리다가 그곳을 떠났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않고 공터 근처의 건물 뒤에 숨어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군.”
“나래는 죽었어.”
“너희가 죽였나?”
“불티가 죽였지.”
유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반박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관두고 고개를 저었다.
“이곳을 떠날 때 모두 반쯤 미쳐 있었지. 너희는 너무 행복해 보이는데 이 세계는…….”
유수가 신단수를 손으로 움켜쥐자, 견고해 보였던 신단수가 한 움큼 부서져서 흩어졌다
“사라져가고 있거든.”
그들은 잠시 침묵하며 흩어져 날아가는 신단수의 가루를 응시했다.
이윽고 제하가 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저 밖의 상황을 몰라?”
“몇은 알지. 대부분은 모르고. 그저 주군께서 인간들과 화해를 하기 위해 대화를 나누러 갔다고 알고 있다. 상황은 어떻지? 너희가 이곳에 온 걸 보면…… 우리가 졌나?”
“지지도 않고 이기지도 않았어. 우리와 너희의 싸움은 멈췄어.”
“화해를 한 건가?”
“아니.”
제하가 신단수 뒤로 돌아가는 하루를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괴물이 나타났어.”
“괴물이라니……?”
유수가 황당한 듯 되물을 때였다.
아까부터 신단수 근처에서 무언가를 찾듯이 두리번거리던 하루가 뭔가를 집어 들며 외쳤다.
“찾았다!”
유수가 휙 뒤를 돌아봤을 때, 하루는 아주 작은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하루가 그것을 꽉 움켜쥐는 순간, 바람도 없는 이곳에서 그의 도포 자락이 펄럭거렸다.
하루가 그 작은 조각을 자신의 이마에 대며 말했다.
“내 마지막 조각.”
후포가 제하를 이용해서 범바위의 결계를 깰 때 떨어져 나갔던 한 조각이, 하루의 이마에 녹아 들어갔다.
하루의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착호는 어안이 벙벙하여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하루를 지켜봤다.
펄럭거리던 도포 자락이 사라지고 창백한 피부가 잿빛으로 변해가다가 어느 순간 하루가 있던 자리를 신묘한 모양의 범바위가 차지했다.
“하루야!”
제하가 손을 뻗으며 외치는 것과 동시에.
스아아아-!
강대한 힘이 착호를 덮쳤다.
+++
신시의 어둠에 숨어 있던 괴물들에게 환웅의 명령이 전해졌다.
[시작해라.]
환웅의 살과 힘으로 만들어진 괴물들에게는 단지 그 명령으로 충분했다.
괴물들은 아버지인 환웅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괴물들이 어둠을 벗어났다.
신시의 시민들은 범의 습격을 경험해보았지만, 괴물의 존재는 1년 전과 차원이 달랐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끔찍한 모양새와 온갖 안 좋은 것들을 끌어다가 버무린 듯한 악취.
사람은 상상의 범위를 벗어난 것을 목도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범의 습격에는 두려워하면서도 유지되어왔던 일상이 괴물의 등장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꺄아아아아악!”
“으…… 으어허어어억!”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 사, 살려줘! 살려줘!”
처절하게 목숨을 구걸해도 도움의 손길은 오지 않았다.
아이의 손을 붙잡고 집 안의 작은 괴물에게서 도망 나온 남자는 집 밖에 있는 더 큰 괴물의 다리에 찢겼다.
“으아아아아앙! 아빠아아아아!”
아빠를 부르던 아이의 울음소리도 머지않아 끊겼다.
“가, 같이 가! 같이 가자고, 이 새끼들아!”
친구와 함께 도망치다가 넘어진 청년은 매정하게 가버리는 친구들을 향해 손을 뻗다가, 그 친구들의 앞을 막아선 괴물을 보았다.
꼴 좋다고 비웃을 수도, 도망치라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청년 역시 뒤에 있던 괴물에게 삼켜지고 있기에.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치는 사람도 멀리 가지 못했다.
같은 생각으로 차를 끌고 나온 사람들 때문에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도로에 먹잇감이 많다는 걸 눈치챈 괴물 몇 마리가 도로로 향했다.
괴물들은 통조림 뚜껑을 따듯이 차창을 깨부수고 그 안에서 사람을 꺼내 우걱우걱 씹었다.
희생자들이 흘린 피는 땅으로 스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죽음이 난무한 곳에 피비린내는 없었다.
괴물들이 풍기는 끔찍한 악취만이 가득할 뿐.
운 좋게 괴물들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부 한 방향으로 향한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는 이살 타워가 있었다.
+++
호랑나비 본부에 있던 범 사냥꾼들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본부의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달려가 보니, 팔뚝만 한 크기의 괴물 세 마리가 범 사냥꾼을 뜯어먹고 있었다.
고작해야 중형견 크기의 괴물 세 마리를 상대하다가 두 명이 죽었다.
전투를 끝내고 시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절규.
범 사냥꾼들은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도 역시 사람인지라 두려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모든 걸 관두고 싶었고, 저런 괴물에게 잡아먹히느니 그냥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싶었다.
이곳에 범 사냥꾼들끼리 숨어서 작은 괴물이나 몇 마리 상대하다가 보면 모든 일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범 사냥꾼들의 눈에 공포가 안개처럼 번졌다.
“가자.”
동철이 옆에 있던 부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는 다른 범 사냥꾼들까지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목숨을 거는 일이다.
누구도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저 사람들은 싸울 힘이 없잖냐.”
동철이 부하에게 건넨 말에 범 사냥꾼들은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잡았다.
이 자리에 있는 범 사냥꾼이 모두 사람을 구하겠다는 대의를 위해 무기를 쥐고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니었다.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범 사냥을 시작한 자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그들은 알았다.
저기서 울부짖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신시가 무너지고, 신시가 무너지면 돈도, 명예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내가 어릴 때 어떤 책에서 본 말인데……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더라.”
누군가의 말에 누군가가 대꾸했다.
“책은 무슨. 만화책이겠지.”
“만화책은 책 아니냐?”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특별히 웃긴 것도 아니었지만, 범 사냥꾼들은 작게 웃었다.
그래야 뱃속에서 폭발할 듯 끓어오르는 공포가 조금이나마 가실 테니까.
+++
후포가 지상에 남겨두고 간 범들은 인간들보다는 안전했다.
“대체 어디에 저렇게 많은 게 숨어 있었던 거지?”
황갈색 범이 손톱을 길게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연회색 범이 황갈색 범의 손목을 잡았다.
“진짜로 싸우게?”
“주군이 저걸 보면 죽이라고 하셨잖아.”
“그건 저게 한두 마리일 때 얘기지. 상급 범들 여러 명이서도 저거 하나 상대하기 힘들댔어. 너랑 내가 저걸 죽일 수 있을 것 같냐?”
“그렇다고 주군 명령을 무시해?”
“하지만…… 우리가 목숨을 걸 필요는…….”
“안 갈 거면 놔. 나는 주군 명령에 따라야겠으니까.”
황갈색 범이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연회색 범은 제 동족이 비슷한 체구의 괴물을 향해 머뭇거리지 않고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황갈색 범은 결코 약하지 않았으나 그의 공격은 괴물에게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예리한 손톱은 괴물의 단단한 피부에 작은 상처 하나 내지 못했지만, 괴물의 발톱은 황갈색 범의 피부를 찢었다.
붉은 선혈이 허공에 흩뿌려지자 연회색 범의 손톱이 길어졌다.
“에이씨!”
연회색 범은 욕설을 뇌까리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우리가 왜 인간을 지켜야 하냐고!”
+++
이살 타워의 꼭대기에서는 신시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신시를 내려다보는 환웅에게서 즐거운 흥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인간들은 마치 인간의 발에 짓밟히는 개미 무리 같았다.
저들은 자신들이 개미의 입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절규가 음악처럼 환웅의 귀를 적셨다. 피에 물들어 붉게 변한 공기가 아름다운 그림 같았다.
환웅의 아이들은 환웅이 의도한 대로 잘 움직여주고 있었다.
괴물들은 일부러 인간들을 전부 죽이지 않고 일부는 보내주었다.
자신이 운이 좋은 줄 알고 도망친 인간들은 이살 타워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제 곧 이살 타워 앞이 멍청한 인간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역시 이변은 없군요.”
환웅은 부채를 펼쳐서 살살 흔들었다.
환웅의 입꼬리가 귀에 닿을 만큼 길게 찢어져 올라갔다.
“진작에 이리할 것을…….”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